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佛敎 문화재

불화의 이해

migiroo 2009. 9. 13. 22:10

 

불화의 이해

 

 

불화의 뜻

 

불화는 단순한 아름다움이나 선함만을 추구하는 예술이 아니라 불교적인 이념에 입각한 주제를 그리는 성스러운 예술이다. 따라서 성공적인불화는 괴로움에서 해탈할 수 있는 장면을 가장 잘 나타내어진 그림이 진정한 불화가 아닐까한다.

불화는 불교(佛敎)의 교리(敎理)를 알기 쉽게 압축하여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며, 불탑이나 불상, 불경 등과 함께 불교 신앙의 대상이 된다. 불화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예배의 대상이 되는 그림으로 존상화(尊像畵), 부처님의 전생 설화나 생애를 그린 그림(八相圖), 불경에 나오는 교훈적인 장면(變相圖)을 묘사한 그림 등이며, 사원을 장식하는 단청(丹靑)의 경우도 넓은 의미의 불화에 속한다.
 


불화의 기원[佛畵의記遠]
 
불교가 들어오면서 함께 전래된 모든 불교예술중 특히 불화는 당시의 남아있는 자취는 없지만 문헌(文獻)에 기록된 것을 보면 솔거(率居)가 황룡사의 벽화를 그렸다든가 또는 분황사벽(芬皇寺壁)의 천수대비(千手大悲)에 관한 설 오대산 오만문수관음(五萬文殊觀音)에 대한 설(說)을들 수 있다.이모든 그림들은 종이가 발달(發達)되기 이전에는 헝겊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집을 짓고 집벽에다 그림을 그린 것이 더 많았을 것이다.

지금여기에서 이야기하는 불화는 벽에서 이탈(離脫)한 불교미술만이 아니라 벽에 그려진 미술도 이에 포함 시켰을 것이다.그러나 일반 다른 그림들은 중국의 선묘지(線描之) 필법(筆法)은 시대에 전래된 불화의 음양적(陰陽的) 표현법에 의한 방법과 혼합되어 신라시대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샤머니즘적인 그림의 도식적(圖飾的)기법과 혼용(混用)되어 특수한 한국적 그림으로 싹텃으리라 짐작된다. 다만 불화도 불교 조각과 마찬가지로 불교의 성립과 거의 비슷한 시 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초기의 불화로서 남아 있는 예는 하나도 없다. 그러나 초기의 불교 사원에 불화들이 그려졌던 사실은 여러 경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예로 <근본설일체유부 비나야 잡사 (根本說一切有部毘那耶雜事)> 같은 경전에서는 초초의 사원인 기원정사(祇園精舍)에 사원의 건물이나 용도에 따라 불화를 장식하였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 주로 약차(藥叉), 본생담(本生談), 불전도(佛傳圖), 해골등의 교훈적이고 장엄한 그림을 그렸을 뿐이며 예배대상인 존상화들은 아직 그리지 않았다. 지금까지 알려진 최초의 불화는아잔타석굴(Ajantn石窟)벽화이다.


 
불화의 종류
 

불화는 그림이 배치되는 장소에 따라 벽그림, 천정그림, 벽에 거는 그림, 불경에 그린 그림 등으로 분류 되며, 바탕으로 사용된 재료에 따라 흙이나 돌, 종이나 삼베, 비단 등으로 나뉘기도 한다. 불화는 여러 가 지 용도로 쓰이지만 크게 사원을 장엄하기 위한 단청과 일반 대중에게 어려운 불교 교리를 알기 쉽게 전 달해 주고자 그리는 교화용, 그리고 예배하기 위한 예배용으로 나눌수 있다.


탱화(幀畵) :- 천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려 족자나 액자의 형태로 만들어서 거는 불화의 한 유형으로 탱화는 일반 적으로 사찰  의 각 전각(殿閣)안에 모셔져 있는 존상(尊像)의 뒤에 걸리는 후불화(後佛畵)이며 좌우 벽면 에 걸리고 한다. 현존하는 불화  들은 대부분 이 탱화의 형식으로 제작되었고 남아 있는 작품들도 많이 있 다. 탱화 중에서 국가의 천재지변이나 기우제(祈雨  祭-비가 내리기를 비는 제사), 영산재(靈山齋-영혼 천 도를 위한 의식이자 석가의 설법 모임을 뜻하는 영산회상을 상징하는  불교의식), 수륙재(水陸齋-바다나 육지에서 배회하는 영혼들에게 다음 생으로의 안착을 기원하는 불교의식) 등 야외 법회를  마련할때 야외에 걸도록 만든 예배불을 특별히 괘불이라고 한다.
 
경화(經畵) :- 불교의 교리를 알기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경전의 표지나 중요한 대목에 그내용을 그려 서 설명한 그림으로  경화는 붓으로 그린 것보다 판화로 찍어낸 경우가 대부분이며 특히 고려때는 짙은 감색 종이에 금으로 쓴(紺紙金泥) 사경이  많았다.
 

