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81호,82호. 신의 손으로 조각한 감산사지 석조불상, 그 찬란한 석조미술

migiroo 2013. 10. 6. 21:54

>2013.9.28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 시리지(43) 

 

감산사지의 초가을 정경~

 

 

 

 


● 감산사를 찾아서~

 

 

 


초가을 시월 어느 날 늦은 오후~
경주 외동읍 괘능리에 있는 감산사지(甘山寺址)를 찾는다.
오래 전에 다녀왔던 기억을 되살려 신라 원성왕릉 괘능을 지나 외길로 들어서니
감산사로 가는 낡은 이정표 하나가 좁은 길목에 쓰러질듯 외롭게 서 있다.
그러나 그 이정표를 따라 가다간 감산사 가는 길은 나오지 않는다.
옛 길에 있었던 이정표를 없애지 않고 그냥 방치 한 것이기 때문이다.
.......

다시 잘못 든 길을 돌아 나와 새로 난 길을 겨우 찾아 들어가니
감산사 가는 길은 버스도 다닐 정도로 큰 길로 변해 있었다.


감산사지, 수십 년 전만 해도 너른 절터에는 천년 시간을 머금은 삼층석탑
한 기만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던데 탑은 그대로 이지만 지금은 옛 절터에
새로운 감산사가 들어서 앉아 옛 감산사 행세를 하고 있다.
절 앞 돌계단을 오르니 너른 마당에 제법 큰 대적광전 건물이
초가을 늦은 오후 햇살을 받고 서 있다.
 

 

 


절 마당으로 올라서니 사람만한 누런 견공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와
내 몸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며 낮선 방문객을 검문(?)한다.
처음엔 겁이 났지만 개들은 그야말로 부처님 나라 개처럼 순했다.

절은 나중에 돌아보기로 하고 먼저 대적광전 뒤편에 있는 옛 감산사 터를 찾는다.
잔디가 깔린 텅 빈 절터에는 삼층석탑 한 기와 연화문 석등의 대좌가 천년의 시간을
머금은 체 덩그러니 앉아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찬란한 석조미술의 진수 감사사지 석불~

 

 

감산사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국보 제81호, 석조미륵보살입상과
나란히 국보 제82호, 석조아미타불입상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의 감산사에는 없는 석불이다.
대신 대적광전 안에 커다란 액자에 사진으로 걸려 있을 뿐이다.
불자들의 예배대상으로서가 아닌 문화재로서의 유물로 전락(?)하여
이미 오래전에 절을 떠나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가 있다.


그야말로 불국사 석굴암 본존불 뭇지 않은 신라의 찬란한 석조미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두 국보급 문화재를 보기 위해선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한양(서울) 나들이를 해야만 한다.
두 불상을 보기 위하여 나는 일 년을 사이에 두고 두 번 서울 나들이를 했었다.
중박의 어두운 실내에 은은한 조명을 받고 전시 되어 있는 두 불상은 그야말로
완벽한 조각품이자 그 앞에 서면 절로 절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그 때 처음 봤을 때의 감동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하고 가슴 속에 남아 있다.

 

 

● 두 불상의 조성경위 이야기~


감산사지는 1915년 일제강점기 때 발견 되었다고 전 한다.
발견 당시에 두 불상과 함께 3층석탑 1기와 연꽃무늬 석등(石燈) 대석이
발견 됐는데 그 중 두 불상만 1916년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이 손상 없이 보존은 잘 되겠지만 수많은 불자들이
경배하는 불단의 금당(金堂) 안의 불상으로 돌아오긴 영원히 틀린 일이다.

 
이 두 불상은 광배 뒷면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더욱 유명하다.
그래서 절의 창건한 계기와 시대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됐다 한다.


감산사는 신라의 중아찬(重阿飡)이라는 벼슬을 지낸 김지성(金志誠)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부모의 명복과 성덕왕(聖德王)의 만수무강을 기원하기 위하여 지었다고 전한다. 
불상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여 절의 조성 경위와 조성 자가 명확히 밝혀졌다.
부모 효성과 임금(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이 불상으로 가늠할 수 있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두 석불상을 감상해 보자.


불상은 조성자의 주문에 의하여 장인이 징으로 돌을 한 뜸, 한 뜸 쪼아(조각) 만든다.
물론, 심신을 정갈하게 하기위하여 조성(시주) 자나 장인 모두 불단에 엎드려 100일,
천일기도 같은 정신 수행의 과정도 거쳤을 것이다.
그야 말로 간절한 신앙심으로, 행여 정성에 흠결이 날까 고심하면서 돌을 다듬고
쪼아 불상의 형태를 만들어 갈 것이다.


