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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왜구의 침탈이 잦은 이유.

migiroo 2009. 10. 15. 08:59

 

 

  “조선시대에 왜구의 침탈이 잦은 이유.”


▶해상강국은 왜 후퇴했나?  
▶바다 나가면 곤장 100대 조선시대, 바다는 없었다.
  
청해진이 있었던 전남 완도의 산봉우리 상황봉 중턱에서 바라본 장도. 왼쪽은 강진·여수를 거쳐 일본으로, 오른쪽은 제주도와 중국으로 이어지는 뱃길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신라시대에 활발한 해상무역이 펼쳐졌지만 조선시대 때는 해금조치로 무역이 중단됐다. 장보고가 활동한 청해진의 ‘청해’란 바다를 맑게 한다는 뜻이다. [안성식 기자]
 

“이병철 삼성 회장은 생전에 ‘조선시대 때 왜구 침탈을 당한 원인을 따져 보면 장보고의 해양강국 정신을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항상 안타까워하셨죠.”

이 회장의 비서팀장을 지낸 정준명 전 삼성재팬 사장의 회고다. 이 회장은 동아시아의 해상왕으로서 장보고의 선구적인 식견과 능력을 높이 샀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는 왜 장보고의 ‘해양강국 맥’을 끊었을까.  

 

◆명나라 따라 해금정책 써=조선시대 때는 ‘해금(海禁)정책’이 있었다. 해금은 바다로 나아가 외국과 통교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하해통번지금(下海通番之禁)’의 약칭이다. 해상무역·해상교통뿐 아니라 어업까지도 규제하는 해양 통제정책이다. 조선 초기 태종은 ‘사사로이 바다로 나가 이익을 도모하는 자를 금지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도 1426년 ‘사사로이 국경 근처에서 무역하거나 바다로 나간 자는 장(杖·곤장) 100대에 처한다’고 했다. 태종 때는 바다에 나가 무역하는 것을 규제했지만 세종 때는 아예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신라시대에는 사신과 상인이 주로 해로를 통해 중국에 건너갔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사신과 상인은 육로를 고집했다. 신라시대에 장보고는 바다를 이용해 세력을 확장했고 동북아시아의 국제무역을 장악했다. 그러나 조선시대 500년간 한반도에 ‘바다’는 없었다.

 

조선은 고려 말 삼별초 세력에 호되게 당했던 탓도 있지만 이웃한 명나라의 영향으로 해금정책을 썼다는 학자들의 주장이 많다.

목포대 강봉룡(역사학) 교수는 “명 태조가 정권 위협 요인으로 간주한 강남의 해상 세력을 견제·탄압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편 것처럼 조선도 고려 말부터 기승을 부렸던 왜구 등을 물리치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갖추기 위해 고려 말의 ‘공도정책(空島政策)’을 계승하고 명의 해금정책을 받아들였다”고 말했다. 섬을 비워둔다는 뜻의 ‘공도’는 섬에 사람을 살지 못하게 하는 정부 규제다. 도적들이 섬에 숨는 것을 막는다는 이유도 있었다. 조선은 정기적으로 ‘수토관’을 각 섬에 파견해 섬에 사는 주민이 있으면 육지로 데려왔다. 이 때문에 조선의 통상은 중국과 일본에 한정돼 있었다. 반면 당시 일본은 북해도와 네덜란드, 중국은 동남아시아와 서양 각국과도 접촉하고 있었다. 신라시대에 장보고가 동남아뿐 아니라 이슬람 상인과 거래한 것과 비교하면 해양무역사 측면에서 커다란 후퇴라는 게 상당수 학자의 견해다.

 

조선의 해금정책은 약간의 기복이 있었지만 19세기 말 서구 열강과 근대적 통상조약을 체결할 때까지 500년간 지속됐다. 안정을 원한 조선은 통제하기 어려운 해양 세력의 불안정성을 싫어했다. 해양 세력은 다국적 성향과 자율성·독자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해양을 통해 문화의 다양성을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잃었다.