교화용 불화(敎化用 佛畵) :- 일반 대중에게 불교의 교리를 쉽게 전달해 주기 위한 불화. 성스러운 불 교경 전의 내용을 그림  으로 나타냄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교리의 이해는 물론 신성한 감동을 불러 일 으키게 하는 불화이다. 교화용 불화로는 일  찍부터 사원의 벽화로 불전도나 본생도 같은 설화적인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팔상도(八相圖)를 위주로 하여 지옥변(地獄變  - 지옥의 여러가지 유형을 그리며 죄에 따 라 종류가 나눠진다), 아미타내영도(阿彌陀內迎圖 - 착한 일을 하면 내세에 좋은  곳으로 인도된다는 내용 ), 미 륵내영도(彌勒內迎圖), 영상회상도(靈山會相圖 - 부처님의 설법그림), 이밖에 본존불의 후불  탱이나 후불 벽화도 이 범주에 속한다. 특히 어느 특정한 경전의 내용을 변상으로 그린 변상도(經變相圖)는 교화 용 불화의  으뜸으로 꼽힌다.
 

예배용 불화(禮拜用 佛畵) :- 의식같은 때에 예배하기 위한 불화. 예배용 불화는 단순히 예배용 본존으 로만 사용한 경우는  드물고 본존 불상을 보조하는 장엄적,교화적 구실도 겸하고있다. 다만 법당 안에서 할수없는 법회의 경우 야외에서 거행  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때에는 불화를 본존으로 사용하는 것이 상례이다. 이와같이 야외 법회때 사용하는 불화는 괘불(掛  佛) 또는 괘불화라 하여, 법당 앞 뜰에있는 괘불대에 걸어놓고 예배용으로 사용한다.
 

장엄용 불화(莊嚴用 佛畵) :- 사원을 장식하는 불화. 불교 조각이나 회화 같은 것은 불탐이나 불전 또 는 그 밖에 신성한 건조  물을 장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불상의 출현으로 조각은 차츰 예배의 대상 으로 숭 배되었다. 그에 비해 불화는 예배적  인 성격보다는 장엄적이 성격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이 때 장엄한 다는 것은 단순히 ‘꾸민다’는 뜻보다는 종교적인 신성  한 분위기를 ‘조성한다(嚴)’는 의미가 강하다. 장엄화의 대표적인 예로는 천정이나 기둥의 벽면에 그린 단청이나 벽화가 있  다.
 

천정화(天井畵) :- 목조 사원의 천정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름을 칠하거나 부식을 방지하기 위해 기름이 나 채색을 덧입히는  것이다. 특히 법당 같은 곳은 부처님을 모신 성전(聖展)이기 때문에 화려하게 장엄을 하게 되고 이에 따라 천정을 여러 도안  으로 채색하게 되는데, 이것을 흔히 단청(丹靑)이라고 한다. 이러한 단청은 목재를 보존하고 법당의 웅장함이나 아름다움  을 나타내기 위하여 종교 건축물의 기둥이나 문 등에 아름답게 도채 되는것이다.
 

벽화(壁畵) :- 사원의 벽(흙, 나무 또는 돌)에 직접 그린 불화로 불교 벽화는 인도의 아잔타 벽화에서 비롯하여 이란, 키질, 돈  황 등지로 전파되는데 이들 초기 작품들은 주로 본생도(本生圖),불전도(佛傳圖) 등 의 불교 설화를 내용으로 하여 자유스러  운 구도로 그려져 있다. 벽화는 또한 흙벽 그림(土壁畵), 돌벽그 림(石壁畵), 판벽그림(板壁畵)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토벽화  는 사원 건물의 파괴나 보수 때에 어지기 쉬워 서 조선 전기 이전의 작품들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석벽화는 석굴 사원이나   목조 건물이라 하더라도 경 변상도(經變相圖)를 그리거나 새긴 판석을 벽으로 시설한 경우 등의 특수한 예에 속하는 것으  로, 인도나 중국 같은 데서는 예로부터 많은 석굴사원이 조성되어 그 예가 흔하지만 우리 나라는 석굴은 있으나 본 격적인  돌벽화의 예는 없다. 판벽그림은 누각이나 건물의 바깥 벽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무를 붙이고 불 화를그린 것으로, 사원의   나무 기둥이나 문 등에 그린 것도 이에 속한다.
 
 
전각과불화 
 
보통 절안에는 대웅전, 대적광전 또는 비로전, 무량수전, 또는 극락전 등 많은 전각들이 있다. 이러한 전 각 안에는 예배를 하는 각각의 존상들과 거기에 따른 불화가 모셔지게 된다. 이 불화는 신앙의 분화에 따 라 부처님을 모신 상단 불화, 보살과부처님의 제자를 모신 중단 불화가 있으며 하단에는 토속신을 불교 에서 흡수하여 수호신으로 삼아서 그들을 모시거나 죽은 사람을 사후의 세계로 인도하는 하단 불화로 구분이 된다. 이때 대웅전이나 대적광전과 같은 금당에는 상·중·하단의 불화가 함께 설치되기도 하며 한 불화 내에서 3단을 구별하기도 한다.


