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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양산 신흥사를 찾다.

migiroo 2011. 5. 28. 21:12

 

▷2011.5.24


❊양산지방의 유적지 탐방

 

●역사기행, 양산 신흥사를 찾다. 

 


양산지방 문화 유적지 탐방 길에 나선다.
울문연(울산문화재연구원)의 역사기행 팀에 묻어....


 

                  
부산 기장군 명례리 산업단지 조성 지구 현장에 도착했다.
산업단지 조성 지구 내에서 발굴 조사 중인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신라시대 무덤, 그리고 조선시대 가마터 등을 돌아보기로 했다.


산업단지 조성 현장은 그야말로 처참하였다.
여래 대의 포클레인이 들어 앉아 흙을 파 재끼고 있었고
그 아름답던 산과 들판은 속살을 다 들어 내 놓고 개발이라는
명분으로 깎이고 파헤쳐져 가고 있었다.
울창했던 숲은 모조리 배어지고 땅은 만신창이로 온 몸이
찢겨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어찌하랴...
땅은 개발하여 공장이나 집을 져야 하니 파이고 잘린들 어떠한가.
그러나 아쉽게도 어제 내린 빗물이 다 빠지지 않아 발굴현장엔 들어
갈 수가 없어 출토된 토기 몇 점만 눈요기 하고 발길을 돌렸다.   


 


다음 일정은 양산의 신흥사와 신기리, 북정리 고분군 탐방이다.
신흥사는 신라 시대 창건하고 조선 시대에 중창한 절이고,
신기리, 북정리 고분군은 5~6세기 古 신라시대의 가야지방 무덤군이다.

 

 

●신흥사로 들어가는 길~


울산에서 신흥사 가는 길은 배냇골로 내려가는 길이 있고,
반대쪽으로 양산에서 배냇골 쪽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다.


복잡한 도심지를 벗어나 산사로 들어가는 길은 의외로 멀다.
버스 기사가 길을 잘 몰라 몇 번 헤매다가 양산 원당 방향의
배냇골 아랫길을 더듬어 신흥사 방향으로 들어갔다.
 

신흥사 답사는 이번이 3번째 인 듯하다.
마지막으로 다녀 온 때가 한 5년쯤 되는 것 같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요즈음은 10년이 아니라
1,2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한다.
여기저기 산이 깎이고, 하천이 파헤쳐져 길이 나고, 
아파트 단지와 공장 등이 들어서기 때문이다.


그 뿐이 아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강들이
물길이 끊기고 파헤쳐져 이른바 4대강 공사를 진행 중이다.
그 큰 공사를 2,3년 만에 끝내려 하고 있으니
강산이 변해도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변하고 있다.


신흥사도 마찬가지이었다.
올 때마다 옛 전각들이 새 건물로 바뀌어 가고 있고,
그 아담하고 소탈했던 옛 모습이 점차 큰절로 변해 가고 있다.
산문으로 들어가는 소탈한 길은 자동차 길로 바뀌었고,
경내의 전각들도 새로 생겨 고색이 찬연한 천년 대광전
건물을 압도 하고 있다.


작은 절이 크게 번창했으니 좋은 일이긴 하지만...
그러나 옛 그 소탈한 모습이 그리워진다.
신흥사에서 눈여겨 볼만한 것은 국가 보물(1120호)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조선시대 건물 대광전 전각이다.

 

 

●신흥사 일주문


 

 


신흥사 일주문은 철책으로 막혀 있다. 
그러나 일주문 옆으로 35인승 버스가 거침없이 코를 밀고 들어간다.
차타고 일주문을 통과하다니 이제는 더 이상 일주문이 아닌 듯싶다.
속계에서 불계로 드는 경계선...,
여기서 부터는 부처님이 계시는 영역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하는 문이
바로 일주문이다. 그래서 불자들은 옷깃을 여며 합장하고 일주문을
지나 걸으면서 부처님을 생각하고, 자아(自我)를 성찰하며 천왕문에 이른다.


일주문 밖은 속계요, 일주문 안은 불계라...
그러나 그런 일주문의 진정한 의미는 속계와 불계가 둘이 아니고
하나(不二)라는 깊은 철학적 개념이 담겨 있다.
그래서 하나라는 뜻의 일주문(一株門)이다.
그런 일주문을 우리는 버스에 앉아서 홱~ 통과해 버렸다.
참으로 편한 세상 이지만, 왠지 너무 야박한 듯싶다.
일주문에서 걸어 들어가는 아주 작은 고행(?) 마저도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야박함이다. 

