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임진왜란 최후의 전장(戰場) 울산 도산성 전투(2편, 서생포왜성)

migiroo 2013. 12. 3. 10:50

>2013.11.26

 

임진왜란(정유재란) 최후의 전장(戰場)


울산왜성 그리고 도산성 전투
그 처절했던 시간 속으로~


  ■   1편, 울산왜성의 도산성 전투
 ■ 2편, 서생포왜성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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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편, 서생포왜성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

 


서생포 왜성에 비가 내리고~

패장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성에 올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제는 울산왜성에 올라 도산성 전투에서 처연하게 죽은 어느 왜병의
원혼이 되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원망하며 울었는데....
오늘은 서생포 왜성에 올라 패장(敗將) ‘가토 기요마사’가 되어 수많은
병사들을 사지로 몰고 간 자신의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원망한다.


버스타고 1시간 남짓, 서생포 입구에 다다르니 하늘에 빗방울이 보인다.
그리고 잠시 후 비는 옷이 젖을 정도로 내리기 시작한다.
카메라를 수건으로 감싸 안고 골목 길 어느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한다.
그런데 그 집 돌담이 예사롭지가 않다.
바로 서생포 성곽의 돌을 갖다 쌓은 돌담이었기 때문이다.
성곽의 돌을 날라다 자기 집 돌담을 쌓거나 아예 성곽 자체를 담으로
이용한 집들이 여기 저기 보인다.
물론, 모두 오래전에 일어났던 참으로 안타가운 일 들이다.


바람이 비를 쫓아간다.
다행히 비는 멀리 달아나고 구름 사이로 해가 얼굴을 내민다.
비스듬히 쌓아 올린 성곽 위에 방금 내린 빗물이 주르르 흘러내린다.
패장 가토의 눈물인양.....

 

한국의 성곽과 왜성의 차이점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깎아 세운 성벽 모서리가 섬뜩하다.
성벽이 모두 비스듬하게 경사를 이루고 있다.
요리조리 미로 같은 출입구를 돌아 성안으로 들어가 본다.


일본의 왜성과 한국(조선)성곽의 축조방식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물론, 여러 가지로 차이점이 많지만 단순히 일반인들의 시각적으로 봤을 때
우리의 성곽은 수직적이고 벽돌쌓기 양식인 반면, 왜성은 비스듬히 경사를
이루고 모서리가 칼처럼 각이 지고 마른모꼴 양식으로 쌓은 점일 것이다.


서생포 왜성의 외곽에 쌓은 외성(外城)들은 대부분 민가마을이 잠식했고,
내성(內城)은 비교적 원형이 잘 남아 있긴 하지만 그 관리 보존 상태가 
너무 미흡한 실정인 것이 안타깝다.

 

 

 

 

성곽 안은 벌써 겨울이 들어 앉아 있다.
앙상한 가지만 남은 늙은 나무들이 찬바람에 온 몸을 맡기고 있고,
수북이 쌓인 낙엽들이 역사의 시간이 되어 가슴을 애잔케 한다.


울산성에서 구사일생 서생포 성으로 탈출한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이 지휘하여 싼 서생포 성곽에 올라 무슨 생각을 했을까?


울산 성을 다시 탈환하겠다고 복수를 다짐했을까?
망연자실 바다 건너 본국 일본을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까?
항복을 하느니 할복을 하리라던 자신의 결심을 내팽개치고
자기만 살겠다고 수하 병사 만 오천 명의 주검을 울산성에 남겨둔 체
허겁지겁 도망쳐 나온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럽다고 생각했을까.

 

조선 침략의 선봉장, 가토 기요마사는 어떤 인물 이었을까?

 

 

가토기요마사는 1592년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제 2군 사령관(장수)으로서 휘하에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 사가라 요리후사(相良頼房)등을 이끌고, 제 1군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을 침략하는데

선봉장에 선다. 가토기요마사는 함경도로 진격로를 선택하여 북진하였고, 전쟁 초반 조선의 왕자인 임해군과 순화군을 포로로

사로잡는다. 


이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반목하고, 조선군의 강력한 반격에 밀려 전황이 날이 갈수록 일본군에게 불리해지자 남쪽으로 후퇴,

서생포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겨 1593년에 서생포왜성을 축성하여 중요 군사거점으로 삼는다.

