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2.20
감정 실종
죽었는가, 도무지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앙상한 겨울나무를 앞에서도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는다,
풀잎에 맺힌 영롱한 이슬방울을 보아도 그저 무덤덤하다,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을 봐도 별들을 헤아리지 않는다,
잔설 속 뾰쪽이 올라오는 야생초를 목격하고도
자연의 경이로움을 느끼지 못한다.
배고파 추위에 떨고 있는 길고양이를 보고도 가엾다는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아름답다, 앙증맞다, 가엾다,....
곱다, 밉다....
기쁨, 슬픔, 분노,...
애절함, 간절함, 절절함....
이 같은 감정 표현이 내 가슴 속에서 사라졌다.
감정이 실종 됐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늙은 내 마음속에서 생각하고 느끼는 감정이 실종되어
생각과 느낌이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나이 들면 육신은 물론, 정신도 영혼도 함께 늙는 것일까.
육신이 늙으니 모든 정신적 기능이 노후화되는 듯싶다.
도무지 전처럼 감정이 일어나지 않으니 살아 있음이 아니다.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도 기뻐할 줄 모르고,
슬픔을 보고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불우하거나 가엾음을 보고도 가슴 아파 하지 않고,
불의를 보고도 분노할 줄 모른다.
불의에 대한 항거로 밝히는 수십만, 수백만 촛불을 보고도
함께 동참 하고픈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
국정농단 사태로 온 나라가 벌집 쑤신 것처럼 난장판인데
그들 주범들에 대한 분노심이 일어나지 않으니 내 영혼에
내재되어 있는 감정의 샘이 말라있음이 분명하다.
그리운 사람의 모습도 점점 희미해져 간다.
사랑에 대한 열정도, 그리움에 대한 애절함도.....
미움도 분노(憤怒)의 감정도 유발되지 않으니
산목숨이 아니고 죽은 목숨이다.
생리적 오감(五感)은 아직 남아 있는데
정신적 영감(靈感)은 작구만 둔화 되어간다.
의지(意志)는 있는데 의욕이 이러나지 않고,
욕망(慾望)은 있는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작년 가을부터 지금 겨울 끝자락...,
나는 산 것이 아니라 죽어지낸 듯싶다.
늙은 육신만 숨을 쉬고 영혼은 유체이탈 해버린...
그야말로 감정이 없는 공허한 시간 속에 갇혀 산 것 같다.
그래서 일까, 글 한줄 쓸 수가 없었고,
그림 한 장 그릴 수가 없었다.
책 한 권 읽지 않았고, 고전음악 한 곡 감상하지 않았다.
활발했던 불로그 활동도 멈췄고, 붓에 먹 한번 찍지 않았다.
정신적 활동을 게을리 하거나 멈추면 감정은 죽고 만다.
육신이 늙었다고 영혼과 정신마저도 따라 늙는 것이 아닐 진데....
감정의 동기유발은 어떤 사물이나 사고(思考)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활동을 활발히 하는데서 일어나는 것이 아닐까.
감정의 둔화나 퇴화는 육신의 늙어감에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늙었다고 영적 활동을 게을리 하는 것에서 따라 오는 현상일 것이다.
바로 치매(癡呆)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 버리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늙을수록 영적활동을 더욱 활발히 함으로서
모든 영적 기능의 윤활유인 ‘감정‘이 활발히 일어나는 것이리라.
오지(奧地), 산촌으로 이주해 온지 이제 4년 차....
도심의 화려한(?) 아파트 둥지에서 탈출하여 훨훨 날라
오로지 자연에 묻혀 살아 보려고 (가족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늘그막에 산촌의 삶을 고집했던 나....
도심의 친구들 멀리하고 이런저런 모임 다 빠지고...
오로지 은둔자의 신분이 되어.....
하루 종일 흙 파고, 농작물 심고, 나물케고, 나무하고...
여기저기 집수리하고, 가구 만들고, 마당에 꽃나무 심고....
추운 겨울 오돌 오돌 떨면서 지내온 은둔자의 삶....
이마저도 이제는 나이가 더할수록 육신에 힘이 빠지고
정신도 감정도 자꾸만 둔화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고 느끼기 위한 문화 활동이나 글 읽고 글 쓰고
좋은 음악도 듣는 등의 지적 활동을 게을리 하여 영(靈)적
감정이 둔화 된 것은 아닌지 스스로 자문 해 본다.
간밤까지 내리던 겨울비가 그치고 바람이 휘젓고 다닌다.
입춘이 지나 엊그제 우수(雨水)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그 긴 겨울도 끝자락에 왔음이 감지된다.
봄이 오면 실종된 내 감정이 되살아날까.
나는 겨울 찬바람 부는 산촌 외진 곳에서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들길을 걷고 있다.
>미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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