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울산왜성 그리고 그 처절했던 도산성 전투(1편)

migiroo 2013. 12. 3. 10:24

>2013.11.26

 

임진왜란(정유재란) 최후의 전장(戰場)


울산왜성 그리고 도산성 전투
그 처절했던 시간 속으로~


 ■ 1편, 울산왜성의 도산성 전투
 ■  2편, 서생포왜성과 왜장 ‘가토 기요마사’ (다음 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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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편, 울산왜성 그리고 도산성 전투,
          그 처절했던 시간 속으로~

 

 

차마 떠나지 못함인가, 모퉁이 저편에서 서성이고 있는 가을....
이미 대지는 겨울의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고 있다.
아직도 가을의 잔상들이 여기 저기 남아 있는 울산 왜성 학성공원...,
시간이 정지된 듯 공원은 낙엽 바스락 거리는 소리 외엔 너무 조용하다.


임진왜란 그리고 정유재란 최후의 전장이었던 울산왜성의 도산성 전투...
그 처절했던 전투의 흔적은 찾아 볼길 없고 이제는 시민공원이 되어있다.
다만 왜가 쌓은 성곽 잔해들이 공원 한 귀퉁이 남아 있을 뿐....
어떤 곳은 무너져 성곽의 흔적조차 사라지고, 어떤 곳은 제법 성곽의 윤곽이
뚜렷이 남아 있는 곳도 있다. 모두가 일본식 축성 양식이다.


임진왜란 당시 원래 이름은 도산성이었다. 그 후 울산사람들은 도산성을 왜놈들이
쌓은 성이라 하여 울산왜성이라 불렀다. 그리고 또 다시 울산시에서는 울산왜성을
시민공원으로 꾸며 그 이름을 ‘학성공원’으로 바꿨다.


 

 

 

 

찬바람이 분다.
어께를 움츠리고 상념에 잠겨 공원길을 걷는다.
문득 성곽 잔해 속에서 울부짖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그 소리는 갈증에 목이 탄 왜병들의 울부짖음이고,
혹한 속 싸우다 죽은 조, 명 연합군 원혼들의 울음소리다.


나는 지금 어이없게도 그 때 그 처절했던 전장 속의 어느 왜병이 되어 있다.
성 안에는 먹을 것은 고사하고 물조차 떨어져 버렸다.
성 안에 우물은 단 한 곳, 그 마저 물이 떨어져 빈 우물이다.
조, 명 연합군이 성곽 밖에서 수맥을 모조리 끊어 버렸기 때문이다.
식량도 거의 바닥이 났다. 싸워 죽는 자보다 굶어 죽는 자가 더 많았다.
병사들은 타는 갈증을 못 견뎌 군마(軍馬)를 잡아 그 피를 마셨다.
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사령관도 자신의 말을 잡아 피를 마셨다.
그러나 이제는 군마조차 남지 않았다.
이제는 자신이 싼 오줌을 마시기 시작했다.
병사들은 적과의 전투가 아니라 굶주림과 목마름과 싸워야 했다.

 

 

 

 

병사들은 의문이 생겼다.
전쟁이란 무엇이며, 도대체 누굴 위한 전쟁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권력자의 야욕 때문에 가족을 다 버리고 이 참혹한 전쟁터에
내 마껴진 자신들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차라리 죽는 자가 행복해 보였다.


혹독한 추위, 식량, 물과의 싸움이 적과의 전투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왜병들은 이기기 위한 전투를 하는 것이 아니라 필사적으로 울산 성을
탈출하기 위한 전투를 해야 했다.
그러나 성곽을 겹겹이 에워싸고 있는 조, 명 연합군의 포위망을 뚫고
성을 탈출하기란 사실상 불가능 했다. 전투는 날마다 극렬하게 벌어졌다.
조, 명 연합군도 힘이 들었다. 병력은 왜군보다 훨씬 많았지만 성은
난공불락인양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화살과 총의 대결

 

 

 

 

화살을 성곽 안으로 비처럼 쏘아 붓고, 성곽에 사다리를 놓고
병사들이 수없이 성으로 오르려 해도 번번이 실패를 하곤 했다.
실패의 가장 큰 원인은 왜병들이 사용하고 있는 신무기 조총 때문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처음 등장한 왜병의 조총 위력은 화살 위주의 아군에게서는
너무나 위협적인 무기였다.