다리를 만들고 몸과 옷을 조각하고 그리고 머리 부분과 최종적으로 불안(佛眼)을
조각 할 것이다. 그중 가장 어려운 것은 석불의 표정을 조각할 때 일 것이다.
엄숙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조각 할 것인지....,
자비가 가득한 표정으로 할 것인지....
미소가 가득한 표정으로 조각 할 것이지......
아마도 불전에 빌고 빌며 몇 날을 생각하고 고심 끝에 마지막으로 정을 들어
부처님의 얼굴(佛眼) 표정을 조각할 것이다.
까닥 정을 털끝만큼이라도 잘못 때렸다간 불상을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야 할 터...
얼마나 섬세하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정을 쪼겠는가.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릴 때는 잘못 그리면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그리면 되지만
돌을 쪼아 형태를 조각할 때는 한 치의 실수를 허용치 않으니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한 조각술이 요구 되겠는가.


감산사의 두 불상은 다리, 몸, 가슴, 머리 부분 그리고 광배까지 한 돌덩이로
되어 있고 대좌 또한 한 개의 돌로 되어 있다.

 
 

▶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 81호)

 


 

조금은 허리부분이 휘어진 몸체, 바로 삼곡(三曲)자세이다.
몸 전체를 두른 거신광(擧身光)의 정교하고 화려한 불꽃 문양...
상체로부터 하체에 걸쳐 늘어진 옷자락은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의
숄을 걸친 듯 유연하고 부드럽다.
불상이 서 있는 대좌는 한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는 안상(案上)이 새겨진 8각이고,
위에는 연꽃의 복련(覆蓮)과 앙련(仰蓮)이 아름답게 이중으로 새겨진 연화대좌이다. 
보살이 쓰는 화려한 보관 윗부분에는 결가부좌한 화불이 부조되어 있고,
미륵의 주불인 석가여래가 맨 위 중앙에 새겨져 있다.

 

 

 

귀에는 멋진 영락을 달았고, 보발이 어깨까지 치렁치렁 드리워져 있다.
보살의 얼굴은 표정은 아주 조용히 보일듯 말듯한 미소가 불안 가득하고,
볼에는 보조개가 살짝 패여 있다.


미륵보살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배 모양의 주형거신광배 뒷면에는 중요한
명문(名文)이 새겨져 있어 이 불상의 가치를 더욱 빛내게 해 주고 있다.
명문에는 신라 성덕왕 18년(719년)에 김지성이 조성했다고 되어 있다.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重阿湌金志誠奉
爲亡考仁章一吉湌亡妣觀肖里敬造甘
山寺一所石阿彌陀像一軀石彌勒像一軀


풀이 하자면, 개원 7년 기미년 2월 15일 중아찬 김지성(金志誠)이 돌아가신
아버지 인장(仁章) 일길찬과 돌아가신 어머니 관초리(觀肖里)를 위하여
감산사를 짓고 석조 아미타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삼가 조성하였다. 는 내용이다.
(이상 국립중앙박물관 내용에서 발췌)


▶ 석조아미타여래입상(국보 82호)

 

 

 

석조아미타불상 역시 온 몸을 받치고 있는 광배와 대좌를 갖추고 있으며
실제 사람의 키 높이(1.74m)와 같은 등신대(等身大) 불상으로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살포시 미소 지은 보살상과는 달리 아미타불상은 여래답게 근엄하고
엄숙하다. 그러나 얼굴 표정은 온유하고 자비심으로 가득 차 있다.
장인의 손은 신의 손인가?
어쩜 이리도 얼굴 표정을 완벽한 여래의 표정으로 표현할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정을 든 손이 신이 손이 아니고서야 어찌 이 같은 표정을 돌에 담아 낼 수 있을까.
머리는 나발(螺髮)에 육계, 목의 삼도(三道)가 뚜렷하다.
신체와 머리 크기가 사람의 실체 체형과 비슷하여 비례미가 너무 좋아
보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고 평화롭게 해 준다.

 

 

불상의 수인은 오른손은 올리고 왼손은 내려 설법인(說法印)을 나타내고 있는데
마치 산 사람의 피부처럼 유연하고 부드러워 여인의 가녀린 손가락 같다.