 


●신흥사의 사천왕


 


 

예쁜 자연석으로 올린 여섯 돌계단을 밟고 천왕문에 오른다.
부처님 세계로 들어가려면 우선 불계의 수문장 사천왕님께 허락을 받아야 한다.
잘못하면 그 우리부리한 사천왕으로부터 혼쭐이 난다.
그러나 무서운 모습과는 달리 속은 인자하신 분들이다.
이 문을 통과 하지 못한 중생들은 아직 아무도 없다.


이러한 신흥사 사천왕상을 보는 순간 입이 딱 벌어진다.
엄청나게 크기 때문이다.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 말로로는 우리나라에서 크기로
몇째 안 가는 사천왕상이라고 한다.
과연 크다.


 

 


작품은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닌 듯싶다.
건물의 단청이나 사천왕상의 채색이 너무 선명하고 새것 같기 때문이다.
현대의 단청 물감은 화학성분이 많아 채색의 색감이 선명하고 밝긴 한데
천연염료 보다는 내구성이 낮아 오래 가지 못 한다고 한다.


 
 ●신흥사의 보물 대광전 과 벽화들~


 

 


신흥사의 전각 중에 단연 으뜸은 대광전 건물이다.
기록에는 신흥사가 불교 공인 이전의 신라 전기에 창건했다고 했으나 대광전
건축양식이 고려시대 것이라 하니 창건 년대가 신라 시대라는 것은 믿을 수가 없다.


 

 


다만 신흥사가 대찰이었던 것만은 분명하고 임란 때 모두 불타 없어 진 것을 선조 어간에 두 차례

크게 중창하였다 했으니 대광전의 건물은 조선시대에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의 전각들은 화엄전과 지장전, 칠성각, 산신각, 천왕문, 일주문, 국사당 등이 있으며 근년에

새로 지은 전각들도 여럿 있다.


 

 


대광전은 그야말로 고색이 찬연하다.
임란 중에 대부분 전각이 불타 사라졌는데 오로지 대광전 만큼은 화마조차도 감히 접근하지 못하여 온전히 살아남아 오늘에 이른다 하니 그 기적 같은 일은  대광전 안에 봉안한 주불과 후불벽화의 아미타불 삼존불, 관음삼존불의 영험 때문이 아닌가 싶다.
임란 후 조선 후기와 근세에 이르는 동안 수차 수리와 중창을 하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임란 전 건물로는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라 하니 더욱 감회가 깊다.


 

 


대광전 건물의 외부 단청은 모두 퇴색되어 겨우 그 흔적만 어렵프시 남아있고,
내부 단청은 수 백 년의 시간을 담은 체 아직도 건재하고 있다.

 
석가모니불이 두 협시보살을 옆에 두고 좌정하고 있는
불단은 닫집이 없지만 천정에는 화려한 꽃문양이 빈틈없이
그려져 있어 마치 천상에서 화려한 꽃비가 법당 안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는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그리고 후불탱화를 비롯하여 법당 내부 4면의 벽에도 불상과 신장상
삼존도 등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대광전 외부 벽화는 거의 퇴색되어 알아 볼 수가 없고
겨우 채색의 흔적만 희미하게 몇 군데 보일 뿐이니
그냥 눈으로 보면 안 되고 심안(心眼)으로 봐야 볼일 듯하다.


그러나 실망할 필요가 없다.
대광전 법당 안으로 들어가며 심안이 아니더라도 보통 눈으로도
아주 잘 보이는 벽화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시원스런 맞배지붕의 대광전 건물은 단조롭고 간결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복잡함의 극치를 이루고 있는 건물이다.


 

 


겹처마 양식의 지붕 밑을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다포계 공포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그 복잡함이란 인간들의 눈으로 보이는 현상일 뿐이고,
그 진실은 따로 숨어 있다.


 

 


복잡한 공포는 사실은 우주의 질서처럼 질서정연하게 서로 얽혀 있어
육중한 지붕의 하중을 분산 시켜 건물을 지탱해 주는 심오한 과학적
공법이고, 또한 그 복잡성은 마치 백팔번뇌에 시달리고 있는 인생의
복잡다단한 삶을 질서 있게 교화하여 간결하고 단조롭게 해 주는
불교적 사상이 배여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위의 것은 측면 사진이다.
풍판의 거무티티한 색이 건물의 나이를 말해주고 있다.
풍판 아래 벽면에는 각 칸마다 벽화가 가득하게 그려져 있으나
이제는 모진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여 겨우 그 채색의 흔적만
희미하게 보일 뿐이다.


