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문화재 관련

경주박물관 특별전, 일본인들의 수집품

migiroo 2016. 4. 30. 20:59


>2016.4.27.


경주박물관 특별전, 일본인들의 수집품


비가 내린다. 낮 기온이 20도를 웃돌았는데.....
오늘은 10도 아래로 뚝 떨어져 초겨울처럼 을씨년스럽다.
옷장에서 다시 점퍼를 꺼내 입는다.


오랜만에 우중 나들이를 한다.
국립경주박물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수집한 문화재 특별전이 열린다 하여 간다.
안면이 많은 ‘이영훈’관장은 지난 달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영전해 가고 없었고
새 경주박물관장은 청와대에서 아직 내정 되지 않고 있어 지금 공석이라고 했다.
지방 박물관장 한 자리 임명하는 것도 대통령이 챙기는 권력이라니 참...


경주박물관에는 수학여행 온 아이들로 북적되고 있었다.
비바람이 불고 날씨도 쌀쌀한데 아이들이 몸을 움츠리고
여기저기 웅크리고 앉아 비를 피하고 있다.

 



특별전 유물들을 둘러본다.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수탈하여 일본으로 가져간 유물들을 잠시 빌려와 전시한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일제 패망 즈음 미쳐 일본으로 반출하지 못한 유물들을 경주박물관이 인수 하여 보관 하고 있던 것을 전시한 것 이였다. 그래서 특별전 타이틀도 ‘일본인이 수집한...’으로 되어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수집이 아니라 수탈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싶다.


 









 ■다음은 국립경주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다운 받은 특별전 내용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은 소장품 가운데는 일제강점기(1910~1945) 일본인들이 수집한 한국・중국・일본 관련 문화재 1301건 2651점이 있다. 이 문화재의 일부는 광복 직후 일본으로 불법 반출시키지 못하고 박물관으로 입수되었으며, 일부는 광복 당시 숨겨두었던 비밀 창고가 1963년에 발견되어 박물관으로 옮겨와 접수 품으로 등록 관리하고 있다. 그 동안 우리나라를 포함한 중국・일본의 다양한 종류의 문화재에 대한 진위 확인과 분류 작업 등 기초 조사를 진행하였다.
이번 특별전은 이러한 접수품의 박물관 입수 내력과 대표 문화재를 일반인에게 최초 공개하는 전시로 ‘도자기’, ‘회화’, ‘중국 청동용기’, ‘보존과학’, ‘일제 때 복제된 우리 문화재 등의 5부로 구성하였다. 전시품으로는 우리나라의 고려청자・근대회화, 중국의 고대 예기 등 200여 점과 광복 이후 입수현황을 알 수 있는 관련 문서, 문화재 수리 및 복원된 문화재를 함께 전시하여 20세기 초의 박물관 기능과 보존처리 기법도 함께 소개한다.


1.도자


19세기 초 개성 밭에서 우연히 발견된 고려청자를 계기로 일본인은 고려청자 구입에 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조선총독부 초대통감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고려청자 수집광이었고 이왕가박물관을 설립한 고미야 사보마쯔(小宮三保松) 역시 집안 가득 수집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한국도자는 이렇게 박물관 수집 대상이 되면서 열띤 수집경쟁으로 가격은 더욱 상승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수요를 맞추기 위해 고려능묘와 분청사기 가마의 도굴이 빈번해지고 서울과 대구 등에 골동품상이 성행했다는 기록이 『매천야록梅泉野錄』 등에 남아 있습니다. 광복 이후 청자매병, 분청사기편병 등 당시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던 도자기는 이미 일본으로 상당 수 반출되었습니다.
광복 후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등 일본인 3명으로부터 압수와 기증 형식으로 경주박물관에 입수된 도자는 모두 574점입니다. 대부분 우리나라의 고려청자⋅조선백자⋅분청사기⋅청화백자 등이고 중국 서진시대 청자⋅북송시대 월주요 청자⋅자주요 백자 등과 일본의 20세기 초 유행한 이마리도자⋅ 라쿠양식 도자 일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서화


조선시대는 건국초기부터 도화원圖畵院이 설치되어 사대부와 화원들이 당시 회화의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화원화가의 전통은 조선후기 한국적인 정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정선의 진경산수,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 등이 탄생하는 밑거름이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은 식민지정책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미술을 독창성 없는 중국의 아류로 보려는 풍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중국화풍을 따른 이인문과 심사정의 정형산수화를 더 애호하였고, 일본의 우키요에와 유사한 화조도나 풍속화 수집에 치중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경우에는 에도시대 이후 인물도와 화조도를 포함하여 서양화법이 가미된 풍경화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제국주의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그려진 불화를 다수 수집하는 등 당시 일본인의 미술품 애호 성향이 수집품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3. 중국 청동용기


‘중국 청동용기’는 제작된 시기에 따라 청동예기靑銅禮器와 방고청동기倣古靑銅器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청동예기는 중국 상주시대商周時代(기원전16세기~기원전771)부터 한대漢代(기원전206~기원후220)까지 제작되었습니다. 고대 중국의 황실과 귀족들이 제사, 연회, 전쟁 등 의식을 거행할 때 사용한 용기로 사용자의 지위와 신분, 권력에 따라 엄격한 제한이 있었습니다. 용도에 따라 음식 담는 그릇(食器), 술 담는 그릇(酒器), 물 담는 그릇(水器)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방고청동기는 북송北宋(960~1127)부터 청대淸代(1644~1911)까지 제작된 고대 청동예기의 모방품입니다. 방고청동기는 중국 송대 이후 고대문화의 애호와 전통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의 한 형태로 유행하였습니다. 북송시대 궁정 내부에서 상주시대 청동기를 대량으로 방제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방고청동기는 주로 향로나 꽃병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청동예기는 토제 등으로 모범母范을 만들어 도범법陶范法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밀납법蜜蠟法으로 제작된 방고청동기와 비교하여 문양과 마감처리 등에서 차이를 보입니다.