 

 

 


1596년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서 귀환 명령을 받고 일본으로 돌아간다.
그러다가 1597년에 제1군사령관이 되어 다시 150여척의 군함에 일본군을 이끌고
조선을 재침하니 바로 정유재란이다.
그러나 전세가 불리하자 그는 울산에 지구전을 펼칠 수 있는 울산 성을 쌓는다.
그리고 드디어 울산성에서 조, 명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조, 명 연합군에 의해 포위당한 그의 울산성은 식량과 물 부족으로 병사의 대다수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굶어 죽거나 물이 없어 죽어 간다. 
천만다행히 구원병이 도착 그는 구사일생으로 울산성을 탈출 서생포성으로 피신 한다.


그리고 1598년 11월 ‘도요토미히데요시’ 가 죽자 그는 부산성을 거쳐 남은 병력을
이끌고 본국 일본으로 철수하니 이로서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끝나게 된다.


본국으로 돌아온  가토기요마사는 섭정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간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東軍)인 이에야스 측에 참전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우토성(宇土城)을 함락시킨다.

 

 

 


그 공로로 가토기요마사는 구마모토의 대영지(大領地) 세습영주가 되고, 약 7년에 걸쳐 오사카성과 나고야성과 함께 일본의 3대 명성

(名城)으로 꼽히는 구마모토성을 축조하게 된다. 구마모토성 안에는 우물을 최우선으로 여러 곳을 팠는데 바로 울산성 전투에서
겪었던 물 부족의 교훈 때문이었다고 한다.

 
가토기요마사는 구마모토 성주가 되어 화려한 정치인으로서 활약한다.
그가 축조한 거대한 구마모토 성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웃나라 조선의 침략 중에 얼마나 많은 조선군과 양민을 죽였겠으며, 자신의
휘하 장병 수 만 명의 목숨 또한 자신들의 권력욕에 희생시켰으니 저주의 인물임에
분명한데 어찌 그의 여생은 호의호식 권력을 쥐고 잘 살다가 죽었을까 모른다.
가토 기요마사는 1611년 8월 2일 죽었다.


병사는 전쟁에 나가 적과 싸우다 죽는다.
그래서 후대에 그 죽음이 조국을 구한 영웅으로 추앙 받는다.
그러나 그 싸움은 다른 나라의 침공을 받아 조국이 위태로울 때 싸우다 죽은
병사를 기리기 위한 호칭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같은 전쟁은 아무런 명분도 없이 이웃 나라를 침략한 전쟁이었으니
죽은 왜병들은 영웅이 될 수가 없고, 왜장 ‘가토 기요마사’ 역시 일본은 구한 영웅
이랄 수 없다. 그래서 세계사는 그 같은 자들을 전쟁범죄자라고 역사에 쓰는 것이다.
‘가토 기요마사’ 같은 인물은 자신의 조국 일본을 구한 영웅이 아니라 침략자이다.
일본은 그런 자들을 위대한 영웅이라고 동상까지 세워 추앙하는 나라이다.
참으로 뻔뻔한 나라가 바로 일본이라는 나라이다.

 
고니시유키나가와 함께 가토기요마사는 임진왜란의 주범 중의 한 사람이다.
임진왜란 7년간의 긴 전쟁 중에 조선 전역에서 저지른 그들의 야만적인 만행을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 그런 그가 성을 쌓고 군사 거점으로 삼은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은 그를 빼 놓고 생각할 수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두 왜성은 우리 후손들이 꼭 알아 둬야할 역사적 산 증거지이며
결코 사라저서는 안 될 유적지인 것이다. 

 

 

 

왜성도 중요한 역사적 문화유적지다.

 

 

 

 

울산에는 대표적인 왜성 두 곳이 있다. 
한 곳은 울산왜성(도산성)이고, 또 한 곳은 울산시내에서
좀 떨어져 있는 진하해수욕장 윗 산에 있는 서생포 왜성이다.
울산 왜성은 도심 가운데에 위치하여 성곽의 흔적이 거의 훼손되고
조금 남아 있는 흔적마저 유적지의 공원화로 산책로 등을 조성,
점점 성곽의 흔적이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서생포 왜성은 원형이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지만
이곳도 왜성이라는 당국과 주민들의 인식부족으로 그 관리 보존
상태가 지극히 미흡한 상태이다.