 

 


대광전 4면 모서리 기둥이다. 우주(隅柱)라고 한다.
아마도 대들보를 비롯하여 이 우주와 탱주들은 이 건물의 수많은 목재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 아닐까 싶다.
나머지 것들은 비교적 그 부식이 빨라 수리 중창할 때 계속 교체해 주어야 하지만 아름드리 이 기둥들은 아마도 처음 건물을 질 때 그 목재일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 육중한 기둥마저도 시간만큼은 피할 수가 없는 듯...
갈라지고 터져 깊은 주름살을 하고 있으니 세월의 잔인함 앞에는
당해 낼 재간이 아무 것도 없는 듯하다.

 

 

 

●대광전 내부


 

 


 

대광전 건물 법당 안으로 들어선다.
이른바 부처님이 계시는 금당(金堂)이다.
그러나 불단에 예를 가추기도 전에 그 단청의 고색창연한 장중함에 주눅이 들고 만다.건물의 외부 단청은 거의 다 퇴색되어 사라졌는데 내부 단청은 아직도 불국의 천계답게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화려함이란 인간들이 바라보는 욕망의 화려함이 아니라 시간이 정지 된 듯 천년 단청이 고스란히 어둠 속에 담겨 있다는 뜻이다.


 

 


차라리 검은 단청이라고 해야 할 만큼 단청 색깔은 무겁게 변해 있다.
마치 오랜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닫집이 없는 불단 아래도 천정에서 화려한 꽃비가 쏟아지는 듯
법당은 장구한 시간을 모두 안고 있는 듯하다.


신흥사 대광전에는 왜 닫집이 없을까?
닫집은 불단에 설치하는 부처님의 보궁(寶宮)이라하고 천개(天蓋)라 한다.
그래서 화려한 장식으로 꾸며 불상 머리 위 천정에 매단다.
이 같은 화려한 닫집은 법당뿐만이 아니라 임금의 어좌 위에도 설치했다.


닫집의 역사는 아주 오래됐지만 숭유억불의 조선시대에 들어서 궁전의 닫집보다 더 화려한 닫집을 사찰에 설치하지 못하도록 한 사례가 있고, 더욱이나 유교가 번창한 경상도 지방의 사찰에 화려한 닫집을 허락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예 닫집을 설치하지 않은 사찰도 있다는 주장이 이해가 된다.
그래서 신흥사 대광전에도 닫집이 아예 설치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또 이게 어인 일인가?
대광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을 말하는데...
지권인 수인을 한 비로나자나불은 안 계시고 불단에 석가모니불이
양 협시불을 대동하고 앉아 계시니 어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비로자나불이면 어떻고 석가모니불이면 어떤가.
중생들의 눈에는 그저 어떤 형식의 불상일지라도 모두 한 부처님이시니
어떤 불상을 모셨더라도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재 남아 있는 <신흥사대웅전중수기〉현판이 대웅전으로 되어 있는데 후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원래 대웅전이 대광전으로 이름이 바뀐 듯 하다.


 

 

 

 

●대광전 주불단(수미단)의 여러 모양의 목각 문양


 

 


대광전 불단 아래에 새겨진 각종 문양의 조각들을 모은 것이다.
불단은 수미단이라고 해서 화려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신흥사 불단의 조각은 그리 오래 된 것은 아닌 듯 싶었다.
우선 조각의 채색이 너무 밝고 오래된 흔적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수미단 조각으로 유명 한 사찰은 팔공산 은해사 백흥암 극락전
수미단(보물486호)이 유명하다.

 

 

●신흥사 대광전의 벽화들~


신흥사 대광전이 국가 보물 문화재로 지정된 이유는 내부의 오래된
단청과 사면 벽에 즐비하게 그러져 있는 벽화 때문이다.


 

 

 


여기에서 신흥사 대광전 전각 내외 벽화에 대해서 상세히 언급하고 있는
양산시청 자료를 인용해 보기로 한다.

