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문화재 관련

신라시대 유물

migiroo 2009. 9. 9. 12:59

신라시대 유물  
 
 

봉화 서동리 쌍 삼층석탑
 
봉화 서동리 석탑 사리구

 

경북 봉화군 춘양면 서동리의 춘양중학교 교정에는 규모와 양식이 꼭 같은 9세기의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있다. 이들 사리구는 1962년 탑을 해체 수리할 때 동탑의 1층 탑신 윗면 중앙에 뚫린 네모난 구멍 속에서 발견되었다. 중앙에는 건립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곱돌제 사리 항아리가 놓여 있었고, 그 주위에는 99기의 흙으로 찍어 낸 탑이 빽빽이 세워져 있었다. 사리항아리 속에는 녹색유리 사리병이 있었고, 사리병에는 좁쌀크기의 사리 3알이 들어 있었으나 이들 사리는 탑이 복원될 때 새로운 용기에 넣어 다시 봉안되었다. 흙탑은 틀로 찍어낸 뒤 호분을 발랐는데, 바닥에는 원추형의 구멍을 뚫고 여기에 다라니를 넣고 둥근 나무마개로 막았으나 대부분 부식되어 없어졌다. 이처럼 사리구와 함께 탑 속에 작은 탑을 함께 봉안하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99개 혹은 77개의 작은 탑을 만들어 그 하나하나에 다시 다라니를 넣어 탑에 봉안하는 행위는 곧 99억의 탑을 만드는 것과 같은 상징적인 행위가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이 탑을 흔히 '무구정탑'이라고 하는데,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드물고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특히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봉화 서동리 석탑 토제 소탑

통일신라(9세기)

 

 불국사 석가탑 사리장엄구

 

불국사 석가탑 사리장엄구

 

불국사는 경덕왕대의 재상인 김대성이 현세의 부모를 위해 창건한 절로서, 대웅전 뜰 앞에 다보탑과 함께 나란히 서있는 석가탑은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들 사리장엄구는 1966년 9월 몰지각한 도굴꾼에 의해 두 차례에 걸친 석가탑 도굴 시도가 있고 난 뒤, 같은 해 10월 탑 속에 안치되었을 사리장엄구의 안전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상층부를 해체하였을 때 제 2층 탑신속에서 나왔다. 탑 2층 몸체부 중앙에 사방 41cm, 깊이19cm로 파낸 네모진 사리공 속에 비단을 깔고 그 중앙에 거의 도금이 벗겨진 금동제의 사리외함을 안치하였는데, 이 사리외함 주위에는 조그마한 목탑 12개와, 동경 2점·청동 비천상·곱은옥·여러가지 구슬 등 갖가지 진귀한 공양품들이 놓여 있었다. 이 금동제의 사리외함 속에는 중앙에 연꽃자리를 마련하고 여기에 은으로 만든 이중의 계란형 사리함을 안치하였으며, 다시 이 사리함 속에 46알의 사리를 담은 녹색유리 사리병이 들어 있었다. 중앙의 계란형 사리함 좌우에도 은으로 된 조그마한 사리항아리와, 향목으로 만든 사리병이 들어있는 금동제의 네모진 사리함이 안치되어 있었다. 이 금동제의 네모진 사리합 위에 저 유명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비단에 쌓인 채 놓여 있었다. 한편 금동제 외함 밑에는 보자기에 싸인 경전으로 보이는 책이 있었지만 부스러져 판독이 불가능하였다. 이들 사리용기를 통해서 통일신라 전성기의 찬란했던 금속공예술과 직조술의 정수를 엿볼 수 있으며, 특히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본으로서 당시 고도로 발달했던 인쇄문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분황사 모전석탑 사리장엄구

 

신라 석탑의 시원양식을 보여주는 분황사 모전석탑은 선덕여왕 3년(634년) 분황사 창건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지금은 3층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9층으로 여겨진다. 이들 사리구는 1951년 이 탑을 수리할 때 2층 탑신 중앙의 석함 속에서 발전되었다.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석함 중앙에 네모진 구멍을 파고 그 속에 사리함을 비롯한 각종 공양품을 넣은 뒤 뚜껑을 덮었다. 사리기로는 창건 당시의 것으로 여겨지는 녹유리 사리병 조각과, 고려시대에 탑을 수리할 때 넣은 것으로 보이는 은합이 있는데, 이 은합 속에 천으로 쌓인 사리 5알이 들어 있었다.공양품으로는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금동체 장식구 조각을 비롯하여 바늘통·가위·향유병·금, 은바늘·조개·갖가지 옥·상평오수전과 숭녕중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