4. 보존과학


2016년은 박물관 6대 기능에 속하는 보존이 국립박물관에서 그 역할을 시작한지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 동안 국립경주박물관에서는 천마총 출토 장니를 비롯하여 약 2만점의 문화재를 보존처리 하였고, 수장고 및 전시실의 환경관리, 조사 분석을 통한 연구 등 우리문화재의 안전관리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번 보존과학 전시는 문화재보존에 대한 이해와 문화재를 과학의 눈으로 다시 살펴보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특별전 전시품들이 수집되었던 일제강점기 당시의 보존기술에 주목하여 현대의 보존기술과 비교해보고자 하였습니다.
문화재의 보존에 얽힌 이야기와 과학의 시선視線으로 관찰하면서 문화재와 보존과학을 새롭게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5. 일제강점기에 복제된 우리 문화재


국립경주박물관에은 일제강점기 때 제작된 전 충남출토 청동거울(銅鏡)과(접수547), 입실리 출토 청동검 등 6점의 복제품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복제품과 진품 및 관련 기록물을 함께 공개합니다.
그 동안 학계에는 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이 복제품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었지만 그 출처와 성격은 규명되지 못하였습니다. 전시에 처음 공개되는 ‘고고학관계자료모형도보考古學關係資料模型圖譜(1931년/昭和六年’)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제작한 우리 문화재의 복제품 기록을 담은 중요한 발간물입니다. 책의 서문에는 1925년을 전후하여 교토제국대학京都帝國大學의 교수인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 1881~1938)와 기요노 겐지(淸野謙次, 1885~1955) 등이 한국, 일본, 중국, 서양 중요 문화재들의 모형 제작에 착수하여 1930년 작업을 마무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작업의 실무는 교토에 위치한 우에노제작소(上野製作所)가 맡았다고 합니다. 교육용으로 제작된 모형들은 판매가 목적이었고, 일부는 황실박물관, 교토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 등에 기증되었습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복제품은 이때 제작된 것입니다.(*자료 출처 국립경주박물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일본인들의 우리 문화재 수집, 수탈자들


오구라 다케노스케


요약일제 강점기 때 실업가인 오구라 다케노스케(小倉武之助, 1896~1964)가 당시 한반도 등에서 수집해 간 유물 1,000여 점을 일컫는 말 오구라는 대구에서 전기회사를 운영해 막대한 부를 쌓았고 1921년부터는 한반도의 문화재를 마구 도굴, 수집했다. 그러다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자 수집한 유물들을 밀항선에 싣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 오구라 컬렉션에는 그림 ·조각 ·공예 ·복식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전 시기의 한국 유물이 포함돼 있는데, 신라금동관모 등 39점은 일본의 국가문화재로 지정될 정도로 그 가치가 높다.

한편, 한국 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 체결 당시 오구라 컬렉션의 반환을 강력히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정부가 아닌 민간소장품이라는 이유로 거부해 반환이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오구라는 ‘오구라 컬렉션 보존회’를 설립해 유물을 관리했고, 1982년 그의 아들은 유물을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했다. 도쿄국립박물관에 기증된 이후 오구라 컬렉션은 민간 소유가 아니지만 불법 반출됐다는 증거가 분명하지 않아 환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오구라 컬랙션


여러분은 '오구라 컬렉션'이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마 많은 분들이 생소해하실 거라고 생각되는데요.   ‘오구라 컬렉션’은 일제강점기,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가 일본으로 무단 반출되던 때에 ‘오구라 다케노스케’라는 한 일본인에 의해 그의 수집품이 되어버린 안타까운 문화재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런데 최근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이 남북이 제출한 오구라 컬렉션의 보관 중지 및 향후 반환 요청을 거부하는 사건이 발생하여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오구라 컬렉션에는 어떤 문화재들이 속해있는지, 이를 진정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에 대해 저와 함께 이야기해볼까요.


이토 히로부미’,  ‘가루베 지온’,  ‘오구라 다케노스케’ 이 세 사람은 일제강점기 문화재 약탈의ك대장으로 불리는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이 중 오구라 다케노스케는 ‘문화재 도굴의 왕’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간 장본인이며 그가 수집한 유물은 무려 천여 점에 달합니다. 

경부철도 대구출장소의 경리주임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이용한 고리대, 부동산업 등을 시작하며 얼마 지나지 않아 막대한 부를 축적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를 이용하여熁년부터 전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문화재 수집을 진행하였는데, 이는 단순한 문화재 수집에서 벗어나 약탈 및 도굴까지 동반한 방법으로 당시 한반도에 존재하던 엄   
오구라 다케노스케의 불법적인 문화재 수집 행각은 그의 수집품들 중 하나인 ‘조선왕실 풍혈반’의 수집 과정에서만 보더라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는데요. 1981년 오구라 컬렉션이 도쿄박물관에 기증될 때 제출된 목록서를 보면 ‘명성황후 시해현장에서 반출’이라고 이전에 오구라가 수집품 목록에 기재한 부분이 있어 결국에는 이것이 정당한 수집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총독부는 유물의 소지와 신고를 단속하는 '고적 및 유물 보존규칙령' 이라는 것을 제정해 도굴행위 및 출토품의 신고, 유물의 이전과 처분에 있어서 경찰서장을 거쳐 총독부의 허가를 구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제재와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