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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울산의 영축사지 삼층석탑...

migiroo 2009. 9. 19. 00:15

 

●쓰러져 통곡하고 있는 울산의 영축사지 삼층석탑... 



나는 울산의 쓰러져 방치되어 있는 영축사지 동, 서
삼층석탑만 보면 슬픔과 울분이 동시에 교차하며 일어난다.
쓰러져 방치된 석탑이 여기뿐이겠는가 만은...
울산에는 남아 있는 옛 석탑이 청송사지 삼층석탑과
그리고 이곳 영축사지 석탑이 유일하기 때문에
폐사지에 방치된 석탑의 모습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울산은 문화재 보호 관리에 적극적이지 못한 것 같다.
그저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만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뿐...
후미진 문화유적지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하기야 공업도시답게 자동차나 선박 수출 같은 것이 우선이고
더 이익이 될 것인데....
별로 이익이 될 것 같지도 않는 몇몇 안 되는 문화유적지 같은 것에
많은 돈을 드려 관리 보존할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천만의 말씀이다.
비록 작지만 보잘 것 없는 문화유적지 하나라도 정원처럼 잘 가꾸어
관리 보존하는 도시야 말로 문화 의식 수준이 높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문화의식 수준이 높으면 높은 수록 도시가 건강해 지고 자연적으로
경제측면에도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울산은 비교적 경주나 김해같이 옛 유적지가 그리 많지 않은 지방이다.
그나 있는 작은 유적지라도 소중히 여겨 잘 가꾼다면 훌륭한 관광자원이
됨은 물론 문화의식 수준이 높은 도시가 될 것이다. 



영축사지의 쓰러져 있는 탑재와 앞에 있는 귀부의 크기를 가늠해 보면
영축사지 탑은 상당히 큰 탑일 것 같고..,
남아 있는 탑재로 보아 충분히 복원 가능한 상태임을 알 수 있다.
금당 터에는 예외 없이 민묘 두기가 있었지만 얼마 전에 이장을
해 간 듯 흔적이 보여 반가웠지만....

복원계획이 없는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인근 일부주민들과 지주들의 유적지 지정
(문화재 보호구역)반대에 부딪쳐 관할 당국에서는 구체적인
복원 계획을 내 놓지 못하고 있고 실정이며 그저 어느 땐 가는
복원 할 것이라는 막연한 구상만 하고 있다는 소문만 들었다.

당국의 미지근한 의지도 문제이지만....
그저 땅값에만 관심이 있는 지주나 주민들의 문화의식이 안타까울 뿐이다.

지금 영축사지에는 보호 철책과 안내판은 있지만
절터 안까지 밭이 경작되고 있어 탑재를 보려면 부득이 밭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밭주인이 알 면은 당장 나가라고 호통을 치곤 한다.
그럴 때 마다 관광이나 답사나 온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리고 있다니
당국의 소흘 함에 정말 울분이 솟지 않을 수 없다. 

잡초 더미에 웅크리고 있는 귀부(돌거북) 한 마리가
머리와 등이 다 깨진 체 그래도 앞발은 내 디디며
이 답답한 곳을 빠져 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귀부여! 귀부여! 가엾은 귀부여!
사람들의 이기심에 너만 불쌍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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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사지 문화재 정보

 

영축사의 창건에 관한 내력은 삼국유사 3권 영축사조에 잘 나타난다.
* 건립연대 : 683년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제 31대 신문왕 3년(683)에 재상으로 있던 충원공이
옛 내산국이었던 동래에서 온정을 하고 굴정역 동지야에 이르러 쉬고 있을 때
홀연히 한사람이 매를 놓아 꿩을 쫓게하매 꿩이 날아 금악을 넘어 간 곳이 묘연
하여졌다.

 

방울소리를 듣고 찾아가 굴정현관가 북쪽 우물가에 이르니 매는 나무 위에 앉아
있고 꿩은 우물안에 있는데 물이 핏빛 같았다. 꿩은 두 날개를 벌리어 새끼 두
마리를 안고 있고 매도 또한 측은 한 꼴을 하고 감히 잡지 못하였다.
공이 이것을 보고 불쌍히 여겨 감동한 바 있어 그 땅을 점쳐보았더니 가히 절을
세울만한 곳이라 하였다. 공이 경주로 돌아와 왕에게 고하고 그 현청을 딴 곳으로
옮기고 그 곳에 절을 세워 영축사라고 이름하였다.

 

이것으로서 683년에 충원공이 절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 영축사는 율리 안영축 마을의 폐사지가 그 절터인데 천삼백년이 가까운 지금도
허무러진 석탑 두기와 파괴된 귀부 한기가 논 가운데 남아 있으나 절이 없어진 까닭
이나 그 연대등은 알려져 있지 않다.

석탑과 귀부등의 조성연대는 신라때로 보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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