 
불화의 주제
 

석가모니 후불화(釋迦牟尼 後佛畵):-석가모니를 주제로 한 불화를 모신 전각은 대웅전, 영산전, 팔상전 및 나한전 또는 응진전이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이 주불이므로 후벽에 석가후불화가 모셔지고, 영산전에는 석가모니불이 영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영산회상도가 모셔지며, 팔상전에는 석가여래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가 봉안된다.
 
<법화경>에 의한 그림으로 복잡하게 그리지 않고 법화경의 변상(變相)을 압축 ,묘사하여 예배하는데 적합하도록 하였다. 구도는 시대나 지역에 따라 약간씩 틀리지만 현존하는 조선 후기 불화를 예로 살피면 크게 삼세불화(三世佛畵)와 독존도(獨尊圖)로 나뉜다.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석가가 영취산(靈鷲山)에서 여러불.보살에게 설법하는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석가 후불화보다 그 내용을 보다 자세히 보여준다. 즉 석가후불화 에서는 석가와 보살 및 제자,사천 왕과 팔부중만이 등장하지만 영산회상도에는 설법을 듣는 국왕과 대신이 더해지고 여기에 제석천, 천자 와 천녀를 거느린 범천과 왕비가 등장한다. 또한 중앙불단 아래에 사리불이 부처님께 질문하는 장면까 지나타나 있어 훨씬 생생한 느낌을 준다.
 

팔상도(八相圖):-석가여래의 생애 중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만을 그린 것이다. 태어나서 법을 깨닫고, 그것을 전파한 후 돌아가시는 네가지 장면(탄생, 득도, 설법,열반)을 압축하여 묘사하던 것을 대승불교 에서 여덟 장면으로 발전시켜 묘사한 것이 팔상도이다. 그리고 서너 장면에서 많은 것은 일 곱 장면에 이르는 보다 상세한 세부 장면들로 구성된다.
 
팔상도는 보통 다음의 여덟가지 장면이 그려진다:-- 첫째:- 도솔천에서 내려오는상 둘째:- 룸비니 동산에서 내려오는상 셋째:- 4문에나가 관찰하는 상   넷째:-성을넘어 출가하는상   다섯째:- 설산에서 수도하는상  여섯째:- 보리수 아래에서 마구니에게 항복받는상  일곱째:-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상 여덟째.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하는상
 

비로자나 불화:-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이나 비로전, 문수전, 화엄전 같은 곳에모셔진다. 이불화 역시 석가불화 못지않게 조성되었고, 그만큼 많이 남아있다. 조선 시대에는 대적광전에 비로자나불을 중앙본존으로 노사나불과 석가여래를 좌우협시불로배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이 전각에는 삼신불(三身佛)의 장면을 더 설명한삼신후불화들이 봉안되는데, 지권인을 하고 결과부좌한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상단 과 하단으로 5∼7인씩 보살성중(菩薩聲衆)과 성분(聲聞)들을 배치한 것이 비로자나후불화이다. 노사나후불화는 비로자나후불화의 왼쪽에,석가후불화는오른쪽에 봉안하며,
 
두 그림의 구도는 같다. 노사나불은 결가부좌한 모습으로 설법인을 짓고 보관을 쓴 모습이 특징적이며,앞면 좌우에 지국천왕,증 장천왕이 배치된다. 석가후불화는 항마촉지인을 짓고 앞면좌우에 광목천왕,다문천왕을 배치하고 석가 불 주위에 보살 무리를 묘사하였다.
 
아미타 불화(阿彌陀佛畵):-극락전의 아미타불상 뒤에 모시는 불화이다. 아미타불이 서방정토에서 무량한 설법을 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이 불화는 우리 나라의 경우 몇가지의 형식으로 그려지고 있다.아미타불이 단독으로 그려지는 경우, 삼존불형식으로 그려지는 경우,아미타불과 4대보살 또는 8대 보살을 그리는 5존도와 9존도 형식, 아미타불과 보살들, 아라한, 사천왕 등이 묘사되는 복잡한 형식,
 
서방 극락 장면을 묘사한 그림 형식, 아미타내영도는 아미타불이 염불을 잘행한 사람을 마중와서 서방극락으로 인도해 간다는 염불왕생 (念佛往生)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약사여래 불화(藥師如來 佛畵):-질병과 재난을 없애 준다는 약사 신앙에서 나온 것으로, 불화로 조성할 경우 역시 몇 가지 형식으로 그려 진다.약사여래 단독상만 그려지는 경우,약사여래,일광보살,월광보살을 그리는 삼존형식, 동방유리광세계인 동방정토를 그리는 경우 등이다.그런데 조선 후기에는 석가삼존후불탱화의 왼쪽에 약사 여래를 표현하기도 했다.
 
