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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성리움-개태사 `금동대탑` 소유권 놓고 법정 다툼

migiroo 2010. 4. 16. 12:47

삼성리움-개태사 '금동대탑' 소유권 놓고 법정 다툼

 

삼성리움미술관에 전시 중…이병철 전 회장 소유 경로 의문

 

 

상륜부

 

기단부

 

탑신부

 

 

 

 


 

삼성리움미술관과 불교계가 국보 문화재의 소유권을 놓고 법정 소송을 진행 중이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6일 서울서부지법에 따르면 충남 논산시 소재 조계종 산하인 천호 개태사는 지난해 6월 삼성문화재단을 상대로 국보 213호인 금동대탑의 소유권을 놓고 소유권 이전 청구소송을 냈다. 변론일은 오는 26일 오후 2시로 예정됐다.

금동대탑은 155cm 크기의 탑 형태 공예품으로, 예전 사리구가 있던 장소에 같이 보관되던 불교 예술품이다. 현재 이 탑은 삼성리움미술관 1층에 전시돼 있다.

이번 소송이 진행된 이유는 개태사 측이 이 문화재의 원주인임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개태사 측은 금동대탑이 고려시대(10~11세기) 전기에 만들어졌으며 본 소유자는 개태사라는 입장이다. 리움미술관 역시 소장품 전집에서 탑의 출처를 놓고 "옛 개태사 터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한다"는 설명을 했다. 이는 리움미술관 홈페이지에서도 확인 가능하다.

삼성 측에 따르면 이 탑은 지난 1987년 고 이병철 전 회장에게서 삼성문화재단이 기증받았다. 이 전 회장의 사유물이었던만큼 이를 돌려줄 의무가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소송의 핵심은 이 탑이 과연 실제로 현 개태사의 과거 소유물이었는지, 그리고 이 전 회장이 어떤 경로를 거쳐 이 탑을 취득하게 되었는가를 밝히는데 있다.

개태사 측은 "1980년대 발굴조사가 진행될 때 탑이 도난당했고, 이를 이 전 회장이 장물취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입장이다. 법조계에 따르면 만약 실제로 이 전 회장이 이와 같은 경로로 탑을 취득했다손 치더라도 이 전 회장이 취득 당시 이 탑이 장물이었음을 몰랐다면 선의취득이 인정돼 개인 소유물로 판결이 날 수도 있다.

금동대탑은 2006년 국정감사에서 이미 이슈가 됐다. 이에 개태사 측은 당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국회기록보존소에 2006년 국감자료를 사실조회 신청한 상태다. 그러나 아직 국회기록보존소가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개태사 측 변호인인 이승주 변호사는 "기록보존소의 답변이 늦어져 법원에서도 독촉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프레시안>도 이에 대해 관련 조사가 어느 정도로 진행됐는가를 문의했으나 국회기록보존소는 "사실을 고지할 의무가 없다"고만 답했다.

금동대탑을 국보로 지정한 문화재청은 유보적 입장이다.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관계자는 "국보지정이 25년 전인데, 당시 관련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어디서 이 문화재를 발견했는지, 누가 신청한 것인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며 "추가조사도 실시했으나 과거의 일이라 원 소유자를 확인하기는 어렵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워낙 과거의 일이라 현재 자료만으로는 이 탑이 도굴품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다"며 "장물인지 아닌지 여부도 알기 어려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미술평론가였던 고 이구열 선생이 쓴 <한국문화재비화>는 에피소드 '현풍도굴사건'에서 금동대탑과 함께 삼성문화재단이 소유하고 있는 가야금관 및 부속 금구(국보 138호)의 취득경위를 설명해두고 있다.

이 책은 "1963년 대구 경찰에 의해 검거된 도굴범 일당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금관이 고령지방에서 도굴 후 서울의 골동품상을 전전하다 이병철 콜렉션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전해지며, 도굴범은 유죄판결을 받았으나 소장자는 선의취득으로 판결돼 소유가 인정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 근거로 문화재청은 "금동대탑과 가야금관은 50~60년대의 혼란기에 불법적으로 도굴된 것이 개인 간 거래 혹은 매매업자를 통해 삼성 측이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 현실적으로 소장경위를 추적하기는 어렵다"고 개태사 측에 보낸 회신 자료에서 설명했다.

문화재 지정은 소유자 혹은 발견자의 신청 후 검증을 통해 이뤄지기도 하지만, 문화재청장 직권으로 이뤄지는 경우도 많다. 과거 기록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이 탑의 소유자를 가려내기가 어려워진 셈이다. 한편 이번 소송에 대해 리움미술관 측은 "재판 중인 상황이라 입장을 표명하는 게 적절하지 않다"고 답변했다.