 


▷대광전 벽화 개요

 
신흥사 대광전 내외 벽면에는 모두 71면에 이르는 벽화가 보존되어 있는데, 내부에는 57면, 외부에는 14면이 남아있다.


대광전 내부에서 바라볼 때 중앙 칸이 있는 정면은 남벽에 해당하고 불단이 있는 뒷면이 북벽에 해당한다. 서쪽 벽면은 중앙 칸인 어칸을 상·중·하 삼단으로 구성하였다. 그 좌우 칸은 상·하 이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신흥사 대광전 내 후불벽을 비롯하여 동벽·서벽·남벽·북벽에 불보살상이 그려져 있다. 먼저, 동쪽 측벽의 중앙 칸은 바닥에서 천장에 이르는 벽을 상·중·하 삼단으로 구획하여 벽화를 그렸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상단의 「약사삼존도」만 남아 있고, 중단과 하단의 벽화는 탈락된 상태이다.

상단의 좌·우 퇴칸에는 도솔내의상과 유성출가상, 서쪽 포벽에는 설산수도상과 쌍림열반상을 각각 나타내었다. 중단에는 벽화가 없지만, 원래는 맞은편과 같은 육대보살이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의 벽체는 예전 것에서 새로 교체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하단 역시 서쪽 측면 벽체와 마찬가지였다고 보이나 향우측면의 팔부중 가운데 신장 1위만 그려진 벽체가 남아있다.

서쪽 벽면은 중앙 칸인 어칸을 상·중·하 삼단으로 구성하였다. 그 좌·우 칸은 상·하 이단으로 구획되어 있다. 중앙 칸의 상단에는 동쪽 벽의 약사삼존과 마주 보도록 아미타삼존을 그렸다. 상단의 좌·우 퇴칸에는 팔상도 중 설산수도상과 쌍림열반상이 그려져 있고, 아래 중단에는 보살상을 그리고, 가장 하단에는 사천왕을 배치하여 상·중·하단과 좌·우의 신장상까지 합하여 하나의 아미타 불화의 도상을 형성하고 있다.


▷신흥사 벽화의 특징

 

 

 


대광전 벽화는 조선시대 다른 사원 벽화와는 달리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물론 좌·우 측면 벽에 삼존도를 그린 경우는 다른 사찰에서도 볼 수 있으나, 한 벽면을 삼단으로 나눠 가장 위의 상단 벽에 본존불과 협시보살을 그리고, 그 아래 중단에 육대보살, 가장 아랫부분에는 사천왕과 팔부중을 묘사한 점이다. 이는 매우 특이한 사례로 꼽히고 있다.


약사여래상의 머리는 신체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고, 정상 계주는 흰 보주를 묘사하였으며, 중앙에는 반달 모양의 백색계주를 묘사하고 있어 맞은편 아미타불의 낮은 육계와 비교된다. 얼굴은 둥근 편이나 눈초리는 좌우로 치켜 올라갔고 코와 수염이 도식적이며 입은 작게 표현되어 있다. 얼굴보다 비대한 불신은 어깨가 직선으로 각진 사각형이며 높게 솟은 육계의 표현이나 풍만한 얼굴과 눈초리가 올라간 눈, 작은 입, 그리고 통견의 대의 옷깃에 표현된 문양 등에서 17세기 후반 경 불화의 양식과 공통되는 특징을 보인다.


▷평가


신흥사 대광전 후불벽은 17세기 불전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특히 양산 신흥사 대광전 벽화는 조선 전기의 무위사나 봉정사 벽화를 잇는 조선 후기의 가장 이른 시기의 예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사원 벽화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전각 내외 벽면에 그려진 다양한 주제의 벽화는 현재 우리나라의 사원 벽화들이 사라지거나 마모된 현실에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 후불벽의 앞면에는 후불탱화가 걸려 있지만, 원래는 먹선의 백묘화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확인할 길이 없다.(*출처 : 양산시 홈페이지-디지탈양산문화대전)

 

특히 주불을 모신 불단  후벽에 흑백으로 그려진 관음삼존도가 압권이다.


 

 


검은 바탕에 흰선의 흑백으로 그린 수월관음 삼존도는 중앙에 수월관음좌상을 배치하고,

그 좌우에 다시 관음입상 2존을 배치한 국내 유일한 후불벽화로 장엄하게 묘사된 관음삼존도이다.
이는 어느 사찰의 벽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형식을 하고 있는 벽화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며 이 작품은 대광전의 건립시기인 조선 17세기경에 그려진 벽화인데

그 후에 퇴색된 부분을 수차 덧칠한 흔적이 있다 했다.