 

◆임진왜란으로 바다 중요성 깨달아=조선 초기의 지도에서는 섬을 거의 볼 수 없다. ‘조선방역지도’에 표기된 섬은 제주도·대마도·진도뿐이다. 또 ‘동람도’에 나온 섬은 제주도·군산도·흑산도·남해·거제도·대마도에 불과했다. 조선시대에 바다에 나가는 것을 금지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바다를 꺼리게 되고 바다를 장애물로 여기게 됐다. 바다를 막은 조선은 경제·문화적 자폐주의에 깊이 빠져들었다. 신라시대엔 ‘개방’이 코드였다면, 조선시대는 ‘폐쇄’가 코드가 된 것이다.

임진왜란(1592~1598)은 조선에 해양 문제를 일깨웠다. 일방적인 열세에서 벗어나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수군의 승리 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선은 이후에도 해양 문화를 발전시키지 않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도 해금정책을 비판하고 바다를 이용할 것을 주장했다.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조선 400년간 딴 나라의 배가 한 척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한탄하고 바닷길을 통한 통상을 주장했지만 이 주장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조선의 해금에도 왜구는 크고 작은 도발을 계속했다. 결국 조선의 해양력은 갈수록 축소됐고 조선의 해금정책은 섬과 바다, 연해지역을 왜구에게 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  

 

장보고가 활동한 청해진(淸海鎭)의 ‘청해’란 바다를 맑게 한다는 뜻이다. 당시 해양의 쓰레기인 해적 무리를 소탕해 해양을 국제적 평화 교류의 공간으로 회복시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 남한은 국토 면적 1000㎢당 해안선 길이가 116.5㎞다. 이는 섬나라인 일본(92㎞)이나 영국(36㎞)보다 훨씬 길다. 한국은 해양국가인 것이다. 특히 한국의 해상 항로는 미국~일본~한국~중국~동남아~유럽으로 가는 항로의 중심에 있다.

 

최장현 국토해양부 제2차관은 “한국은 해외에 진출한 지 60년밖에 되지 않는다. 세계 주요 도시 중 바닷가에 있는 도시가 발전하고, 내륙 도시는 발전이 더디다”며 “한국은 지리적 위치를 잘 활용하면 ‘동북아 물류 중심지’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서울교대 김호성 윤리학과 교수는 “1200년 전 장보고는 네트워크를 활용해 당시 동북아의 국경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여러 도시에 현지 거점을 건설하고 새로운 글로벌 스탠더드를 만들어 냈다”며 “세계 주요 지역이 자유무역협정(FTA) 등을 통해 블록으로 결집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장보고의 개척정신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조선시대 때는 조각배도 바다에 띄울 수 없다.”


중국 명나라(1368∼1644)를 세운 주원장은 왕조 수립 4년 뒤인 1371년 해상활동을 막는 해금(海禁)정책을 발표했다. 이 때문에 송·원나라 때 ‘바다의 실크로드’를 장악했던 중국의 해상시대는 사실상 막을 내렸다. 송·원나라가 대외교역으로 실리를 중시하며 개방정책을 폈다면 명나라는 농업 위주의 폐쇄적 정책을 썼다. 명나라는 조공무역만 제한적으로 허용했다. 이는 조선이 해금정책을 펴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명 태조는 정권 위협요인으로 간주되는 중국 동남의 해상 세력을 견제하고 탄압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폈다.

하지만 해금정책이 강화되던 15세기 초 세계 항해사에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 3대 황제였던 영락제가 환관 출신의 원정대장 정화(鄭和·1371~1433)에게 대규모 해상원정을 감행토록 한 것이다. 그는 1405년부터 1433년까지 7회에 걸쳐 대선단을 이끌고 동남아시아에서 아프리카 케냐에 이르는 30여 개국을 원정했다. 중국에서 생산되는 비단과 도자기를 주고 열대지방의 보석, 동물, 광물 등을 교환해 이익을 얻었다.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이 인도양에 진출한 것은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80∼90년이나 앞섰다. 함대 규모도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큰 차이를 보였다. 하지만 이뿐이었다. 정화의 대항해는 영락제와 홍희제에 이어 선덕제가 즉위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리고 명나라는 본격적인 쇄국정책으로 돌아서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1567년 명나라는 민간무역을 인정해 해금정책을 완화하는 듯 보였으나 1644년 청나라가 들어서며 또다시 바다를 막았다.

 

특별취재팀 ▶ 팀장=김시래 산업경제데스크▶취재=김문경 숭실대(역사학) 명예교수, 천인봉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 사무총장, 김창규·염태정·이승녕·문병주·강병철 기자▶사진=안성식·오종택·변선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