사람들은 ‘왜성’ 하면 아주 좋지 않은 인식을 갖고 있다.
‘일본 X들이 쌓은 성’ 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어찌 왜성이 일본 것인가?
성곽의 외형은 일본식 양식이지만 그 성을 쌓을 때에는
우리의 민초들도 강제 동원되어 쌓은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그 성에는 우리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배여 있는 곳이다.
결코 잊혀져서는 안 될 살아 있는 역사 현장이다.
혹자들은 말한다.
여기서 혹자란 역사를 잘 못 인식하고 있는 일부 사학자,
향토사학자 같은 지식인들과 그리고 현지 주민들을 말함이다.
그들은 주장한다.


왜, 일본 것을 우리가 관리하고 보존 하냐고....


참으로 딱한 인식이다.
그런 ‘왜성’ 같은 자국 내에 있는 역사 유적지가 없어진다면 우리 후손들이
어떻게 그 한 많은 ‘임진왜란‘ 같은 비운의 역사를 기억할 수 있겠는가.
우리 것이든, 아니든, 우리나라에 있으면 모두 우리의 문화재이고 유적지이다.


만약 중국에 있는 ‘고구려 국내성터, 광개토대왕릉비, 장수왕릉, 같은 것들이
중국 측에서 자기네 나라 것이 아니라고 방치한 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문화재든, 역사유적지든... 그것이 어떤 과거에 있었던 것이었던
모두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적지로서 잘 관리 되고 보존 되어야 한다.


지난 김영삼 정부 때 일본이 지은 ‘조선총독부건물’을 헐어 없애 버렸다.
치욕의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 때문이다.
참으로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치욕의 역사도 귀중한 역사이다.
총독부건물을 하루아침에 헐어 버린 것은 일제침탈의 역사적 증거를
없앤 거다 다름없다. 수 십 년 , 수 백 년 후 후손들은 무엇을 보고
일제의 만행적 역사를 기억하고 배울 것인가.

건물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른 곳으로(독립기념관) 옮겨서라도 일본의 침략적 상징 이었던

 '조선총독부건물'은 유지 했었어야 했다.


울산왜성 유적지를 시민 공원화 한 것은 참으로 잘 못된 것이다.
서생포 왜성도 더 잘 관리해야 한다.
가능하다면 서생포 왜성 주변도 옛 날 모습으로 다시 정비해야 한다.
현재 일부 민가가 잠식하고 있는 외곽부의 외성도 민가를 다른 곳으로
이주 정비하여 최대한 성곽 주변을 복원 정비하여 후손들에게 잘
넘겨주어야 한다. 어찌 두 왜성이 일본 것인가.
전국에 임난 때의 왜성은 약 30여개 소가 남아 있는데 
대부분이 경상남도 남해안에 위치해 있다.
그 중 서생포 왜성이 남아 있는 왜성 중에 가장 큰 규모이다.
그래서 해마다 일본의 학자들을 비롯한 일본인 관광객들이 단골로
답사하는 유적지이기도 하다.
우리의 뼈아픈 상처가 배여 있는 왜성, 국가 사적지로 다시 복원 지정해야 한다.


(*현재, 울산왜성, 서생포 왜성은 울산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7호 및 8호로
  지정 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왜성들은 처음(1963)에는 국가 사적지로
  관리 됐었는데 1997년에 일제지정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에 따른 등급
  조정으로  국가 사적지에서 해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울산성과 서생포 왜성은 비록 왜가 쌓은 성곽이지만 어찌 왜병들의 힘만으로
그 큰 성을 쌓았겠는가. 필시 수많은 우리 민초들을 강제 동원하여 쌓았을 것이
분명하니 돌 하나하나 마다 우리 민초들의 아픈 한이 서려 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잘 보존하여 나라가 약해지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를 뼈저리기
느껴야 하는 교훈의 장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 두 왜성은 임난 후 조선 조정에서 군사기지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우리의 역사유적지라고도 할 수 있다.

 

무너진 성곽에 앉아...