관음보살도(觀音菩薩圖):-원통전(圓通殿)의 후불화 또는 극락전에 모셔진 불화로 관음신앙의 성행에 따라 많이 조성되었다. 시대 에 따라 그 모습도 다양하여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불화가 조성되었다.보관에 아미타불을 화불로 봉안하고 있는 일반적인 관음보살화 백의관음, 양류관음으로 힌두교 상에서 유래되었다.11면의 표정에서 나타나듯이 다양한 성격을 갖고 중생을 적절히 제도한다는 11면 관음화, 성관음화, 불공견색관음화, 가장 힘있는 구제자를 상징하는 천수관음화
 
 나한도(羅漢圖):-부처의 16제자를 그린 그림으로 응진전(應眞殿)에 봉안된다. 응진전에 모셔진 나한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많은 제자들 중 상수제자 16인이다. 이들은 일찍이 말세의 중생에게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 법으로 인도하겠다는 원을 세운 성자들이다. 따라서 이들은 많은 영험 담과 함께 민간에서 신봉되어 나한 신앙을 형성하게 되었다.

 
조사도(祖師圖):-고승들의 초상화를 일컫는 것으로 영정(影幀) 또는 진영(眞影)이라고 부른다.우리 나라에서는 신라 시대 부터 이런 종류의 그림이 성행하였고, 특히 고려시대에 유행되었던 것같다.
 
제석,신중탱화(帝釋·神衆幀畵):-불법의 외호중(外護衆)으로 모든 불화에 항상 등장하는 신들이다.인도의 토속신이 불교신으로 수용되면서,대승불교에서는 항상 이들을 호법신으로 등장시켜 도상으로 표현하였다.

신중팔부중(神衆八部衆):-팔부중(八部衆)은 천, 용, 야차, 건달파,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마후라가를 가리킨다. 이들은 인도 재래의 토속신으로 불교와 습합하여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의 선신(善神)이 되었다.우리나라의 팔부중은 대개 무장을 한 모습이 많고 손에 들고 있는 지물(持物)이나 자세도 댜양하다.

◈천(天, Deva) 천은 수미산 위의 천상 혹은 천계를 가리키는 말도 되고 그곳에 사는 신도 천이라 한다. 따라서 특정한 천이 아니라 팔부중을 총칭하는 말이다.

◈ 용(龍, Naga) 물속에 살면서 비를 내리게 하는 능력이 있다. 형상은 얼굴과 몸은 사람이고 뱀꼬리를 하는 수가 있고, 머리 위에 셋 내지 아홉 마리의 용머리 또는 뱀모양을 표현하기도 한다.

◈야차(夜叉, Yaksa) 인도 신화에서는 사람을 해치는 귀신이다. 다문천의 권속으로 도리천을 수호한다고 한다. 형상으로 동물형상을 하거나 사람으로 표현할 때는 얼굴은 둘 내지 셋이며 손에는 모두 무기를 들고 있다.

◈간달바(乾 婆, Gandharva) 본래 음악의 신으로 악기를 연주한다. 밀교에서는 제석천 아래에서 어린아이에게 해를 가하는 귀신에서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항상 부처님이 설법하는 자리에 나타나 정법을 찬탄한다고 한다. 보통 무장을 하며 사자(獅子)관을 쓰고 삼차극(三叉戟)을 든다.

◈아수라(阿修羅, Asura) 인도 고유의 신으로 호흡의 신이다. 싸우기를 좋아하여 제석천과 맹렬히 싸운다. 얼굴 셋, 팔 여섯이고 손에는 칼을 들어 무서운 귀신으로 인식된다.

◈가루라(迦樓羅, Garuda) 인도신화에서 공상의 새인 금시조에서 발전한 새중의 왕이다. 밀교에서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범천이 화신한 것이라 한다. 형상은 사람 몸에 새머리로 되고 때로는 전신이 새모양이 되는 수가 있다.

◈긴나라(緊那羅, Kimnara) 형상이 일정하지 않고, 노래하고 춤추는 음악의 신이다.

◈마후라가(摩 羅伽, Mahoraga) : 발없이 배로 움직이는 사신이 형상화 된 것이다. 형상은 두 주먹을 쥐고 춤추는 듯하기도 하고 뱀이 있는 관을 쓰고 노래하는 듯이 나타나기도 한다. 
 
칠성탱화(七星幀畵):-칠성(북두칠성)은 별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별로, 그의 특이한 별자리는 방향을 가리켜 주는 길잡이로 각 광을 받았는데, 사람들은 점차 이 별을 신앙하고 소원을 빌게 되었다. 이러한 민간 전래의 칠성 신앙을 불교에서 받아들여 칠성을 신에서 불(佛)로 승격하게 되었다. 그리고 각 별마다 이름을 붙이고 칠성각에 서 예배하였다. 칠성각의 중에는 칠성을 대표하는 치성광삼존(熾盛光三尊) 그림이 있고, 그 좌우로 칠성 그림을 배치한다.
 
산신도(山神圖):-옛부터 전해오는 우리 민족의 토속신앙이다. 불교가 산신을 호법선신 으로 받아들이므로 산신이라는 인격화한 신과 화신인 호랑이를 표현하면서 재래의 민간신앙을 불교에 포함시킨 것이다.이로써 산신의 위치가 한단계 격상을 하여 독립된 신앙체계를 갖추게 되어 산신각 이라는 전각에 탱화와 등상불을 봉안하게 되었다. 
 
