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에 가릉빈가 날갯짓하고....

migiroo 2009. 11. 5. 16:27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에 가릉빈가 날갯짓하고....

 

 

(1).태안사 산문으로 들어가는 길...


 

 

             

 

태안사 답사는 이번으로 두 번째이다.
그러나 몇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곳이다.
적인선사조륜청정탑을 비롯한 보물급 문화재가 즐비하기 때문도 이지만
산문으로 들어가는 길이 너무도 고즈넉하면서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 길이 하도 좋아 차에서 내려 1키로 남짓한 길을 걸어서 올라간다.

 

 

●차안(此岸)에서 피안(彼岸)으로 가는 길....

 

 

            

 

 

태안사 산문 길은 그런 길이다.
차가 다닐 정도로 길은 넓지만 포장을 하지 않은 길이어서
더 정겨운 길인지도 모른다. 길은 숲의 긴 터널이다.
울창한 6월의 녹음 짙은 나무들이 하늘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태안사 산문까지 가는 길은 범상치 않는 4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마치 수행자의 여행길처럼 그 다리들은 진리를 향하여 나를 인도해준다.

 

 

 

●4개의 다리....

 

 

            

 

그 첫 번째 다리는 마음을 정하게 하라는 정심교(情心橋)이고
두 번째 다리는 깨달음의 진리인 반야교(般若橋)이다.
그리고 다시 좀 더 걸으면 모든 번뇌 망상을 벗어 난 해탈교(解脫橋)에 이르고

 

           

이윽고 나는 해탈한 신선이 되어 마지막 다리인 능파각(凌波閣)에 오른다.
능파각 천정에는 커다난 용(龍)한마리가 눈을 부릅뜨고 화염을 내 뿜으며 
몰래 나를 따라 온 속세의 온갖 잡귀(雜鬼)를 물리쳐 준다.

 

 

 

 

나는 맑디맑은 계곡물이 춤추고 있는 능파각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걸어 들어가니 바로 진계(眞界)로 들어가는 녹색 숲길이 나온다.
길은 작고 좁다.
다듬지 않은 작은 돌들을 가지런히 깔아 놓은 길이다.
돌 사이사이 마다 파란 이끼가 잔뜩 끼어있다.
차마 그 이끼를 밟고 지나가기가 미안하여 발 뒷끔치를 살짝 들고
걸으니 하늘 높이 솟아 있는 측백나무 무리들이 오백나한처럼
길 양편에 도열하여 나를 환영한다.

 

 

 

 

나는 오늘 가장 행복한 마음으로 태안사 일주문을 향하고 있다.
숲 향으로 가득한 산문으로 들어가는 길....
6월의 그 길은 온통 녹색 물감을 칠한 한 폭의 수채화다.
그 싱그러운 숲 향에 취하여 드디어 나는 일주문에 닿는다.

 

 

 
(2).피안으로 드는 문 태안사 일주문

 

 

태안사가 어떤 절인가?
혜철 국사에 의해 선종사찰로 개산(開山)되어 동리산파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가 되고
이어서 광자대사가 그 뒤를 이어 대찰로 발전 시켰던 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근대에 들어서 6.25 한국전쟁을 맞아 크게 수난(화재)을 당했다가

겨우 사세을 일으켜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새로 새운 전각들이 그 가슴 아픈 상처를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슴 아픈 것들을 털어 버리고
태안사 일주문은 화려하고 당당했다.

 

다포계 맞배지봉, 일주(一柱) 두 기둥에 보조 기둥 4개
지붕 안쪽에는 용머리가 조각 되어 있고....
단청의 미려함과 공포의 화려함에 일주문에 드는 자
속세의 기가 죽는다.

 

 

 

 일주문 측면이다.

 

이 일주문은 조선 숙종9년(1683)에 짓고 한국전쟁 때 화마를 피하긴 했으나
너무 낡아 1980년에 대폭적인 보수를 했다한다.
산문 아래 반야교 와 해탈교를 지나 왔으니 일주문을 무사통과한다.

 

그러나 문은 또 있다. 천왕문은 없으나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유일하게 태안사에만 있는 배알문(拜謁門)이 있다.
그 문은 누구든지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들어가야 하는 문이다.
 
자! 나머지 문을 한 문, 한 문 통과해 보자.

 

 

(3). 태안사 부도 밭에 가릉빈가 날개짓하고...

 

 

 

 

 

태안사는 일주문을 지났다고 해서 곧바로 경내로 들지 못한다.
일주문 옆에 고승들이 잠들어 있는 부도 밭이 있기 때문이다.
파란 잔디가 깔린 너른 밭에 희고 검은 석화(石花)가 잔뜩 낀 고색의 부도들이 즐비하다.

 

 

 

 

많은 부도 탑 중에서 보물 274호인 광자대사 탑을 바라보며
그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 솜씨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어쩜 한낱 돌에 불과한 것에 저처럼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것이며,
그리고 저 단단한 돌을 어떻게 쪼았기에 저토록 섬세한 조각을
해 낼 수 있는 것인지 탑에 대한 지식보다는 그 조각술에
감탄하고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비록 비신은 없어졌지만 역시 광자대사 탑비인 이수와 귀부에
새겨진 가릉빈가(迦陵頻伽)는 금방이라도 날아 갈듯 날개를 펼치고
퍼득거리고 있는데 그 생동감이 사실처럼 넘쳐난다. 

