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합천 영암사지에 가다.

migiroo 2009. 11. 5. 22:35

 

 

●합천 영암사지에 가다.

 
일행 3명을 태우고 6시에 울산을 출발하여 경주로 향했다.
7시 출발 버스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간밤에 잠을 설쳤다.
알람시계가 고장 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염려 때문이다.
소심함이 지나친 것 같아 왠지 쑥스럽다.
막히지 않는 새벽길을 달리니 예정 시간보다 20분이나 빨리 왔다.

 
날씨는 산뜻한 가을 날씨다.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지나 88도로로 접어든다.
차창가로 스치는 시골의 풍경은 너무도 평화스럽다.
들판은 추수가 끝나 사료로 쓰기 위하여 볏짚을 진공 포장한 하얀
뭉치들이 논 마다 널려있다.
 
 

 

 

수확 후의 가을 들판의 새로운 풍속도이다. 
그러나 날 짐승에겐 수난이다.
들판의 벼를 깡그리 쓸어 포장하는 바람에 날 짐승들이
먹어야 할 이삭 한 톨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인간들만의 이기심만이 있을 뿐이다.
함께 살아가야할 날 짐승들에게 작은 배려도 베풀지 않는 인간들...
이 지구상엔 우리 인간들만이 사는 세상이 아니다.

 

 

 

합천 영암사지는 전국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옛 절터(寺址)중에 그 규모가 몇 째 안가는

큰 절터이다. 그리고 석조(石造) 유물이 비교적 많이 남아있는 곳 이기도하다.
그래서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사람들에겐 필수 코스이기도하다.


보물급 문화재만도 3점이나 있고 기타 보물급에 준하는 유물이 천년의 세월을 머금은 체

옛 절터를 말없이 지키고 있다. 영암사지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황매산 자락에 있다.
나의 이번 답사 길은 벌써 4번째가 된다.


우선 사진을 한 장 한 장 감상하면서 영암사지가
어떤 곳인지 알아 본다.

 

 

 

 

영암사지 건물들이 있던 축대이다.
벽돌 모양의 하얗게 보이는 축대는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뒤에 보이는 산이 황매산이다.

 

 

 


축대 복원을 너무 깔끔하게 해서 오히려 옛 흔적들을 잃은 감이 있다.

문화재 또는 유적지의 복원은 가능한 원형에 가깝게 복원해야한다.
너무 완벽한 복원은 오히려 원형을 손상시킬 수 있다.

 

 
보물 480호 영암사지삼층석탑이다.
전형적인 일금당 일탑 식의 신라형식 탑이다.
퍼런 석화가 끼어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멀리 보이는 것은 그 유명한 석등이다.

 

 

 

석탑 밑에 공양드리는 보살상이 있다.
너무나 마멸되어 전체적인 윤곽만 보일 뿐이다.
원래 석탑과 함께 조성 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비록 팔과 다리 그리고 이목구비의 윤곽마저도 다 닮아 없어져 민둥그리 해 졌지만 분명히

공양드리고 있는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금당 바로 앞에 있는 보353호인 쌍사자 석등이다.
사자 두 마리가 힘차게 석등을 받치고 있는 모습에서 역동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사자의 엉덩이와 두 다리의 근육질이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 거리고 있는 듯하다.
연화무늬의 대좌 밑에도 익살스러운 사자들이 조각되어 있다.
사자는 코끼리와 더불어 불교의 상징적 동물이다.
어흥~~~ 하고 사자후를 내 뿜고 있는 듯 두 마리 사자가 그야말로 힘차 보인다.
기계로 깎은 현대의 기술로서는 감히 흉도 못 낼 역동감이다.
혼이 담긴 예술품과 혼이 담겨 있지 않은 현대의 기계적 조각품은 엄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X들이 이 석등들 가져가려고 했는데 주민들이 들고 일어나 약탈해 가지 못하고

합천군청에 오랫동안 보관되어 오다가 제자리에 옮겨졌다는 기막힌 일화가 전해온다.
그래서 그런지 이 석등이 더욱 유명해 졌다. 


 

 

금당으로 올라가는 돌계단과 쌍사자 석등이다.
양쪽의 돌계단은 전체가 하나의 돌로 만든 것이다.

옆에서 보면 아름다운 무지개 계단임을 알 수 있다.
계단은 겨우 한 사람이 오를 수 있도록 했고 경사도 아주 급하다.
이는 금당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허리를 굽히고 올라와야 한다는 물리적 낮춤을 유도한 것이 아닌가

생각 되었다. 경사도가 급해 허리를 굽히지 않으면 오를 수 없기 때문이다.

 

 

돌계단을 밟고 올라서면 석등의 불빛이 비추고 있는 곳 바로 금당이다.
금당은 작지만 사방으로 돌계단을 두었고 계단 난간석에는 극락조라는 가릉빈가를 새겨 놓으니
바로 극락의 계단임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세월이 지나갔는지 가릉빈가도 계단의 난간도 모두 닳아서 세월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드디어 금당으로 오른다.
가운데 부처님이 앉아 계신 곳이 보이고 육중한 기둥을 받치고 있던 이중으로 된 주춧돌이 질서 있게 박혀 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금당의 부처님이 앉아 계시던 대좌가
산산 조각으로 깨져서 저 아래 삼층석탑 옆에 방치되어 있다.

