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강릉 굴산사지 그 활량한 들판에 천년 세월 묻혀 있네.

migiroo 2009. 11. 5. 23:18

 

 

●강릉 굴산사지 그 활량한 들판에 천년 세월 묻혀 있네.

 

1.굴산사지 당간지주
 

 


기상예보와는 달리 강릉지역에 비가 내리고 있다는데....
설마 오후에는 개겠지, 하고 길을 나선다.
비가 온다고 해서 답사를 포기 할 수는 없다.


울산에서 아침 7시 출발....
동해안 7번 국도를 달린다.
동해안에는 왜 고속도로를 내지 않는 건지....
포항을 지나고 영덕, 울진, 묵호를 지나
무려 5시간을 달려 강릉에 도착한다.

 
야속한 비.....
차창의 와이퍼가 바쁘게 움직이며 빗물을 쓸러낸다.
비는 오다,  안 오다 오락가락하고 있고.....
강릉에서 유명하다는 순두부정식으로 점심을 먹는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나니 뜻하지 않은 행운이 찾아온다.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이 구름사이로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앗싸! 이게 왠 행운인가.....?
굴산사지로 향한다.

 

굴산사지 당간지주....


넓은 들판 한 가운데에 우뚝 서있다.
‘우뚝’ 이란 말이 딱 들어맞는 그런 모습이다.
그런데 당간지주는 사방 논에 완전히 포위되어있다.
그나마 둔탁한 시멘트 포장길이 그 옆을 지나고 있다.

 

 

 

그러나 주변의 환경이 어떻든 간에 6월의 초원(들판)에
서 있는 당당한 당간지주를 보는 순간 온 몸에서 욱하고
용트림 하듯 꿈틀 거리는 강인한 전율을 느낀다.

 
수많은 불교 석조(石造) 유물 중에는 그 조각이 너무도 사실적이고,

섬세하고 아름다워 옛 석공들의 솜씨에 그저 넋을 잃고 감탄 한다.
석불이나 마애불....
석탑이나 승탑(부도)....
그리고 古 석조 건축물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들...
아름다운 연꽃무늬, 당초무늬, 보상화무늬....
불상의 섬세한 천의(天衣) 조각, 화려한 연화대좌(蓮花臺坐)...
살아 움직이는 석탑의 각종 신중상(神衆像)들....
이런 옛 돌 조각들을 보고 있으면 사람이 솜씨가 아니라
신(神)의 솜씨가 아닌가, 하고 생각 들곤 한다.
단단한 돌을 마치 진흙으로 빗은 듯 그 조각 솜씨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굴산사지 당간지주는 전혀 그 조각이 없다.
그저 두 개의 돌기둥일 따름이다.
조각이라고는 정으로 듬성듬성 쪼은 정 자국뿐이고....
당간을 고정 시키기 위해 파 놓은 구멍 간구(杆孔) 2개가 전부다.

그런데도 왜 그 앞에 서면 전율 같은 감동이 느껴지는 걸까?

 

 

 
현존하는 당간지주 중에 가장 크고 기이한 모습이기 때문일까?
아니다. 가장 크고 오래 되서 그런 것이 아니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면서도 극히 단순하기 때문이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화려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단순함에서 나온다는 어느 미술평론가의 말처럼
굴산사지의 단순함이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굴산사지에는 세 종류의 극과 극의 석조미술품(유물)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소개한 보물 제86호인 당간지주이고,
또 하나는 보물 제85호인 굴산사지부도이며,
세 번 째는 굴산사지 석불좌상이다.
이 세 유물은 모두 굴산사 옛 절터 잡초 속에 홀로 떨어져 있다.
그러면 왜 이 세 유물이 극치(極値)의 극과 극인가.


하나(당간지주)는 단순함의 극치이고...
다른 하나(부도)는 그 조각술의 화려함이 극치이고,
세 번 째(석불)는 이목구비의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는  
바로 무상무아(無相無我)의 극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 유물의 극과 극에서 느끼는 감정의 합일점은
동일하다.

 


2.굴산사지 부도.....