 


화살과 총....


그 효력을 비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일일 것이다.
재래식 무기와 최첨단 무기의 대결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단 20여일 만에 왜군이 부산, 울산 등 남해안으로 상륙하여 파죽지세로
단숨에 조선의 수도 한양(서울)까지 진격해 올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조총 때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좀더 냉철히 성찰해 보면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이 물리적으로
강해서 그런 것 보다는 그 당시 조선 이라는 나라의 형편없는 군사력과
정치적 혼란이 더 큰 패배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조총은 왜 이름이 조총(鳥銃)일까.
날아가는 새도 쏘아 맞출 수 있는 총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임진란 때 처음으로 사용한 일본의 조총은 사실은 그 위력이 화살보다
월등이 우수한 무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화살의 사거리는 평균50~150m 정도, 길게는 200여 미터나 나갔지만
그에 비해 조총의 사거리는 겨우 50m 정도 밖에 안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화살은 숙련된 궁수인 경우 1분에 수십 발을 능히 쏠 수 있었지만
조총은 1분에 10발정도 밖에 쏘지 못했는데 이는 한발 쏘고 다시 장전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길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군은 이런 단점을 보완, 조총의 발사방식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바로 3열 발사 방식으로 사수를 3줄로 세운다음 첫 줄이 발사하면 그 다음 줄이
발사하고, 또 다음 줄이 발하는 연속 발사 방식을 개발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1열 발사, 2열 발사 준비, 3열 장전... 이런 식으로 하면
조총을 연속적으로(다발총처럼) 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조, 명 연합군이 성을 함락하기 위해서는 병사들이 성곽으로 바싹 접근해야
하는데 그 때마다 조총의 연속 일제사격 권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군의 병력이 왜의 병력 보다 훨씬 더 많았다 해도 쉽사리 성을
함락 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도산성 전투는 사실상 화살과 조총의 싸움 이었다.
그래서 피아(彼我)간 병사들이 수도 없이 죽어갔다.
12월과 1월의 혹한기에 벌어진 전투로 도산성 안팎은
온통 죽은 병사들의 시뻘건 핏물로 얼어붙었다.


수도 없는 일제 공격에도 그 놈의 조총 때문에 성이 함락 되지 않자
조, 명 연합군사령관 권율과 마귀 장군은 작전을 변경하기에 이른다.
바로 싸우지 않고도 항복을 시킬 수 있는 성의 고립 작전이다.
철저히 성안으로 들어가는 식량 공급원을 차단하고, 물길을 끊고
기다리는 장기전에 들어갔다. 작전은 딱 들어맞았다.


가토 기요마사의 성안은 그야말로 생지옥과 다름 없었다.
식량부족은 말할 것도 없고 마실 물이 없어 군마를 잡아 그 피를
나눠 마셔야 했고, 급기야는 자신이 싼 오줌을 마셔야 하는

극한 상황이 날마다 벌어지곤 했다.

왜장 '가토'는 전쟁에 있어서 물이 총보다 더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
조총의 위력도 ‘물’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됐다.
드디어 왜장 ‘가토 기요마사’ 는 최후 항복이 아니라
할복(割腹)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휘하 장병 모두에게 집단 할복을 명할 수는 없는 노릇....
가토의 고민은 전쟁의 승패가 아니라 죽는 방법이었다.
최후까지 싸우다 죽느냐, 아니면 장렬히 할복 하느냐....
추호도 항복은 생각할 수 없었다.


가토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전쟁이 얼마나 무모한 전쟁인가를....