 

 

 
이 엄청나게 큰 대좌가 어찌하다가 금당자리에서 여기 까지 옮겨와 파손이 됐는지 알 수가 없다.
대좌 아래에 사자상이 희미하게 보인다.
영암사는 사자와 관련이 많은 절이었을 것 같다.
불행하게도 영암사지의 규모는 크지만 현재까지 나타난 기록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다만 고승 몇 분의 탑비에 나와 있는 비명에 영암사라는 절 이름만 몇 번 언급되고 있을 뿐이라니

그저 상상만으로 판단 할 수밖에 없다.

 

 

 

금당터 서쪽에 또 다른 금당지가 있다.
이 금당지 양 편으로 보물489호인 쌍귀부(돌거북)가 여의주를 물고 무거운 탑비를 지고 있다.

 
탑비는 지금 사라지고 없지만 귀부의 규모로 보아서는 아주 큰 비석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양 귀부에 새겨진 귀갑무늬를 비롯하여 구름과 물결 모양 등의 무늬가 선명하여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듯 생동감이 넘친다.


 

 

 

특히 동귀부 비좌(비석 받침) 양편으로는 물고기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편에는 쌍어가

서로 맞물려 입을 대고 있고, 왼편 쌍어는 서로 꼬리를 물듯이 시계방향으로 맴을 돌고 있는

형상이 조각되어 있다.

 

 

 


물고기 두 마리(쌍어)의 의미는 무엇인지 좀 더 공부를 해야 할 듯싶다.
다만 가락국 수로왕비(허황후)와 관련된 쌍어 이야기와 관련이 있음직한데 한마디로 말해서

일종의 쌍어신앙에서 나온 듯하다.
불교에서 쌍어는 만물을 보호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있을 뿐이다.
 

영암사지 답사는 시간에 쫓겨 한 시간 반 정도 머물다
황망히 나와야 했다.


요즈음은 해가 짧아 다음 답사지로 서둘러 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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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사지 문화재 정보


(1).영암사지 -사적131호(통일신라)


황매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절터이다. 처음 지어진 연대는 정확히 모르나, 고려 현종 5년(1014)에 적연선사가 이 곳에서 83세에 입적했다는 기록이 있어, 그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홍각선사비의 조각 중에도 '영암사'라는 절의 이름이 보이는데, 홍각선사비가 886년에 세워졌다는 점에서 영암사의 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발굴을 통해 조사해본 결과, 불상을 모셨던 금당·서금당·회랑터·기타 건물터가 확인되어 당시 절의 규모를 알 수 있고, 금당은 3차례에 걸쳐 다시 지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절터에는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삼층석탑·귀부·당시의 건물 받침돌·각종 기와조각 들이 남아있다. 특히 금동여래입상은 8세기경의 것으로, 절의 창건연대를 살피는데 중요하다.

 
(2).영암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353호(통일신라)


석등은 일반적으로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중심으로 하여, 아래로는 이를 받치기 위한 삼단의 받침을 두고, 위로는 지붕돌을 얹는 것이 보통이다. 이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가운데 받침돌로 사자를 배치한 것을 제외한 각 부분이 모두 통일신라시대의 기본형태인 팔각으로 이루어진 이형석등이다. 팔각의 기대 측면에는 안상(眼象)이 배치되었고, 그 안상 안에 사자상(獅子像)이 조각되었다.


(3).영암사지 삼층석탑-보물 제480호(통일신라)

 
이 탑은 탑신부가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에 복원하였으며, 현재 금당 앞에 새로 세운 두 채의 건물사이에 서 있다. 2단의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석탑으로 통일신라석탑의 전형양식을 따르고 있다.
 

(4).영암사지귀부 (靈岩寺址龜趺)-보불 제489호(통일신라)


이 귀부(龜趺) 2기는 영암사터 내의 법당터를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각각 남아 있다. 
귀부는 거북의 모습을 하고 있는 비의 받침돌로, 원래는 그 위로 비몸돌과 비머릿돌이 얹혀져 있었을 것이나, 양쪽 모두 지금은 귀부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동쪽 귀부는 거북의 등무늬가 6각형이고, 비몸돌을 괴는 네모난 비좌(碑座) 주위에는 아름다운 구름무늬가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거북이지만 머리는 용머리처럼 새겼고, 목은 똑바로 뻗어있으며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다.
서쪽 귀부도 6각형의 등무늬를 배열하였고, 등 중앙에 마련된 비좌는 4면에 안상(眼象)을, 가장자리에는 연꽃잎을 새겼다. 서귀부는 동귀부보다 얇고 약간 작지만 거의 같은 솜씨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며, 특히 동쪽의 귀부에서는 정교하면서도 강한 생동감이 느껴지고 있다.
이 귀부 2기는 각 부 양식이나 주위의 석조유물 등과 관련지어 볼 때 9세기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미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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