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78호금동반가사유상의 신비
2005-09-26
인간의 실존적 운명을 자각하고 깊은 사유에 몰입해 있는 인간적인 모습인 사유상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종교는 불교뿐이다. 싯다르타 태자의 고뇌에 찬 모습은 점차 희열에 차서 법열을 느끼는 은은한 미소를 띠게 된다. 인도에서 성립되어 중국에 이르러 수많은 사유상이 만들어졌지만 조형적 완성을 이루어 독립된 예배 대상이 된 것은 우리나라에 이르러서였다. 국보 78호 금동일월식반가사유상과 국보 83호 금동연화관사유상은 그런 의미에서 세계미술사상 기념비적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금동일월식사유상은 불교가 수용되어 6세기 전반부터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지 불과 100년 남짓한 시기에 만들어진 걸작품이어서 우리 민족의 뛰어난 잠재력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일월식사유상 보관에 감춰진 영기 무늬
나는 일찍이 모두가 신라의 작품이라고 알고 있던 때에 이 작품이 고구려의 것임을 논증했다. 그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것이었다. 사유상은 일반적으로 일본 학계의 명칭을 따라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으로 불리지만 반가(半跏)란 말은 반쯤 앉았다는 의미여서 어색하다. 생각에 깊이 잠기면 자연스럽게 취해지는 자세이므로 그저 사유상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일반적으로 위대한 존재의 머리 주변에는 후광(後光)을 표현한다. 인도 불상의 광배(光背·불상의 후광)는 단순한 편인데 중국에 이르러 크게 변화가 일어나 광배의 넓이가 확대되고 그곳에 다양한 역동적 영기(靈氣) 무늬를 새겼다.
우리가 흔히 화염 무늬라고 부르는 것은 ‘불꽃 모양의 영기 무늬’인 것이다. 그러한 영기 무늬는 광배뿐 아니라 보관(寶冠)에도 나타난다.
일월식사유상의 보관은 장식이 매우 복잡하고 화려하다. 나는 이미 가장 윗부분의 3장식이 페르시아 지배자의 관에 장식된 해와 달을 결합한 일월(日月) 장식의 변형임을 규명한 적이 있다. 그 보관을 실측하여 그 세부를 알린 지 25년 뒤 이 글을 쓰면서 보관 장식의 한 부분의 비밀을 풀게 되니 감회가 무량하다.
보관 중앙부에서 양옆으로 잎처럼 솟아오른 이상한 무늬들은 평양 덕화리 1호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익히 보아온 바로 그 영기 무늬 아닌가.
전체 모양도 영기의 싹을 3차원적으로 표현하였거니와 그 안에 선(線)으로 조각한 무늬도 바로 영기의 싹으로 그 끝에서 파장 무늬가 나와 운동감을 나타낸 것은 그 벽화의 무늬 그대로다. 게다가 보관 양쪽에도 역시 똑같은 영기 무늬 다발이 역동적으로 표현돼 있다. 그것은 보관 띠의 끝자락이 아니었다.
보관 띠는 한두 가닥이면 충분한데 무려 열 개가 넘는 다발을 이룬 것은 중생을 널리 구하겠다고 맹세한 보살의 위대한 정신을 마음껏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봐도 고구려 불상일 가능성이 더욱 커진 것이다.
○훼손된 천의(天衣) 끝자락의 미학
중국의 사유상은 대체로 돌로 조각한 것이 많으며 크기도 20cm 내외다. 그런데 이미 6세기 후반 고구려에서는 1m에 가까운 등신대(等身大)의 금동제 사유상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 중국에서는 사유상이 주존(主尊)의 주변이나 소규모 감실에 봉안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환조(丸彫)의 뛰어난 등신대 상으로 사유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법당의 주존으로 모셨음을 웅변하는 것이다. 스님이나 신자들은 그 주변을 돌며 예배하므로 옆면과 뒷면 모두 훌륭히 조각하게 된 것이다.
사유상의 측면을 보면 신체의 굴곡이 매우 탄력적으로 표현됐으나 이 사유상에 아름다움과 힘을 부여하는 것은 바로 천의다. 목에 두르며 신체 양쪽으로 흘러내려 오는 숄 같은 긴 천의가 어깨를 타고 내려오다가 갑자기 넓어지고 첨예한 끝은 힘차게 위로 뻗쳐 올라간다. 천의는 다시 가늘어져서 신체의 굴곡을 따라 밀착하며 내려오다가 배 부분에서 교차하며 좌우로 내려온다.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신체에 밀착하여 둔부 밑으로 일단 들어갔다가 뒤로 다시 나와 흘러내리되 좌우로 뻗치면 조형상 좋지 않으므로 뒤로 힘차게 뻗치고 있다. 그것을 더 강조하기 위하여 끝을 다시 넓게 하여 갑자기 끝이 식칼 같은 형태의 두 가닥으로 갈라지면서 뒤로 뻗치고 있다. 지금은 오른쪽 천의 끝자락 윗부분이 파손되었으며, 왼쪽의 천의 끝은 두 가닥 모두 파손돼 없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과 비교하면 조형상의 큰 차이를 엿볼 수 있다.
보살의 정신을 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형태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다. 예술의 특권은 변형(데포르마시옹)에 있다. 그것이 허용되지 않으면 예술은 존재할 수 없다. 고대인들은 이미 그것을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다. 일상적 표현이 아니기에 오늘날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얼굴을 들어 중생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위로 들어올린 오른쪽 무릎을 힘차게 솟구쳐 받쳐 주는 치마 끝을 보라. 그 부분이야말로 이 사유상의 영기를 가장 강력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이 사유상에는 언뜻 보기엔 고요한 자세로 보이지만 보관, 천의, 치마 등을 통해 위대한 보살 정신의 생명력이 역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런 중요성이 있기에 천의 끝자락 부분을 복원해서 전시해야 할 것이다.
강우방 이화여대 초빙교수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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