독성탱화(獨聖幀畵):-석가모니 부처님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 천태산에서 수도하면서 부처님이 열반한 후 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자 하는 아라한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독성 또는 나반존자라고 하여 독성각을 짖고 등상불과 탱화를 봉안하고 있다.
 
지옥계불화(地獄系佛畵):-지옥계 불화로는 지장보살도(地藏菩薩圖-지옥의중생구제),시왕도(十王圖-지옥의 심판관인 10인의대왕),삼장보살도(三藏菩薩圖 - 지장보살도가 확대·발전된 것),감로왕도(甘露王圖 - 음력 7월 15일 돌아가 신 부모님을 위하여 부처님과 스님께 음식 공양하는것)등이있다.지옥계 불화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지옥의 중생을 구제해 주는 지장보살그림이다. 보통 명부전의 중앙에는 지장보살상과 그림이 있고 그 좌우로는 5폭씩 시왕도를 배치한다. 대왕중에 전륜대왕만 투구와 갑옷을 입은 무장의 모습일뿐, 그밖의 왕들은 모두관을 쓰고 붓과 홀을 잡고 책상 앞에 앉아있다. 
 
괘불탱화:-나라에 천재지변이 생기거나 기우재(祈雨祭),영산재(靈山齋), 예수재(豫修齋)), 수륙재(水陸齋)같은 야외에서 큰 법회나 의식, 행사를 할때모시는 대상물이다. 내용은 행하고자 하는 법회나 재(齋)의 성격과 의식의 종류에 따라 알맞은 내용을 봉안하는 것이 원칙이며 장수와 극락 정토를 기원하는 영산재에는 영산회상 도를 걸고,죽은 뒤에 행할 불사를 살아 생전에 미리 지내는 예수재나,물 속과 땅 위에 널려 있는 모든 외로운 원혼을 달래고 이를 천도하는 수륙재 에는 지장회상도 나 미륵불을 모시고 관음재일에는 관음보살도를 모셔야 한다.괘불은 다른 불화와는 달리 크기가 크며 큰 것은 높이 15미터, 폭10미터나 되는 대형 걸개그림이다.
 
삼장탱화:-삼장탱은 하늘·땅·지하 삼계(三界)를 제도하는 천장보살(天藏菩薩)·지지보살(地持菩薩)·지장보살(地藏菩薩)을 묘사한 불화이다.이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법신·보신·화신의 삼신불 또는 과거·현재·미래의 삼세불로 확대시켜 나간 것처럼 지옥계의 주존(主尊)인 지장보살을 확대시킨 것으로 여겨진다. 삼장탱의 도상(圖像)은 조선 전기에서도 나타나는데, 조선시대 불화에 영향을 끼쳤던 명(明)나라의 수륙재(水陸齋) 그림에도 삼장보살이 등장하고 있다.
 
이로 보아 망자(亡者)의 혼(魂)을 위로하고 천도(天道)하는 사상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의 천장보살은 천부중(天府衆)을 거느리고 진주보살(珍珠菩薩)과 대진주보살(大珍珠菩薩)이 협시로 등장하며, 좌측의 지지보살은 지부중(地府衆)을 권속(眷屬)으로 삼고 용수보살(龍樹菩薩)과 다라니보살(多羅尼菩薩)을 협시로 대동하고 있다. 그리고 우측의 지장보살은 일반 지장탱과 마찬가지로 왼손에 석장을 짚고, 오른손에는 보주(寶珠)를 쥐고 있다. 권속으로는 명부중(冥府衆)을 대동하고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로 배치 되었다. 
 
천불도:-천불탱화(千佛幀畵)는 천불에서 삼천불 까지 있는데, 삼천불은 과거장엄겁천불(過去莊嚴劫千佛) 현재현겁천불(現在賢劫千佛),미래성숙겁천불(未來星宿劫千佛)을 말한다.모시는 법당은 비로전, 천불전, 삼천불전 등으로 되어 있다.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을 그린 것

53불화:-보광불-삼만왕불까지의 53불을 그린 것
 
용왕탱화:- 용왕탱화의 용왕은 바다의신을 뜻합니다. 즉,물에관련된신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바다에는어부들의 풍어와무사안일을 기원하는의미도있으며 육지에서는 물로인한 수명장수를 의미하기도합니다.탱화의구도는 중앙에는 용왕이앉아계시며 좌,우에는 남순동자와 동녀가 시립해있으며 또한 청룡과황룡을 넣어 용왕탱화의 장엄함을 느낄수있도록 제작하는것입니다.경우에따라서는 바다속에서볼수있는아름다운산호군락과 바다생물들을 형상화해 작업하기도합니다. 
 
조왕탱화:-부엌의 수호신이다.오른쪽에는 연료를 주관하는 담시역사와 왼쪽엔밥짓는 일을 주관하는 조식취모가 시립하여있다.
 
 
고려불화와 조선불화의 양식적 변천
 
조선조 불화에서 고려시대에 비하여 달라진 것은 구도면이다. 일본 요다지에 소장되어 있는 지장보살도는 언뜻보아서는 고려불화라고 할 만큼 고려불화적인 특징이 많이 남아있으나 구도면에서 본존과 권속이 아래 위로 엄격하게 배열되던고려불화특징의 2단구조가깨지면서 권속들이 본존의 몸체부분까지 올라오는 구도를 보여준다.