 

 

 


좌우 수월관음의 살짝 허리를 튼 곡선과 휘날리는 옷자락의 유연한 모습을 보면 금방이라도

바람이 살살 부는 듯한 착각에 빠져 든다.


 

 


좌측 관음상을 어람관음(마랑부관음)이라 부르는데 특이하게도 왼 손에 물고기 바구니를 들고 있는데

살아 펄떡이는 잉어 한 마리가 담겨 있다.재밌는 것은 좌측 수월관음도에 얽힌 이야기이다.
여기 저기 인터넷을 여행하다 만난 이야기를 여기에 옮겨 싣는다.


●어람관음(마랑부관음)


당나라 헌종 원화 12년(817)때 섬서 지방 사람들은 성질이 난폭하여 도의심이 전혀 없어

간탐 · 질투 ·살인 등 사악만을 일삼는 무법 지대였다.


그런데 어느 날 대자비보살이 우협시가 되고자 원력을 세우는데 방편으로 이 지방 금사탄 위에서

바구니에 생선을 담아 파는 어람미인으로 나타났다.
그녀는 절륜한 미인이었는데 고을 청년들은 서로 다투어 아내로 삼으려고 했다.


그래서 어람미인은 청혼해 오는 많은 청년들에게 관음경을 나누어주며

 “이 관음경을 하룻밤 사이에 다 외우는 이를 남편으로 섬겨 모시겠다.” 고 약속했다.


이튿날 아침에 이 경을 외운 청년이 수 십 명이나 되었다. 다시 그녀가 말하되,


“내 한 몸으로 어떻게 여러 남자를 섬길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는 하룻밤 사이에 이 금강경을 외우시오.” 하고 권했다.


이튿날 아침에 그녀의 앞에서 외워낸 청년이 10명이나 되었다.

그녀는 하는 수 없이 10명에게 이번에는 법화경을 나누어 주며 사흘간에

이 경을 다 외우는 분을 남편으로 섬기겠다고 약속했다.
약속한 다음 날 아침에 그녀의 앞에서 법화경을 외워낸 이는 마씨라는 청년이었으니,

즉 마랑뿐이었다.


그래서 마씨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그녀는 식장에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다.
슬픔을 깨물고 장의를 치른 지 백일이 지난 뒤에 한 노승이 나타나서


“그 미녀가 바로 관세음보살의 화현일 것이라.”


고 이르자 마랑은 무덤을 파 보았는데 향내가 진동하고 관속에는 오직 황금빛 연쇄골만 있을 뿐이었다.

노승이 석장으로 뼈를 돋우자 쇄골마저 공중으로 날아 가버렸다. 이때 노승이 다시 말하되


“이는 관세음보살이 시현하여 중생을 교화한 성적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노인 또한 이내 공중으로 사라졌다.


그 후 이 고을사람들은 사악한 모든 부도덕을 물리치고 평화로운 정토를 성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유명한 어람관음 또는 마랑부관음의 연기이고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기타 신흥사의 전각들


신흥사의 가람 배치는 남향의 대광전을 중심으로 전면에 천왕문, 동쪽에 응향각,

서쪽에 범종각, 남서쪽 한 단 낮은 곳에 적묵당과 요사채가 있는, □자형으로 되어 있다.


 

 ▲신흥사 전경-사진 켑쳐

 ▲천왕문과 천왕문 앞 석교

 ▲신흥사 기타 전각들~

 ▲신흥사 기타 전각들-

 

 ▲신흥사 원통전

 

 ▲신흥사 현풍루

 

 ▲신흥사의 새로 짓는 건물-아직 단청을 기다리고 있다.

 

 ▲신흥사  범종각

 

 

 

▲신흥사 외부 전경


신흥사 앞 개천가에서 도시락을 먹고
신흥사를 떠난다.

차는 다시 오던 길을 찾아 양산의 도심 주변에 위치한
신기리, 북정리에 있는 고신라시대 가야지역 무덤이 밀집해 있는
고분군으로 향한다.

 

*위의 신흥사 자료 중 인터넷에서 인용 한 것들과 사진 몇 컷을
부득이 켑처하여 인용했음을 밝혀 둔다.


 
>미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