 

 
이상으로서 두 불상에서 받는 느낌은 그저 감탄과 탄성이다.
몸 전체에 휘감겨 있는 문양들이 그야말로 섬세하고 아름답고 사실적인데,
그냥 섬세하고 정밀한 것이 아니라 그 정교한 문양에 천년이라는 시간의 흔적이
녹아들어 있어 보는 이의 감성을 천 년 전 역사 속으로 빨려들게 하고 있다.
현대의 첨단장비로 조각한다면 이보다 더 정교하게 조각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엔 천년이라는 시간의 흔적이 묻어 있지 않고, 불상을 만든 장인의 정신과
신앙심이 녹아 있지 않기 때문에 별로 감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래서 옛 폐사지에서 출토된 석불이나 석탑 같은 유물들을 대할 때
감동을 유발케 하고 깊은 감정을 불러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 짧디. 짧은 학문적 지식과 정보가 너무나 보잘 것 없는 수준이지만,
불상을 바라보는 감정은 누구 보다고 깊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느낀 감정을 모두 표현할 문학적 소질 또한 부족하다
보니 글이 졸작이 되 버렸다.

 

 

 

▶소박하지만 기품 있는 감산사 삼층석탑

 

 

 

감산사지 3층석탑은 어딘지 소박한 느낌이 들게 한다.
소박함이란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수수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비록 상륜부는 없지만 기단부와 탑신부는 역시 천년의 시간을 간직하고 있다.
탑의 지봉돌(옥개석)은 한 돌로 되어 있고, 옥개석 아래 층급받침은 4단이다.
옛 감산사지에 그래도 그 때 삼층석탑이 남아 있으니 석불상을 빼앗긴 서운함이
조금은 위로가 된다. 이(탑)마저 가져갔다면 아마도 감산사지는 그야말로
폐사지가 되어 기록으로만 남아 있는 사라진 절터에 불과 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옛 절터에 와서 느끼는 감정은 그저 세월의 무상함이다.
그리고 마음의 외롭고, 쓸쓸함이다.
그러나 텅 빈 절터에는 보이 않는 역사의 숨결을 느낄 수 있고.
깊은 사색을 일으키게 한다.
해 질녘 절터를 나온다.

절터를 나오면서 지금의 감산사를 한번 둘러본다.
대적광전에는 그래도 옛 감산사에 있었던 또 다른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바로 대적광전에 모셔진‘석조 비로나자불’ 이다.
불단 양편엔 중박에 빼앗긴(?) 아미타불상과 미륵보살불상이 액자 사진으로 담아 있다.
진품이 여기에 모셔져 있다면 아마도 수많은 불자들이 찾아와 예배하고 경배하며
불상에 엎드려 불심을 태울 것이다.

 

 

 

대적광전 창호의 문양이 화려하다.

 

 

 

절간의 창호는 왜 화려한 꽃살문으로 장식할까?
그것은 부처님이 상주 하시는 불계를 의미 하려는 상징적 장식이다.
불상을 봉안한 금당 안의 불단은 더 화려하게 장엄한다.
아직은 색이 바라지 않아 고졸한 맛은 없지만 이 창문도 백년쯤 시간이
흐르다보면 고색이 짙어 갈 것이다.

 

 

 

절 마당으로 오르는 돌계단이다.
모든 것을 벗어 놓고 들어오라는 계단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중생들이 어찌 속세의 모든 번뇌와
집착과 욕망을 벗어 놓을 수가 있겠는가.
그저 무심한 마음으로 계단에 발을 올려 오를 뿐이다.

 

 

 

대적광전 기단위에 돌로 된 석사자 한 쌍이 버티고 앉아 있다.
사악한 마음으로는 들어 올 수 없다고 하면서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고 있다.
사자후는 사자의 울음소리로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의미한다.
사자후를 한번 토하면 못된 사악한 무리들은 혼비백산 도망친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석물이다.

 

 

 

대적광전에 오르는 중앙 석계단이다.
뽀얀 화강암 석질이 주는 촉감이 너무 좋다.
계단 난간 아래에 새긴 국화문양(연화문양인지)또한 아름답다.
그러나 역시 장인이 정으로 한 뜸 한 뜸 쪼아 만든 조각이 아닌 듯...
조각이 섬세하기는 하나 기계로 판 흔적이 엿보인다.

 

 

 

절 마당 한 켠에 예쁜 다실이 한 체 있다.
방문객 누구나 들어와서 직접 차를 달여 마시도록 해 놨다니
절 측의 인심이 부처님처럼 자비롭다.
들어가 마시지 않아도 마신 듯 기분이 좋아 진다.


늦은 저녁 절집을 나선다.
이제부터 속세이다.
내 몸은 아마도 속진으로 덕지덕지 묻어 있을 것이다.

 

감산사 사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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