지장보살의 권속으로 표현된 여섯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은 종전과 같이 지장보살의 대좌 아래 몰려 표현된 것이 아니라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둥근구도를 이루면서 배열되어있다.  더구나 권속들이 아주 작게 묘사되던 고려시대와 달리 본존과 권속 사이에는 거의 크기에 차이가 없어 이들이 지장보살을 현시하는 권속이라기 보다는 그와 동등한 지위에 있는 인물이라는 느낌마져든다.  요다지 지장보살도의 이와같은 구도는 1459년~1493년 사이에 조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수종사 금동불감불화에서 보다 뚜렸이 나타나고 있으며 1476년의 무위사 극락전  후불벽화에도 보인다. 무위사 후불벽화의 경우 협시의 표현이 부처님의 머리부분까지 올라가 협시로서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구도로 바뀌어간다.

 16세기에 이르면 화면의 구도는 완전히 군도양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물론 1565년 약사삼존도(국립중앙박물관소장)처럼 여전히 2단구도가 남아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불화에서는 엄격한 2단구도가 깨어지고 본존을 둘러싼 구도로 바뀌어갔다. 이러한 변화는 모든 불화에서 공통되었던 것으로 조선조 불화의 한 특징으로자리잡게 되었다.군도양식이란 협시들이 본존의 좌우상하 가득히 둘러싸는 구도를 말하는데 권속들의 숫자도 15세기에 비하여 훨씬 많아져서 구성이 매우 복잡해지는 양상을 띤다. 좁은 화면에 20~40명이나 되는 권속들이 꽉들어차게 되면서 좁은 화폭에 많은 인물들을 배치하다보니 자연히 권속을의 크기가 작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 관음사 지장시왕도라든지 일본 지복사 지장시왕도에서와 같이 많은 인물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려는 의도에서 인물을 3~4단으로 나누어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방법도 나타나게 되었다.인물의 형태는 고려말보다 온화해진 경향이 있으나 좀 수척해진 것이 특징이다.

고려불화의 섬세하고 화려하고 화사하며 풍만한 인물표현은 조선초기의 일본 요다지 소장 지장보살도와 같은 곳에는 여전히 남아있지만 1532년 천수관음보살도,1546년 지장시왕도,1565년 약사삼존돋ㅇ에서 보듯이 수척해진 얼굴과 야윈 듯하면서 길다란 몸패등은 조선전기 불화의 인물펴현의 특징적인 모습이며, 특히 인물표현에 있어 머리위의 육계가 점점 뾰족해지고 육계위에 계주가 표현되는 것이라든지 키형의 광배가 나타나는 것도 특징중의 하나이다.  또 하나 인물표현에서 주목되는 것은 돈황화에서 처럼 콧잔등이라든지 눈썹등 일부 부위에 흰색을 칠하여 명암을 강조하는 숫법이 사용되고 있는 점이다.  필선은 고려후기에 보편적으로 나타나던 구불구불한 수법이 사라지고 1476년 무위사 후불벽화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매우 간명하고 단순한 선으로 바뀌며 전에 비하여 색채가 다양해졌다. 

 고려불화에서 볼 수 있는 회화적인 필선은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고 필선은 단지 윤곽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으로 변모 되었다.그것은 찬란한 금색과 복잡한 무늬로 화면을 가득메우던 고려시대에 비하여 조선시대에는 문양이 훨씬 줄어들고 대신 색채로서 그 기능을 대신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부 궁중발원 불화들은 여전히 고려불화 못지 않은 화려한 무늬가 시문되어있기도 하다.  조선후기의 불화는 양식변천에 의해 대략 2기로 나눌 수 있다. 제 1기는 양란을겪은 후 새로 사찰이 건립되는 1650년경부터 1800년에 이르는 기간이고, 제 2기는 1800년 이후 1910년까지의 시기이다.  제1기( 1650년~1800년)는 조선불화의 전형양식이 정립되는 시기로서 조선조 불화중에서도 조선적인 특징이 가장 잘 드러때라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구도이다.  권속들은 위로 올라갈수록 크기가 작아져 마치 화면의 상부를 향해 상승하는 효과를 갖기도 하고, 본존과 권속들의 크기를 확연히 차이나게 한다든지 권속들의 규모를 서로 차이나게 묘사하는 수법은 중앙의 본존을 더욱 돋보이게하며 권속들은 대게 본존을 향해 몸을틀고 있어 본존중심의 예배화로서의 성격을 부각시키고 있다. 형태또한 인물들의 형태가  조선전기에는 다소 수척하면서 세장한 형태가 기본을 이루고 있었지만 조선후기에 이르면 건장하면서도 원만한 형태로 변모되어간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신체가다시 위축되고 세장해지면서 얼굴도 매우 현실적인 모습으로 바뀌며 얼굴의 모습이 둥글거나 사각형적인 업적한 모습이 주류를 이룬다.  1729년 해인사 영산회상도, 1765년 선암사 영산회상도에서 보듯이 얼굴의 크기에 비하여 이목구비가 작게 표현되는 것도 특징중에 하나라고 할 수 있으며 가늘고 긴 눈이라든지 유난히 작은 입, 콧수염과 턱수염의 형식적인 표현등은 어느작품에서나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얼굴은 부처의 자비나 위엄을 나타내주는 정신성이 깃든 상호라기 보다는 무표정하면서도 획일적인 모습으로 변모하여, 조사도라든가 나한도등 특정한 얼굴모습을 표현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비슷비슷하여 구별하기 어렵다.  이러한 특징은 불화가 오랫동안 전통을 고수하면서 전래되는 초본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에 생겨난 결과로 보이며, 따라서 지역적으로 인접한 지역에서는 일정한  화사(畵師)집단에 의해 양식적으로유사한 불화가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1770,80년대 이후가 되면 본존의 상체는 다시 길어지면서, 얼굴에서는 더 이상 원만하고 풍만한 모습은 볼 수 없으며 사각형적인 얼굴에 작은 이목구비로 인하여 부처의 자비와 위엄이 많이 사라졌다. 17세기중엽~18세기초의 불화에서는 광배 내부를 화려한 국당초문또는 방사형으로 가득채운 키형광배가 성행하였는데 사각형에가깝게 각지게 처리된 두광, 신광은 장대한 신체의 본존을 더욱 당당하게 보이게 해준다 .

