기형도의 '388번 종점' ...
>2014.7.11
기형도의 '388번 종점'
338번 시내버스를 탔다.
하루에 다섯 번만 다니는 산촌버스다.
울산 언양에서 종점 소호리로 가는 버스다.
그 종점에 내가 앞으로 남은여생을 보낼 산촌의 작은 집이 있다.
버스 안은 겨우 서너 명의 승객이 있을 뿐,...
그래도 버스는 시골길을 말없이 달리고 있다.
버스 기사는 표정이 없다.
승객이 많던 적던, 있든 없던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다.
종점까지는 약 30여분이 남아 있다.
책을 펼쳐 든다.
‘기형도 전집’ 이다.
며칠 전 오래된 서가에서 우연히 눈에 띤 책,
1999년도에 나온 기형도 시인의 유고집이다.
그런데 거기에 ‘기형도’의 시 ‘388번 종점’이 있었다.
내가 탄 버스 번호 338호 와 번호가 비슷하다.
물론 버스 번호만 비슷하지 기형도의 시 ‘388번 종점‘ 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래도 우연의 일치이니 그의 시 속으로 들어 가 본다.
388번 종점
-기형도
구겨진 불빛을 피며
막차는 떠난다.
적막(寂寞)으로 무성해진 가슴 한 켠 空地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는 몇 점 불씨
가만히
그 스위치를 끄고 있는 한 사내의 쓸쓸한 손놀림.
(1881.5.6)
구겨진 불빛을 펴며/ 막차는 떠난다
이렇게 시작되는 이 짧은 시가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제 오지 않는 종점 버스, 그 막차에 탄 나 자신을 발견한다.
내 가슴은 적막으로 무성해진 공지에서 캄캄하게 울고 있다.
어쩜 기형도의 시가 나를 두고 진 시 같다.
‘388번 종점’은 기형도 미발표 시다.
지금은 버스 번호가 모두 바뀌었지만 기형도의 388번 버스의 실제 종점은
기형도가 살던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이고, 시의 배경이 된 종점이라 한다.
▲기형도 생전 모습
팔팔한 이팔청춘 기형도는 의외로 염세주의적인 성향의 시인 이었던 모양이다.
그의 시에서 암울하고 허무주적인 정서가 짙게 배여 있음이 감지되기 때문이다.
그런 그의 시가 좋은 것은 젊디젊은 나이인데도 풍부한 시적 정서가
그의 내면에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불과 나이 29세에 단명하고 말았으나
비록 인간으로서의 그의 일생은 짧았어도
그의 작품세계는 길고도 깊었지 않았나 싶다.
▲전집 기형도 표지부분
‘전집 기형도’에는 1989년 기형도 사 후 발표된 77편의 시와 미 발표 시 20편,
그리고 소설 8편, 산문 4편을 실은 전집이다.
젊은 기형도의 작품은 그의 생전에는 빛을 발하지 못하였으나 사 후에
폭발적인 빛을 발해 젊은 시인으로서 한국 시단에 한 획을 그은 족적을 남겼다.
그의 작품으로는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가 있고,
시와 소설, 산문을 모두 모아 엮은 <전집 기형도> 등이 있다.
기형도의 대표적인 시 부분 작품
빈집
-기형도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있거라, 짧앗던 밤들아
창밖을 떠 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면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안개
-기형도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부분 당선작
▲기형도 생가(광명시 소하도)
시인 기형도(奇亨度 1960 ~ 1989)
생애 및 활동사항
기형도의 시는 자신의 개인적인 상처를 드러내고 분석하는 데서 시작된다. 가난한 집안 환경과 아픈 아버지, 장사하는 어머니, 직장을 다니는 누이 등 어두웠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의 시의 원체험을 형성하고 있다. 그의 시는 우울과 비관으로 점철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개인적인 체험 외에 정치 사회적인 억압이 간접적인 원인으로 자리하고 있다. 「안개」는 억압적 현실 속에 개체화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표현하고 있고, 「전문가」, 「홀린 사람」 등은 기만적인 정치 현실과 무력하게 그것에 휘둘리는 사람들을 풍자함으로써 간접적인 사회 비판적 성격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극히 비관적이며 어떠한 전망도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