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흥사터 | ||||||
어느 맑은 못의 푸른 연꽃이 가련케도 산에 와 피었는가
계곡(谿谷) 장유가 장마가 깊어진 어느 날 지은 시의 앞부분이다. 굳이 한 글자부터 시작해 열 글자까지 운을 맞춰 지었다. 그러니 이것은 시를 읽기보다 꼼짝할 수 없는 장마철의 무료함을 견디는 선비의 모습을 읽어야 하는 시이다. 문명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의 장마철에는 대개 두문불출할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이규보는 장마에 가장 즐거운 일로 낮잠을 꼽았다. 그는 ‘비 오는 날 초당에서 낮잠을 자다(草堂雨中睡)’라는 시에서 “ … 드르렁, 드렁 우레처럼 코를 골았네. / 이 맛은 참으로 표현하기 어렵지 / 왕후인들 어떻게 이런 걸 누릴까보냐 … ”라고 한다. 이처럼 장마철에 옛사람들이 집안에만 있어야 했던 까닭은 길 때문이었다. 장마를 읊은 옛 시 속에서도 가장 곤혹스러운 것은 비로 인해 왕래가 끊겼음을 들고 있다. 그러나 요즈음이야 어디 그런가. 길이 떠내려가지만 않으면 못 갈 곳이 없으니 장대비 속을 달려 울주에 다다랐다. 잠자리를 정한 곳은 간월사터 근처였다. 지난번에 다녀오기는 했지만 동가홍상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어둑해지기도 했거니와 그칠 줄 모르고 퍼붓는 비 탓에 절터를 거니는 것은 수월치 않았다. 이른 새벽이 되어서야 잦아든 빗줄기, 절터를 휘 둘러보고 웅촌을 지나 운흥사터(雲興寺址)로 향했다. 언제 그랬냐 싶게 먹구름은 간데없고 푸른 하늘에 흰 구름마저 두둥실 떴다. 반계마을을 지나 운흥동천으로 들어서자 옅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밤새 불어난 물 탓이다. 길은 그 곁으로 나 있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날만한 길, 가다 말고 멈추어 물살을 바라봤다. 곧 휩쓸리고 말 것만 같다. 그러나 이때가 아니면 보기 힘든 광경이니 어찌 그것을 놓칠 것인가. 높고 거센 물결은 계곡을 온통 뒤집을 것처럼 쏜살같이 달려가다가 바위를 만나면 거침없이 맞부딪는다. 그 소리는 귀마저 멍하게 만들었으며 그때마다 일어나는 하얀 물보라는 눈 또한 멀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내 속에서도 물결처럼 흥분이 일어나 정신은 산란해지고 심장은 마구 뛰었다. 물소리에 묻히고 말 것이지만 그를 능가하는 고함을 지르고 싶은 충동을 참지 않았다. 물을 향해 미친 듯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 나에게 들리지도 않았으니 스트레스를 풀려던 것이 오히려 목의 통증만 낳고 말았다. 나에게 광풍이 한 차례 지나가고 고개를 들어 햇살이 비껴든 먼 산을 바라 봤다. 그는 고즈넉하게 구름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 또한 절터 못 미처 세진교(洗塵橋)를 건넜을까. 계곡 양쪽에 다리를 놓았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조금 떨어진 곳의 바위에 새겨진 명문에는 영조 27년인 1751년에 성안(性眼)스님이 놓은 것으로 되어 있으니 난감하다. 이만부 또한 “홍비통간도(虹飛通澗道)”라 했으니 홍예교를 건넌 것이리라. 그가 갔을 때는 겨울이었으니 무지개가 떴을 리 만무이고, 계곡물이 물보라를 일으켜 무지개를 만들었을 리도 없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가 글의 말미에 정미동(丁未冬)이라고 했으니 그가 죽기 전의 정미년은 1707년 밖에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영조 8년인 1735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잘못 된 기록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면 운흥사로 오르는 길에 또 다른 홍예교가 있었지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리라. 