 그리고 대부분의 광배 내에는 현란한 모습의 꽂장식이나 방사형으로 뻗어가나가는 빛줄기등으로 가득메우고 있어 복잡하면서 장식적인 효과를 줘고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모습으로 표현하여 인물들이 구름사이에 서있는 것같은 모습은 종교화로서의 신비감을 더해준다  색채또한 다양해지면서 화려해 진 것이 이 시대의 불화의 한 특색이다.   17세기 후반기의 불화에서는 색채가 매우 밝고 투명하게 설채되었으며, 특히 화엄사 쾌불에서는 붉은색과 녹색이 밝고 연하게채색되어 거의 포가 비칠 정도의 색감을 느끼게 한다. 이와 같은 설채법은 18세기 초반에도 그대로 계승되고 , 18세기 중반이후에 조성된 불화들 은 바탕과 광배등에 녹색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거기에 감홍색이 배합되어 강렬한 색 대비를 보여준다.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녹색과 홍색이 주조색을 이루면서 황토색, 검정색, 금니, 하늘색, 흰색등을 효과적으로 설채하는 것이 이 시대의 설채법의 특색이 아닌가 생각된다.  금니(金泥)의 경우 조선후기에 오면 보관,옷깃, 홀(笏), 법의 의 일부등을 제외하고는 금니의 사용이 극도로 제한된 것도 특색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불화의 시주계층이 왕족, 귀족이 주류를 이루던 고려조, 조선전기와는 달리 일반민중으로 확산 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좋은예이다.    1800년 이후가 되면 얼굴은 넓적해지고 눈과 코 입은 더욱작아져 더 이상 원만한 상호를 기대할 수 없게 된다.19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구도이다.  본존을 중심으로 전보다 많은 권속들을 표현하므로써 화면은 더욱 복잡해지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

1880년대를 전후하여 경기도 일대에서 제작된 불화에서는 권속들의 얼굴이 마치 초상화를 그리듯 음영을 표현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눈주위라든가  코 부분, 뺨부분에는 그 부위를 짙게칠하여 움푹들어간 느낌을 주며 얼굴 골격이 유난히 강조되어있다. 이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서양화법이 전래, 수용되면서 일반회화에서도 음영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과도 관련이 있다.  이러한 일반적인 경향속에서도 18세기의 원만하고 볼품있는 인물표현을 계승한 일련의 불화들이 전라도 지역에서는 제작되었다.  그것은 19세기 중엽경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일부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화승들에 의해 시도되었는데  19세기의 작품이 대부분 다소 세장(가늘고 김)하고 현실적으로 얼굴을 표현하였던 것에 비하여18세기의 원만하고 양감있는 인물표현을 그대로 이어받아 우수한 양식을 창출해 내었다.

 19세기말에는 호분을 섞은 청색을 많이 사용하여 화면 자체가 탁해지면서 한편으로는 격조없이 타락해 버린 느낌을 준다.  19세기 이후가 되면 채색이 짙어지고 선은 윤곽선으로서 최소한의 기능만을 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현상은 초본(草本)에 의해 도상을 그대로 베껴 그리는 불화의 작업과도 무관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현재 고려불화는 남아있는 작품수가 많지 않고,대부분 일본에 보존되어있고 , 전국의 사찰에 소장된 조선조 불화는 거의 수천점에 이르는데, 조선전기 불화는 대부분 일본에 전하고 있지만 조선후기불화는 아직까지도 사찰에서 조석으로 예배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선시대 불화는 양식적으로는 고려시대의 불화에 비하여 질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숭유억불하에서도 일반백성들이 주체가 되어 제작하고 신앙대상으로 삼아왔다는 점에서 또 엄청난 양으로 볼 때도 우리나라의 회화를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 까 생각된다. 
 