 
이런 부도를 팔각원당형부도라 분류한다.
그 조각이 얼마나 화려한가를 보자.

 

 

 


마치 단단한 화강암을 떡 주무르듯이 주물러 화려함의
극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섬세한 조각을 새겨 놓았다.
사진을 조금 확대해서 보자.

 


 

무슨 모양의 조각상이 보이는가?
사자상, 고사리무늬, 팔엽앙련화 무늬....
화려한 연화문(蓮花紋) 무늬...
뭉개뭉개 피어오르는 운문(雲紋)....
악기를 부는 악상( 樂像), 공양상(供養像) 등등....
수많은 무늬와 상들이 탑 전체에 새겨져 있다.
 

 

 

 

최첨단 과학 현대의 조각술이 아무리 발달했다 해도
천 수 백 년 전 이 부도탑 조각술을 따라 잡을 수 없을 것이다.
이는 바로 단순히 사람의 손이 아니라 온 정신과 혼(魂)을 불어 넣은
불력(佛力)으로 만든 조각술이기 때문이다.
이 부도는 누구의 부도 인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마도 부도의 화려함으로 보아
굴산사지를 창건(신라 문성왕 13년 851)한 범일국사 부도가 아닐까 싶다.

 


3.굴산사지 석불좌상....

 

 


 

눈도 없다.
코도 없다.
입도 귀도 없다.
손도 없다.
머리위에는 육중한 관(고통)을 이고 계시다.
팔의 흔적으로 보아 수인(手印)이 지권인(智拳印)임을 암시한다.
그래서 대광명(大光明) 대일여래(大日如來),
여래의 으뜸인 법신불(法身佛)의 비로나자불(毘盧遮那佛)이시다.
언제 무엇에(?), 누구에(?) 의해서 처참하게 파손 됐는지....
알 수 없지만.....
여래는 온 몸을 내주시고도 한 점 부족함이 없으시다.
눈이 없으셔도 보고 게시고,
귀가 없으셔도 듣고 계시고,
입이 없으셔도 말씀하시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왜 이 석불을 보고 무상무아(無相無我)라 했는가?
나는 이 불상을 보는 순간 상(相)도 없고 나(我)도 없다. 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상무아라 했다.
우선 무상(無相)이란 무엇인지를 불교사전에서 찾아본다.


무상(無相)은 공(空) 사상을 근본으로 한다.
모든 사물은 공이며 자성(自性)이 없다.
그러므로 무상이며, 무상이기 때문에 청정(淸淨)하게 된다.
또한 무상은 차별 ·대립의 모습[相]을 초월한 상태를 말하기도 하는데,
그 수행을 무상관(無相觀), 무상삼매(無相三昧)라고 한다.
불교 수행의 최고경지인 삼해탈문(三解脫門-空,無相,無類) 무상삼매이다.
무상은 일체의 집착을 떠난 경지이니 바로 무상은 열반(涅槃)의 다른 이름이다.

 
이 말의 뜻을 알 것 같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어렵다.


불상을 보호하기위하여 지은 보호 전각이 너무 비좁아
숨이 막힐 지경이다.
주변 환경도 지저분하다.
좀 더 세심한 주변 정리가 됐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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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산사지 문화재 정보(문화재청)


1.굴산사지(掘山寺址)-사적 448호)

 
굴산사는 847년(문성왕 9) 구산조사의 한 사람이었던 범일(梵日)이 명주도독(溟州都督)의
권유로 창건하였다. 신라시대에는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하나인 사굴산문의 본산으로 알
려진 대찰이었으나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고려말 조선초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된다.