이윽고 세진교 터를 지나 부도골 들머리에 다다랐지만 그늘 진 계곡을 서성거리며 다리를 쉴 뿐 선뜻 그곳으로 오르지는 않았다. 이 좋은 것들을 그냥 놔두고 가면 내가 나를 용서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부처님 또한 나의 이런 행각을 웃음 머금은 눈짓으로 못 본 듯 모른 체 지나치지 않겠는가. 발을 담그고 앉자 송송 맺혀있던 땀방울들이 혼쭐나게 도망을 가는지 소름이 일시에 돋아났다. 채 5분이 넘지 않아 몸 안에 가득하던 습기와 열기는 간 데 없이 사라지고 정신은 맑아졌다. 계곡을 거슬러 금당자리로 올랐지만 몇 해 전 스쳐간 태풍인 루사의 생채기가 아직 아물지 않아 머물기조차 안쓰러웠다. 여느 절집과 달리 탑이나 부처님은 남아있지 않고 유난히 석조가 많은 운흥사터… 마치 실명제라도 한듯 석조마다 조성연대와 만든이의 이름이 낱낱이 적혀있어 다시 계곡으로 내려 와 세수를 하곤 부도골로 올랐다. 맑은 땀이 맺히고 숨 한번 고를 무렵에 다다른 곳, 아! 저것이 무엇인가. 산 깊은 이곳에 어찌 아름다운 꽃이 피었는가. 어느 맑은 못의 푸른 연꽃이었을까. 그가 가련케도 산에 와 핀 것이다. 보는 이야 더할 나위 없지만 그는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대지에 단단한 돌꽃으로 피었으니 어찌 눈길이 머물지 않겠는가. 어떤 것은 하늘을 바라보는 앙련(仰蓮)이며 다른 것은 땅을 보고 고개 숙인 복련(覆蓮)이었다. 그들이 물 한 방울 없을지라도 곱게 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떠 받쳤던 이름모를 스님 때문 이었으리라. 적멸에 든 스님이 편히 올라앉을 수 있도록 받침이 되었던 것이니 곧 부처님의 말씀을 머금고 피어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적멸에 들었던 스님의 부도는 간 곳 없고 다만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인 양, 그는 단 하루도 꽃잎을 접지 못한 채 순례객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담 아래 그늘진 곳에 자리를 깔았다. 쏘다녀봤자 흐르는 것은 땀이요 산만해지는 것은 정신이니 아예 개망초 하얀 꽃마저 흐드러진 이곳에 머물기로 한 것이다. 물끄러미 돌 연꽃을 바라보는데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지나갔다. 근처를 에워싸고 있는 대밭의 키 큰 것들은 고개 숙이게 만들고 낮은 것들은 도리어 일으키며 불어대던 바람은 묵은 잎을 떨어트렸다. 우수수, 마른 댓잎이 떨어지는 소리가 마치 어젯밤 듣던 빗소리와도 같았다. 대나무들은 바람이 부는 대로 흩날리는 빗줄기와 같이 마냥 흔들릴 뿐 그와 맞부딪히지 않았다. 운흥동천의 거센 물살이 바위에 맞부딪혀 산산조각 난 포말이 되던 것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 스스로가 단단한 금강석인 줄 알았으며 또 그렇게 행동 했다. 그 탓에 남은 것은 나와 남, 모두에게 상처뿐이지 않은가. 부드러운 것이 강하다는 것. 요즈음에야 깨닫는 또 하나의 무지였다. 연꽃이 핀 대좌 곁으로 석조가 놓여있었다. 이곳 운흥사터에는 여느 절집들과는 달리 유난하게도 석조가 많다. 그것도 석조마다 명문이 빠진 것이 없으니 이곳에 있는 것은 영조 8년인 1732년 3월에 만든 것이다. 지금 절터에 남아 있는 것들은 마치 실명제라도 한 듯 조성연대와 만든 이의 이름이 낱낱이 적혀 있다. 그것은 앞 서 이야기한 다리도 마찬가지였으니 참 묘한 일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이곳에서 새긴 장경판에도 그것을 새긴 이가 표시되어 있으니 말이다. 이곳에 석조가 많고 이 깊은 산골의 절집에 장경판이 있었다는 것은 에둘러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것을 찍는데 종이가 필요했을 터이고 석조는 그에 따른 용도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볼 일이다. 지금도 닥을 잘게 부쉈던 ‘딱돌’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분명한 일이지 싶다. 이곳에는 절집이나 그 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탑이나 부처님이 남아 있지 않다. 