 
 불교회화의 발달과 화승들의 역할
 
불교회화의 경우 대부분은 화승들이 그렸다고생각되지만 일부 작품들은 화원이 직접 그린 것도 있다. 고려시대에도 중요한 왕실 사대부들이 발원하는 그림들은 대개 화원들이 그렸다. 그리고 이들 화원들의 작품을 어느정도 모델로해서 다른 화가들이 작품활동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따라서 조선초기 세조때까지는 화원들이 중요한 작품을 제작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왕조실록에도 기록되었다시피 각림사(覺林寺)불화를 그리는데 화원 이원해등이 참가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본격적으로 화승들이 불화를 제작하는 것은 임란이후로 모든 사찰들이 새로 중창, 중수(낡은 건물을 새롭게고침)되는 과정에서 불교미술의 수요가 매우 많아짐에 따라 수많은 화승들이 동원되어 일거에 불화를 그려야만 하는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이럴 때 가장 손쉬운 방법은 분담하는 것으로 하나의 조제소를 설치해놓고 그림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는데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 , 채색하는 사람,등 분업화되어 하나의 공장적인 형태를 이루게 된다.

이것이 조선후기 불화제작의 가장 중요한  한 단면이라고 생각되며,( 전반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고려불화보다 조선불화가 , 정교성과 아름다운 예술성이 뒤지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중의 하나라고도 본다)  이때부터 화승들이 적극적으로 불화제작을 전담했다고 생각한다. 이와함께 이시대에 화승들의 계보가 어느정도 확립되지 않았을까 생각되며, 화승들의 계보가 파악되면 이 시대회화의 흐름을 상당히 알수 있을 것으로 보여진다.   도화서 화원이 불화제작에 참여한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의 여러곳에서 알 수 있다. 태종대에 화원 이원등 15인을 파견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고 채색을 내렸다는 것을 비롯하여 억불정책이 심했던 태조5년에는 왕이 명하여 불화를 그려 신궁에 안치했고 세종22년에는 석가상을 그리고 중종때에는 팔상도를 그렸다는 등 불화제작에 관한 기록이 많이 있다

또 일본의사신들에게 관음도등 불화를 기진했다고 하는 기록도 보이는데, 이와 같은 일련의 궁중 중심의 불화제작에는 분명히 도화서 화원들이 도원되었다고 생각된다. 그 한예로 들수 있는 것이 1474년에 제작된 禮念彌陀供養懺法의 變相이다  이것은 성종 5년 선왕선조들의 명복을 빌기위하여 왕이 명령하여 제작한 궁중발원의 경전인데, 당대의 학자 김수온이 쓴 발문에 의하면 이경전의 제작에 화원 백종린, 이장손 등이 화원으로서 참여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 물론 이 경전은 판본이기 때문에 이장손등 화원은 판각하기 이전의 밑그림을 그린 것이다.   이외에도 1565년에 문정왕후가 아들인 명종의 병세회복과 세자탄생들을 기원하며 발원제작하였다고 하는 석가, 아미타, 약사, 미륵불화 400탱제작에도 당시의 가장 뛰어난 도화서 화원이 모두 참여하였다. 또 1550년 李自實이 그린 관음삼십이응신도라든가 지은원 소장의 오백나한도같은 그림을 보면 배경이 되는 산수그림이 당시의 산수화풍과 이주 흡사해서 이 역시 도화서 화원이 그린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다시말해서 왕실에서 중심이 되어 제작된 불화의 경우 도화서 화원들이 불화제작에 깊이 관여하고 있고 이에 따라 작품의 그린작가에 따라 불화의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고 말할 수 있다.

 고려시대의 불화는 주로 왕실의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알려진다. 그림의 내용이 완전히 수준높은 화원이었던 것으로 당시에는 화원이 회화의 양식을 주도해 나가는 주체였다고 보여지며 이러한 경향이 대체로 조선초기까지 연결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승려들의 신분이 천민으로 변했기 때문에 기술직이 승려들로 대체되게 되었다. 조선초기까지는 승려들이 노역등 기술직을 맡지 않은 것은 분명한데, 조선후기에 오면 승려들이 종이도 뜨고 베도 짜는등 모든 노역에 종사하게 되며 따라서 불화도 이러한 화승들의 집단에 의해 대량으로 제작되었다고 보여진다. 
 
 
 불화의 재료

불화의재료는 그림이 그려지는 천과 종이 물감과 화구를 가리킨다.바탕은 종이와(粉唐紙,毛面紙)베(비단,삼배)나무,돌,흙,등 여러 가지를 들수있다.탱화의 경우는 비단과 종이에 그려지며 벽화일 경우는 흙이나,나무,돌등을 들수있다.물감(顔料)은 진채(眞彩) 또는 암채(岩彩)로 불리우며 대부분 광물질로된 고채를 곱게 정재하여 분말을 아교에 섞어 사용하기 편리하게 액채물감을 만들어 사용한다. 요즈음엔 안료상회에서 판매하는 화공품으로 정재된 안료를 대부분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