굴산사지로 추정되는 일대는 현재 농경지로 변했기 때문에 사찰의 확실한 규모나 가람배
치를 알 수 없다. 1936년 대홍수 때 이곳 농경지가 유실되면서 초석 일부가 노출되어 건물
터가 확인되기 시작했다. 이때 굴산사지 석불좌상을 비롯한 굴산사지 부도(浮屠:보물 85),
굴산사지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86) 등 굴산사지 관련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2.굴산사지 당간지주(掘山寺址幢竿支柱)-(보물 제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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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문성왕(文聖王)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한 굴산사의 옛터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당간지주이다. 굴산사는 범일국사가 당나라 유학시 왼쪽 귀가 떨어진 승려가 고향에
자신의 집을 지어달라는 청으로 지은 사찰이라고 한다.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
이라 하며, 이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사찰 앞에 세워지며 신성한
영역을 표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 당간지주는 현재 밑부분이 묻혀 있어 지주사이의 깃대받침이나 기단(基壇) 등의 구조를 확인할 수
가 없다. 두 지주의 4면은 아무런 조각이 없으며, 밑면에는 돌을 다룰 때 생긴 거친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다. 깃대를 고정시켰던 구멍은 상·하 두 군데에 있고, 정상은 끝이 뾰족한 형상이며, 남쪽 지주의 끝
부분은 약간 파손되었다. 전반적으로 소박하나 규모가 거대하여 웅장한 조형미를 보인다.


3.굴산사지 부도(屈山寺址浮屠) 분류-(보물 제8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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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부도< 浮屠 >는 굴산사< 屈山寺 >를 세운 범일국사< 梵日國師 >의 사리< 舍利 >를 모신 탑으로 고려시대
< 高麗時代 >에 만들어졌다. 한 돌로 된 8각< 八角 >의 지대석< 地臺石 > 위에 접시 모양의 받침을 놓고 그
위에 하대석을 놓았다. 하대석< 下臺石 >은 아래쪽이 8각의 괴임돌로 받쳐 있으나 위쪽은 원형< 圓形 >이며,
구름무늬< 雲紋 >가 새겨져 있다. 중대석< 中臺石 >은 원형< 圓形 >인데, 구름무늬가 새겨진 8개의 기둥 및
음악< 音樂 >을 연주< 演奏 >하는 하늘나라 사람인 비천< 飛天 >과 공양< 供養 >을 올리는 모습을 조각< 彫刻 >하였다. 상대석< 上臺石 >에는 위를 향한 연꽃인 앙련< 仰蓮 >이 조각되고, 상대석 위에 8각 탑신이 있다.
탑신 위의 지붕돌인 옥개석< 屋蓋石 >은 지붕면의 경사< 傾斜 >가 급하여 육중한 감을 준다. 옥개석 꼭대기
에는 연화문< 연화문< 蓮花紋 > >을 돌린 보주< 寶珠 >가 있다. 탑신이 지나치게 낮고 작은 데 비하여 옥개
석이 너무 커서 균형< 均衡 >이 맞지 않은 느낌이 든다.

 


4.굴산사지 석불좌상(窟山寺址石佛坐像)-(강원문화재자료 제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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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세월 풍상을 겪고 낙뢰의 피해를 입은 듯 전신에 균열이 있고 상호(相好)와 수인(手印), 하반신의 파손이
심하다. 얼굴은 둥글고 길며, 눈꼬리가 길고, 인중은 짧다. 입술은 얼굴에 비해 작고 어깨는 움츠렸다. 두터운
불의(佛衣) 때문에 몸의 굴곡이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두 손을 가슴께에 모은 지권인(智拳印)을 짓고 머리에
관을 쓴 모습이 전체적으로 경직되어 보인다.


발견 당시에는 석불입상으로 알려졌으나 1992년 해체보수 때 석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밝혀졌다. 평창군 진
부면(珍富面)의 월정사 석조보살좌상(月精寺石造菩薩坐像:보물 139)보다 조금 후대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둥글고 긴 안면 골격과 평평한 신체에 추상적인 표현과는 달리 곡선이 많이 사용된 조각기법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인 11세기 자연주의 양식에 속한다.


굴산사지 석불좌상은 신라시대에 명주(溟州)라고 불리던 강릉시 구정면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 강릉한송
사지보살좌상(국보 124), 강릉신복사지석불좌상(보물 84)과 더불어 같은 지역에서 제작된 고려시대 불교조
각으로서 중요한 자료이다.


>2009.6.3
>未知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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