 

 

●가릉빈가 [迦陵頻伽/歌羅頻伽, Kalavinka]

 

 

 

 

 

위의 가릉빈가상은 구례 연곡사 북부도(국보54호)에 있는 것입니다.
 
산스크리트로 '칼라빈카'의 음사(音寫)이다. 《아미타경(阿彌陀經)》
《정토만다라(淨土曼茶羅)》등에 따르면 극락정토의 설산(雪山)에 살며,
머리와 상반신은 사람의 모양이고, 하반신과 날개·발·꼬리는 새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름다운 목소리로 울며, 춤을 잘 춘다고 하여 호성조(好聲鳥)·묘음조(妙音鳥)·
미음조(美音鳥)·선조(仙鳥) 등의 별명이 있다. 이 새의 무늬를 조각한 불교가
성행했던 통일신라 시대의 수막새 기와들과 구리거울이 지금도 전해 오고 있으며,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연곡사북부도(국보 54)와 연곡사동부도(국보 53)의 상대석
(上臺石) 안상(眼象) 안에 각각 이 새가 새겨져 있다. (*백과사전)

 

 

(4).적인선사조륜청정탑의 배알문

 

적인선사 탑을 보려면 자의든 타의든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굽혀 배알하듯 문(拜謁門)으로 들어 가야한다.
문이 성인키보다 낮기 때문에 허리를 굽히지 않을 수 없다.
문도 너무나 앙증맞고 예쁘다.
배알문 계단을 한단, 한단 발을 딛고 올라가면
안으로 휘어진 두 기둥 사이로 적인선사 탑이 상륜부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계단을 다 올라 허리를 굽혀 앞을 보면 비로소 탑의 전신이
시야에 들어오도록 절묘하게 만든 대문이다.

 

 

 

그런데 내가 수년전에 와서 본 배알문이 아니다.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우측 건물이 원래 것이고.
좌측 건물이 새로 보수 한 것이다.
가만히 살펴보니 보수가 아니고 아예 옛 것을 깡그리 헐어 버리고
새로 지은 것이나 다름이 없어보였다.

 

 더욱이나 배알문의 높이가 옛 날 것 보다 높아 진 것인지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굳이 허리를 굽히지 않아도
들어 갈수 있도록 둔갑을 시켰다.

 

도대체 절 측의 안목이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것인지....
옛 것을 최대한 살리고 활용하여 보수 했어야 하는 건데..

 

내가 잘 못 봤는지는 몰라도...
어리석은 것은 중생뿐이 아니고.....
 

 

 

 

 

 

(5).적인선사조륜청정탑 과 탑비

 

 

 

 

 

적인선사 부도탑은 혜철(惠哲)스님의 사리를 모신 탑.
그리고 스님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는 엄청난 세월이 흘렀음에도
큰 손상 없이 원형 그대로 완벽하게 남아있다.

 

 

▷적인선사 부도탑 (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

 

 

 

 

광자대사 부도탑은 저 아래 일주문 옆에 있는데....
적인선사 부도탑은 배알문까지 만들어 가람의 맨 윗 단에 모셨으니
광자대사님이 서운 해 하시지나 않을까 송구스럽다.
대사도 계급(?)이 있는 것일까? 
 

 

상대석 받침이 겹겹의 복련으로 장식되어있다.
마치 흙으로 빗어 놓은 것처럼 섬세하고 화려하다.

 

 

 

 

옥개석은 마치 기와를 올려놓은 듯 팔각의 처마와 낙수홈이
유연한 포물선을 그리며 한 치의 오차도 없이 8각을 둘렀다.

 

 

 

 

하층대석 기단 면은 또 어떠한가,
사자들이 각 면마다 꼬고 앉아서 익살스럽게 웃고 있는 듯 보이나
탑을 수호하겠다는 단호한 신호같이 느껴진다.

 

 

▷적인선사 탑비

 

 

 

저 아래 광자대사 비는 없어졌는데....
적인선사 탑비는 온전히 남아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아마도 비신을 지고 있는 용머리 거북이가 잘 지켜낸 것일까?

 

 

 

육중한 비신을 등에 지고 있는 귀부의 얼굴은 거북 얼굴이 아니라
용의 얼굴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이빨은 뻐드렁이, 부릅뜬 눈, 돼지 코 같은 콧구멍...
입은 귀밑까지 쭉 찢어져 그리 잘 생긴 얼굴은 아닌데
오히려 그 모습이 무서웠던지 비신을 온전히 지킨 듯하다.

 

 

▷적인선사 혜철 스님은 누구인가? 

 

신라 원성왕 1년(785)∼경문왕 1년(861). 법명은 혜철, 시호는 적인이며 

구산선문의 하 나인 동리산파의 1대조. 15세 때 출가해 영 주 부석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30세 때 당나라로 건너가 남종선(南宗禪)의 지장선사 문하에서 공부했다.

지장선사에게 법통을 전수받은 네 제자 중에 혜철스님을 비롯해 세 사람이 신라인이었다고 한다.

55세 때 귀국 해 화순 쌍봉사에서 9년간 머무르다 63세에 태안사에서 동리산문을 열었다.

 

77세 때 입적하자 경문왕은 적인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의 문도(門徒)로는 풍수도참설로 유명한 도선(道詵), 동리산문의 2대조 여선사(如禪 師)와

3대조 광자대사 등 헤아릴 수 없을 정 도다.

 

 

>미지로(2008.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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