정말 장물이 아닐까

삼성문화재단이 보유한 문화재의 소유권 논란이 벌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05년 국정감사에서도 비슷한 일을 두고 논란이 일었다.

유홍준 당시 문화재청장은 국감에서 조계종 소속 현등사와 삼성문화재단이 소송 중이던 '현등사 사리구'와 관련 "삼성문화재단이 장물로 취급받으면 역사적 기록을 지워버리면 그만"이라는 말을 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당시 현등사도 이 문화재를 두고 "삼성문화재단이 장물로 취득한 것이니 돌려달라"는 입장이었다.

이듬해 재판부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현등사와 지금의 현등사가 같다고 볼 수 없다"며 리움미술관의 손을 들어주었지만 리움미술관은 이후 사리와 사리구를 현등사에 반환했다.

삼성문화재단의 소장품은 1만5000점이 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보유물의 가치로만 따져도 국립중앙박술관을 넘어서는 규모라는 찬사까지 나올 정도다. 대부분이 이병철 전 회장대부터 모아온 것들이다. 국내 주요 언론들은 최근 이 전 회장의 출생 100년을 기념하는 특집기사에서 이를 두고 "고인의 나라사랑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로 뽑기도 했다.

삼성문화재단의 장물 취득 경위에 빠지지 않는 이가 이 전 회장의 형 이병각 씨다. 이 씨는 지난 1966년 불국사 석가탑과 황룡사 초석, 통도사 부도 등을 파헤친 도굴범이 검거됐을 때 문화재보호법 위반 혐의로 금고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바 있다. 이 씨는 이 사건에서 장물의 최종 취득자로 지목돼 개인소장품 226점을 압수당했다.

리움미술관이 보유한 문화재 중 하나인 금은 아미타여래좌상도 이 씨가 소유했던 문화재다. 이 문화재도 당시 압수됐으나 가짜로 판명나 이 씨가 다시 소유하게 됐다. 불교계에서는 "가짜라면 삼성이 보유할 필요가 없으니 반환하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대희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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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의 왕국' 삼성문화재단



 

삼성문화재단은 1만5천점이 넘는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이 지난 2002년 발간한 '불교문화재 지정현황 목록'에 따르면 삼성이 보유하고 있는 불교 문화재는 14점에 달한다.

삼성리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국보는 모두 35점이며 이들 국보 중 이건희 회장이 23점을 소유하고 있고, 삼성문화재단이 12점을 소유하고 있다.

국보급 문화재가 삼성으로 이동하게 된 경위는 도굴에 의한 장물매매로 추정되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다. 이번에 문제가 된 '금동대탑'의 경우 처럼 도굴로 의심되지만 삼성은 작고한 이병철 회장을 거론하며 '고인이 기증한 것으로 문제될 것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진설명-도굴범의 조직도. 맨 밑 장물의 최종 취득자는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씨로 보도됐다. 이병각씨는 '중과실 장물취득'과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금고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민중의소리]

삼성의 문화재 수집과 관련해 이병철 회장의 형 이병각씨가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병각씨는 1966년 불국사의 석가탑을 비롯해 황룡사 초석, 남산사 사적, 통도사 부도

등을 파헤친 도굴범이 검거됐을 때 '중과실 장물취득'과 문화재보호법 위반으로 금고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당시 경찰은 이병각씨를 장물의 최종취득자로 지목하고 수사를 벌여 개인소장품 2백26점을 압수했다.

이에 앞서 1963년 이른바 '현풍도굴사건' 당시 대다수의 문화재가 국고로 환수됐으나 대가야 금관으로 추정되는 '관(冠)'등 일부 유물이 경로가 철저하게 가려진 채 어디론가 빠져나갔고 7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호암컬렉션 특별 전시에 '깜짝' 등장했다.

이 가야금관은 이날 곧바로 국보 138호로 지정됐다. 가야금관은 이병각씨가 도굴꾼에게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최종 구매자는 이병철 회장이었다.

 

 



********************************************************<현석훈 기자 radio@vop.co.kr>

 

 

 

금동탑이나 청동탑은 절의 중심적인 존재라기보다 건물 안에 모셔두기 위해 만든 것이므로, 일반적인 탑이라기보다 하나의 공예품, 혹은 공예탑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금동탑은 대개 높이가 20∼30㎝ 정도이고, 50㎝가 넘는 것이 극히 드문데, 이 탑은 현재 높이만도 155㎝로 제법 큰 규모이다. 더구나 현재 남아있는 탑신은 5층이지만 원래는 7층 정도였을 것으로 보이고, 머리장식의 일부가 사라진 것으로 보아 원래 높이는 지금보다도 더 높았을 듯하다.