무너진 성곽 더미에 앉아 산 아래 바다를 바라본다.
서생포 진하해수욕장 백사장 너머 바다가 파노라마처럼 시야에 들어온다.
왜성의 외곽부 외성(外城) 일부가 길게 뻗어 포구 쪽으로 향하다가
갑자기 마을의 집들에 의해 뚝 끊어져 있다.
시커멓게 찌든 성곽은 그 윤곽이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죽은 잡초와 겁폴 더미가 성곽을 덮어 석축이 잘 안 보인다.


멀리 바다를 바라보니 서생포(진하해수욕장)가 한 눈에 들어온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가 지형하나는 기막히게 잡은 듯하다.
이런 천해의 요충지에 군사 성곽을 쌓았기 때문이다.

 

 

 

 

바다로부터 시야를 돌려 성곽 안쪽 땅 바닥을 바라본다.
문득 눈에 띤 검은 물체 하나....
주워 보니 깨진 작은 와편(기오조각)이다.
성안에 건물이 있었을 터이니 그 건물의 기왓장 조각이 아닌가.
살펴보니 수막새 조각이다.
처절했던 임진왜란의 오욕(汚辱)의 시간들이 그 작은 와편 속에
압축파일처럼 응축되어 있는 듯했다.

 

 

 

에필로그

 
또 빗방울이 보인다.
문득 상념에서 깨어난다.
이제는 ‘왜병’도 ‘가토’도 아니다.


미로 같은 성곽을 빠져 나온다.
다시 바람이 분다.
오늘이 금년 들어 가장 추운 날씨라 한다.

 

 

 

 

진하해수욕장 백사장을 걷는다.
바람이 파도를 일으키고 잔모래를 허공에 날린다.
지난여름 시끌벅적했던 백사장은 그야말로 적막의 바다다.
어쩌면 단 한 사람조차 보이지 않는다.
모래가 바람에 날려 똑바로 눈을 뜰 수가 없다.
포구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임진란 때 수많은 아군의 함선과 왜선들이 드나들던 포구는 거대한
현대식 다리(명선교)가 괴물처럼 버티고 서서 물길을 가로 막고 있고,
옛 선착장 흔적은 온데간데없고 손님 없는 횟집들만 줄지어 앉아 있다.


420년 전, 임진왜란 때도 서생포 앞 바다는 지금과 같았을 것이다.
바다 또한 그때 바다나 지금 바다나 변하지 않은 바다 이다.
파도 소리도 변함없이 그 때 소리와 같은 소리 일 것이다. 


그리고 420년 전 임진왜란을 자행한 나쁜 나라 일본,.... 
지금도 여전히 나쁜 나라 일본으로 변함이 없다.
우리에게 가깝고 친근한 이웃 나라임을 마다하고
언제나 등 돌린 먼 나라로서 행세하고 있다.


그들은 한번은 조선을 침략하고, 또 한 번은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
그 두 번의 침략 전쟁으로 우리에겐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침략을 부정하고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등 여전히 우리에게 있어 미운 나라로
여겨지기를 원하고 있다.


일본은 우리에게 있어 일본이 아니고 여전히 왜(倭)일 뿐이다.
결코 과거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될 원수의 나라임을.....
지금 우리는 울산왜성이나 서생포왜성을 통하여 점점 무디어 가는
일본에 대한 우리의 경각심을 항상 깨여 있게 하여야 한다.
그래서 두 왜성을 잘 보존 관리해야 하는 이유이다.


나는 여름바다보다 겨울바다가 더 좋다.
아무도 없는 백사장을 홀로 걸으면서
하염없는 상념으로의 여행을 떠날 수 있어 좋고,
언제라도 파도 속에 나를 묻을 수 있어 좋다.
집착, 욕망, 모순 덩어리인 나이기 때문이다.


울산왜성과 서생포 왜성에 죽어 간 우리 군사들이나
왜의 군사들이나 모두 불쌍한 영혼들.....
그 원혼들의 명복을 빌며 이 졸작의 글을 마친다.

 


*위 글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으나
글의 구성은 순전한 나의 감정과 주장을 픽션 형식으로
전개했음을 밝혀둔다.


1,2편 끝


서생포 왜성 및 진하해수욕장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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