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176호.청화백자에 새겨진 독야청청 송죽의 기상~

migiroo 2013. 9. 23. 23:53

 >2013.9.20
 
■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 시리즈(42)

 

청화백자에 새겨진 독야청청 송죽의 기상~
-국보176호. 청화백자 홍치명송죽문호

 

 


순백자와 청화백자를 나란히 놓고 불 때 순전한 아마추어인 나의 솔직한
감성은 아무 것도 없는 순수한 순백의 백자 쪽이 좀 더 좋다.
백자는 조상들의 숨결이 짙게 숨어있는 순수함과 청빈함 그리고 다소 서민적
감성이 느껴지는 반면, 청화백자는 어딘지 중국적 냄새가 풍기면서 도자기
보다는 백자에 새겨진 문양에 시선이 우선 되는 것 같아 백자보다는 감성의
제한성을 갖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자가 텅 빔의 청빈한 여유와 상상적 감성을 일으키게 한다면
화려한 그림이 화면 가득히 그려진 청화백자에서는 마음의 충만함과
문양에서 받는 작품의 인상이 강렬한 감정을 일으키게 한다.

 


▶국보 제176호.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

                    (靑華白磁弘治銘松竹文壺)


청화백자 중 국보 제176호.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를 앞에 두고 서 있다.
도자기 전체 가득히 독야청청 늙은 소나무와 굳센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솔바람 소리와 댓바람 소리가 금방이라도 들려 올 듯 그림이 사실적이다.
주둥이 가장자리에는 연꽃 덩굴무늬가 그려져 있고, 안 쪽 측면에는
명문(銘文) '홍치이년(弘治二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백자청화 ‘홍치2년’명송죽문항아리(白磁靑畵‘弘治二年’銘松竹文立壺)라고도 부른다.


이 항아리는 오랫동안 전남구례군 화엄사(華嚴寺)에서 가지고 있었는데 어찌하다
못된 도독 놈들에게 두 번이나 도난당했지만 우연곡절 끝에 지금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옮겨져 있다.
그리고 도난 때 주둥이 부분이 깨어지고 말았는데 명문 중 '홍치(弘治)' 2자만
남았던 것을 수리 복원하면서 '이년(二年)'을 다시 첨가한 기막힌 사연도 전한다. 
 

 

                       ▲국보 제176호.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전면) 높이 48.7㎝, 입지름 13.1㎝, 밑지름 17.8㎝


그러니깐 새겨진 명문상으로 볼 때 이 항아리는 조선 성종 20년(1489)에 
만들었다는 조성시기를 확실히 알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항아리의 용도는 조선시대 궁중의 여러 의식에서 꽃을 꽂아둔 항아리로
사용된 것이라고 전한다.  
 

 

                                              ▲국보 제176호.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후면)

 

 

■조선시대 ‘호랑이 항아리’ 크리스티 경매서 10억원에 낙찰

 


엊그제 모 일간지에 조선시대 ‘청화백자호랑이항아리’ 하나가
크리스티 경매에서 무려 10억원에 낙찰 됐다고 톱뉴스로 전했다.


세계적인 미술품 경매회사인 크리스티는 19일(2013.9.19)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지난 18일 뉴욕에서 열린 한국과 일본 작품 경매에서 조선 청화백자 호랑이
항아리가 예상가보다 훨씬 높은 93만9750 달러(10억1821만원 상당)에 팔렸다고 밝혔다.
이 청화백자 항아리의 예상 낙찰 가격은 4만∼6만 달러였다고 했다.
이 청화백자에는 소나무 아래 있는 호랑이 암수 한 쌍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 청화백자가 언제 어떻게 해서 국제 경매장까지 흘러들어 가게 됐지
아무런 정보가 없으니 더욱 궁금하다. 그리고 누가 그 엄청난 가격을 주고
경매에서 낙찰 받았는지 그 인물 또한 청화백자 뭇지 않게 궁금하고 존경스럽다.
아무튼 간곡히 바라 건데 이 청화백자를 낙찰 받은 사람이 꼭 한국 사람이기를
바랄 뿐이다.


과연 고려청자나 조선백자의 진가는 국제적으로 알아주는 모양이니
한국 민의 한 사람으로서 자긍심이 뿌듯하다.

 

 

■청화백자 모음


 ▶백자청화송죽인물문호

 

                                        ▲보물644호. 백자청화송죽인물문 항아리/이화여대 소장


 

▶청화백자운룡문호

 

 

 

 

 


 ■국보급 백자와 청화백자 목록


국보 제310호 백자대호(白磁大壺) (1111)
국보 제294호 청화백자철사진사국화문병(靑華白磁鐵砂辰砂菊花文甁) (1630)
국보 제309호 백자대호(白磁大壺) (1669)
국보 제286호 백자발(白磁鉢) (2278)
국보 제261호 백자호(白磁壺) (1418)


국보 제258호 청화백자죽문각병(靑華白磁竹文角甁) (1966)
국보 제219호 청화백자매죽문호(靑華白磁梅竹文壺) (2331)
국보 제175호 백자상감연당초문대접(白磁象嵌蓮唐草文大楪) (1247)
국보 제170호 청화백자매조죽문호(靑華白磁梅鳥竹文壺) (937)
국보 제168호 백자진사매국문병(白磁辰砂梅菊文甁) (858)


국보 제166호 백자철화매죽문대호(白磁鐵畵梅竹文大壺) (1775)
국보 제93호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2780)
국보 제107호 백자철화포도문호(白磁鐵畵葡萄文壺) (2585)
국보 제281호 백자주자(白磁注子) (1700)
국보 제222호 청화백자매죽문호(菁華百磁梅竹文壺) (2009)


국보 제263호 청화백자산수화조문대호(靑華白磁山水花鳥文大壺) (1738)
국보 제262호 백자대호(白磁大壺) (1310)
국보 제176호 청화백자<홍치명>송죽문호(靑華白磁<弘治銘>松竹文壺) (4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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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화백자에 대하여 알아 두기~

 

청화백자는:백토로 기형(器型)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 10)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이때부터 분원관요시대에 들어가 백자는 대량생산되고, 분청사기는 쇠퇴하게 되었다. 광주 일대에는 수많은 관요(官窯)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

 

대체로, 15·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과 사용하는 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球形)에 가까워져 양감(量感)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무늬와 같은 15·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소상팔경(蕭湘八景)·십장생(十長生)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釉調)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의 안료는 서양에서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을 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항아리·접시·사발·떡살 등의 생활용품과, 병·주전자·잔 등의 주기(酒器), 필통·연적·필세(筆洗)·필가(筆架) 등의 문방구, 묘지(墓誌)·인형 등의 명기(明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 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동물·산수(山水)·십장생·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