2층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세우고 꼭대기에 머리장식을 꾸민 탑으로, 석탑의 일반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기단에는 네 모서리와 각 면에 목조건축에서 볼 수 있는 기둥모양을 가지런히 새겨두었다. 아래층 기단의 각 면에는 둥근 테를 두른 연꽃잎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석탑양식의 특징을 뚜렷이 보여주는 부분이다.

기단 위에 난간을 두르고 탑신을 세웠으며, 1층 탑신에 출입문과 기둥을 두고 그 위에 지붕을 얹는 등 목조건축의 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2∼5층의 탑신에는 모두 불상을 새겼는데 수법이 그리 뛰어나지는 못하다. 지붕의 모서리마다 방울을 달았던 듯하지만, 현재는 몇 군데에만 매달려 있는 상태이다.

표면의 금칠은 거의 벗겨져 남아있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보존이 잘 된 작품으로, 넓게 짜여진 기단에 비해 탑신은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하다. 각 부분에 꾸밈이 많은 점이나, 탑에 매달린 장식들이 많은 점 등에서 공예탑의 성격이 분명히 드러나면서도 석탑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특이한 형태의 탑이 많이 만들어졌던 고려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측되며, 현재 호암미술관에 보관되어 있다.

기단부< 基壇部 > 위에 탑신부< 塔身部 >를 구성하고,

꼭대기에 상륜부< 相輪部 >를 장식한 일반형 탑파< 塔婆 > 형식을 갖추고 있다.

특히 신라< 新羅 >와 고려< 高麗 >시대의 전형적인 석탑 기단형식인 2층 기단인데다가

탑신부에서도 신부< 身部 >와 개부< 蓋部 >를 따로 만들어 포개 놓고 있어,

일반형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는 금동제< 金銅製 >의 탑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금속탑< 金屬塔 >은 대개 높이가 20~30㎝ 내외의 소탑< 小塔 >이고,

50㎝가 넘는 것은 극히 드문데,

이 탑은 현재의 상태만도 1.55m나 되어 작은 석탑과 같은 크기의 거작< 巨作 >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탑신은 5층이지만,

원래는 9층 정도의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추정이 가능하며,

하대< 下臺 >도 63*63㎝ 크기의 정4각형이다.

기단부에는 아래층에 양 우주< 隅柱 >와 탱주< 撑柱 > 2개가 모각< 模刻 >되고,

투각< 透刻 >된 안상< 眼象 > 안에 입장< 立狀 >의 원각< 圓刻 > 귀꽃문< 文 >이 있다.

위층 기단에는 양 우주와 탱주 하나 외에 사격자문< 斜格子文 >·사행선문< 斜行線文 >·

연주문< 連珠文 > 등이 만조< 滿彫 >되어 있다.

1층 탑신은 감실< 龕室 >을 마련하여 앞뒷면에 문비< 門扉 >를 설치하였으며,

앞뒤쪽에 계단을 두었다.

2층 이상의 탑신에는 각면< 各面 >에 여래좌상< 如來坐像 >을 몇 구< 軀 >씩 양각하고,

1주< 柱 >씩의 평주< 平柱 >를 두어 그 주두< 柱頭 >에 소로·첨차 등 두공< 頭工 >을 나타냄으로써

마치 높은 전각< 殿閣 >에 존상< 尊像 >들을 봉안< 奉安 >한 것 같은 형식이다.

옥개< 屋蓋 >는 각층< 各層 >이 같은 형식인데,

밑면에 받침 1단이 있고,

모서리의 사래는 길다. 처마끝에 서까래를 2단으로 배치한 겹처마를 나타내고,

낙수면< 落水面 >은 기왓골이 있으며,

합각< 合角 >의 추녀마루에는 보주< 寶珠 >·용두< 龍頭 > 등을 도각< 圖刻 >해 놓았다.

상륜부는 노반< 露盤 >·복발< 覆鉢 >·앙화< 仰花 >·보주< 寶珠 >가 있는데,

표면에는 각종 문양이 만조< 滿彫 >되어 있다. 도금< 鍍金 >과 각부< 各部 > 장식이 찬란하고,

목조건물이나 조각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는 매우 희귀한 유예< 有例 >이다

출처 : 토함산 솔이파리
글쓴이 : 솔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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