그것은 한 눈에 드러나는 불사보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진정한 불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나무랄 것 없는 것이긴 하지만 운흥사를 지켰던 스님들은 후자를 택한 것이다. 그것은 부드러움이다. 지금 내 눈앞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개망초나 대나무와 같이 바람을 거스르지 않는 강함 말이다. 지금 시대에 부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무엇에 더욱 애를 써야 할 것인지를 이미 수백 년 전에 보여 준 곳, 운흥사는 그런 곳이다. 논설위원.전 ‘디새집’ 편집장 울산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 창건… 목판 새기고 종이 만든 기술도 운흥사터는 울산광역시 울주구 웅촌면 고연리 반계마을 뒤편에 있다. 울주의 간월사터에서 통도사 방면으로 조금 가다보면 웅천. 삼동 방면의 이정표가 나오는데 이곳으로 좌회전하여 20분 남짓이면 웅촌에 닿는다. 웅촌에서는 춘해대학을 찾으면 된다. 그 정문 앞을 지나 시적사 팻말이 나오면 그것을 놓치지 말고 끝까지 따라가면 운흥동천(雲興洞天)이다. 울산 시내에서는 부산으로 향하는 7번 국도를 따라 가다가 웅촌에서 같은 방법으로 가면 된다. 절터로 가기 위해서 오르는 계곡인 운흥동천은 해인사의 홍류동천(紅流洞天)과 함께 경남지방에서는 손꼽히는 풍치를 자랑한다. 홍류동천은 발조차 담그지 못하지만 이곳 운흥동천은 마음껏 물놀이를 즐길 수 있는 한적한 곳이기도 하다. 계곡을 따라 이어진 길의 끝닿은 곳이 운흥사 옛터이며 자동차는 그곳에 세워야 한다. 앞에 흐르는 계류를 따라 올라가면 금당자리이며, 계류를 건너 산길로 5분 남짓이면 부도골에 닿을 수 있다. 운흥사터는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을 해 2003년에 보고서를 냈다. 그에 따르면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절을 창건하였으며 그에 따른 암자가 13곳, 스님이 100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고려 말에 지공(指空)선사가 중창했으나 임진왜란에 불탔다. 다시 광해군 6년인 1614년에 대휘(大希)선사가 중창하였으며 1864년에 간행된 〈대동지지〉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그러나 무슨 연유로 사라졌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른 절터와는 달리 수습된 유구들에게서 석탑이나 석불 그리고 철불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특이하다. 물론 작은 불상편들은 발견 되었지만 여느 다른 절집에 모신 정도의 불상이 발견되지 않은 것이다. 다만 다른 곳보다 물을 담을 수 있는 석조가 많아 넷이나 된다. 또 한지를 만들 때 닥을 잘게 부술 때 사용하던 ‘딱돌’ 그리고 16종에 달하는 목판이 673장이나 남아 있으며 절 앞으로는 닥을 불릴 수 있는 맑은 계류가 흘렀다. 이것은 매우 주목해야 할 일이다. 산골의 사찰에서 목판을 새기고 또 그것을 찍을 수 있는 종이를 직접 만들었다는 것은 이 절의 성격을 가늠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불법을 널리 알릴 수 있었으니 폐문하고 선정에 들어 불법을 닦는 절집과는 달리 봐야 할 것이다. 목판은 지금 통도사에 보관되어 있으며 절터에는 부도와 석조 그리고 딱돌이나 석등과 같은 석물들이 흩어져 있다. 시적사에도 이곳에서 나온 부도 2기가 있다. 비록 눈에 보이는 것은 화려한 것이 없을 지언 정,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조차 보려고 애쓰는 것이 절터 답사의 백미라면 운흥사는 더할 나위 없이 알맞은 곳이다. [불교신문 2148호/ 7월23일자] |
출처 : 불교문화사랑
글쓴이 : 진각화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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