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낭산 사천왕사지 귀부....
1. 이 사진은 지난 주 경주 갔다 오면서 찍은 사천왕사지 귀부 입니다. 나는 수 없이 사천왕사지 옆을 차 몰고 지나 다닙니다. 그러나 그 옆을 지날 때마다 가슴을 칩니다. 천년 세월 목이 잘린체 처연히 앉아 있는 귀부 때문입니다. 이 거북 앞으로 하루에도 수백, 수천 대의 자동차들이 시커먼 매연을 내 뿜으며 지나 다니고 있습니다. 뒤로는 철길이 있어 요란한 굉음을 내며 열차가 지나가고 있습니다.
2. 불교세계 사천왕(四天王)이 거주하는 사왕천(四王天)은 사바세계 수미산(須彌山) 도리천(?利天)에 있습니다. 선덕여왕이 경주 낭산을 수미산이라 하고 자신의 능(陵)을 낭산에 뒀습니다. 신문왕은 계속되는 당(唐)의 위협에 맞서 서기 679년 그 수미산 도리천 경주 낭산에 명랑법사와 의상대사의 발원 속에 사천왕사를 세우고 당의 위협에 대비한 호국 사찰로 삼았습니다. 드디어 당은 신라를 침공키 위해 50만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려 배를 띄웠습니다. 그러나 모진 풍랑을 만나 50만 대군은 모조리 서해 바다에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호국의 의지가 담긴 사천왕사의 원력 때문 이였습니다. 이렇게 사천왕사는 신라 천년사직을 지켰습니다.
3 일제(日帝)는 호국(護國)사상이 깃들었던 사천왕사의 지맥(地脈)을 끊어 놓기 위하여 절의 금당지(金堂址)와 강당지(講堂址) 사이에 철길을 놓았습니다. 바로 오늘 날의 동해남부선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우리 스스로가 절의 일주문 터를 까부수고 4차선 도로를 냈습니다. 바로 경주를 지나는 7번국도 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절 뒤편 하강선 마을 사람들은 사천왕사지를 갈라 콘크리트 마을길을 냈습니다. 이렇게 절은 철길과 자동차 길과 사람 길로 산산이 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절터에는 겨우 주춧돌 몇 개와 당간지주(幢竿支柱), 그리고 귀부 두개가 남아 절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육중한 열차 소리와 매캐한 자동차 매연과 흙먼지를 밤 낯없이 뒤집어쓰고 말입니다.
4 그 사천왕사의 귀부가 비록 인간들에 의해 처연히 목이 잘려 나갔지만 천년 미동도 없이 오늘도 그 자리에 앉아서 호국의 정신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다만 현세에 사는 우리들만이 그런 민족의 호국정신을 모르고 지낼 뿐입니다. 귀부의 머리는 없어 보이지 않지만 지금 우리를 향하여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나는 자동차를 타고 그 사천왕사 터 귀부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지는 아픔을 겪습니다. 그리고 너무나 황망한 민망스러움과 죄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지금 사천왕사지는 야단 법석 중입니다. 작년부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대대적인 발굴조사를 하고 있기때문입니다. 전반적인 발굴 결과는 아직 정리가 않됐지만 상당한 유물들이 출토 되었고 절터의 규모가 얼마나 크고 정교한지 그 흔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철길과 국도에서는 여전히 매쾌한 매연과 굉음이 끓일사이가 없습니다. 지금 사천왕사지에는 선덕여왕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 개망초만 가득 피어있습니다. ----------------------------------------------------------------------------------- ■사천왕사지 참고 자료 ○사천왕사지-사적 제8호. 낭산(狼山) 남동쪽 기슭에 있는, 신라의 절터로 신문왕릉 옆 ·선덕여왕릉 아래에 있다. 사천왕사와 밀접한 망덕사지(望德寺址)가 남서쪽 약 300m 지점에 있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중국 당나라는 신라가 그들의 도독부(계림도독부)를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을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 하였다. 이에 문무왕이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계책을 구하자, 이곳 신유림에 사천 왕사를 짓고는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당의 침략으로 절을 완성 시킬 시간이 없게 되자,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명승 12인과 더불어 밀교의 비법인 문두루비법을 썼다. 그러자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 그후 5년 만에 절을 완성(679)하고 사천왕사라 하였다. 이곳은 원래 신유림이라 하여 신라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던 곳이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죽으면서 도리천에 묻어줄 것을 유언했는데, 그곳이 낭산 남쪽이라 하였다. 여왕이 죽은 지 30년만에 왕릉아래 사천왕사를 짓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여왕의 예언이 맞았음을 알게 되었다. 불교에서는 수미산을 세상의 중심으로 보고 그 중턱은 사천왕이 지키며 꼭대기에는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이 있어 불국토가 시작되는 곳이라 믿었다. 이 설화를 통해 낭산을 수미산으로 생각했던 신라인들의 불국토사상을 엿볼 수 있다. 절터에는 머리부분이 없어진 귀부 2기와 비신, 그리고 당간지주 1기가 남아있다. 특히, 절 동쪽에 남아있는 귀부는 사실적인 표현수법과 등에 새겨진 아름다운 조각으로 신라 시대의 뛰어난 작품임을 보여주고 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가장 먼저 지은 사천왕사는 전형적인 쌍탑식 가람 배치로 신라 호국불교의 성격과 신라인들의 불교관·우주관을 잘 보여주는 절이다. 경덕왕 때 향가인 ‘도솔가’, ‘제망매가’를 지은 고승 월명이 머물렀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삼국유사》 문호왕법민조(文虎王法敏條)에 기록된 사천왕사 건립설화를 보면, 삼국통일 직후인 679년(문무왕19)에 창건되었으며, 경주 망덕사(望德寺)보다 5년 앞서 건립되었다고 한다. 675년(문무왕 15) 당(唐)나라는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50만 대군으로 신라에 침공 해 왔는데, 이를 막기 위하여 이곳에 채백(彩帛)으로 가사(假寺)를 만들고 초목(草木)으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 명랑법사(明郞法師)가 12명의 명나라 승려와 함께 문두루비 법(文豆婁秘法)을 쓰자, 교전도 하기 전에 풍랑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물에 가라앉았으므로, 이곳에 사천왕사를 짓고 국가의 진호(鎭護)를 위한 국찰(國刹)로 삼았다고 한다. >글:未知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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