가토는 검대에 걸린 자신의 소도(일본 무사 검중의 하나)를 꺼내 들었다.
바로 조선침략으로 출전할 때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받은 검이다.
칼집에서 검을 꺼내자 시퍼런 칼날이 번쩍 거렸다.
가토는 칼끝을 자신의 배에 살며시 대 보았다.
그리고 할복할 때의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한 해가 가고 새해가 됐다.
한겨울 추위도 고통스러웠지만.....
휘하 장병들이 마실 물이 없다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으련만 눈도 안 내렸다.
절망의 그림자가 서서히 가토 기요마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기적이 왔다. 바로 구원병이 들이 닥친 것이다.
바다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패하고, 육지에서 의병과 승병들에 패한 왜군들은
동해 서생포 왜성을 비롯한 남해안 일대 부산 죽도, 양산, 구포왜성 등지로 후퇴,
최후로 본국 철수를 대비하고 있다가 울산성의 ‘가토 기요마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무려 8만의 병력을 이끌고 도산성에 들이 닥친 것이다.
이로 인해 조, 명 연합군은 도산성 함락을 일단 포기하고 경주로 후퇴를 한다.
이것이 1597년 12월23일부터 그 다음 해1월4일까지 단 13일간의 치열했던
도산성 제1차 전투다.


도산성 제2차 전투는 1598년 10월21일 벌어졌다.
경주로 잠시 물러갔던 조, 명 연합군은 도산성 함락을 재 시도한다.
그러나 왜장 ‘가토 기요마사’는 도산성을 스스로 불 지르고 구원병의 도움으로
휘하 장병 16,000명 중 겨우 생존한 500여명만 데리고 필사적으로 성을 탈출,
서생포 왜성으로 도망 가 버린다.

이렇게 1, 2차 도산성 전투를 치열하게 벌이고도 조, 명 연합군은 끝내 도산성
함락에 실패, 왜군이 스스로 물러나자 그제야 도산성을 접수 하였으나 무려 16.000명이라는

엄청난 전사자를 내고 사실상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를 끝내고 말았다.

 
서생포 왜성으로 도망간 ‘가토 기요마사’ 등 왜군들은 1598년 11월 18일
일본의 ‘도요토미 히대요시’가 죽자 일본 본국으로 철수하니 장장7년 전쟁의
임진왜란이 비로소 막이 내리게 된 것이다.
참으로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는 상처뿐이었던 전쟁이었다.


그러나 임란으로 인한 조선의 상처는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더욱이나 그 끔찍한 임란 그 300여년 후, 일본은 다시 한국을 침략하여
무려 36년이라는 일제강점기를 겪게 했으니 국토 방방 곳곳은 물론,
우리 민족의 가슴 깊이 생긴 상처의 고통은 이루 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러고도 어찌 우리가 일본의 만행을 잊을 수가 있겠는가. 


 
바람 소리가 들린다.
가만히 귀 기울여 들으면 그것은 바람소리가 아니다.
치열한 전투에서 전사한 조, 명 연합군의 울음소리이고, 화살 맞고,
조총 맞고, 얼어 죽고, 굶어 죽은 피아 간 병사들의 울부짖는 소리이다. 
모두 인간들의 원혼 소리 일진데....
아직도 그들 원혼들이 이곳 도산성을 못 떠나고 맴돌고 있으니 
학성공원이 공원이 아니다.


발걸음이 도산성 정상에서 멈춘다.
왜장 ‘가토 기요마사’ 는 이 정상에서 참담한 심정으로
성을 포위하고 있는 조, 명 연합군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를 보고 조선의 권율장군이 소리친다,


“가토야, 항복하라....“


명(明)의 마귀장군도 따라서 고함친다.


“야 이놈, 가토야! 지금 항복하면 네 목숨은 살려 주겠다.”


그러나 ‘가토‘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참담한 심정으로 성 아래 쓰러져 있는 수많은 주검들을 바라보면서
어떡하든 한 사람이라도 살려서 성을 탈출할 생각만 했을 것이다.

 

 

 

 

지금 그 도산성 정상에 어이없게도 화장실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울산 남구청에서 학성공원을 조성하면서 지은 건물이다.
그 발상이 참으로 기가 막히다.
어리석고 순진한 것인지....
아니면 ‘가토 기요마사’ 를 욕보이겠다는 깊은 의미를 두고
지은 화장실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모두 동조할 수가 없다.
도산성(학성공원) 정상 부에 있는 화장실은 당장 철거해야 한다.
공원 안에는 다른 현대식 화장실이 몇 개 있지 않은가.


도산성(울산성), 겨우 50m 밖에 안 되는 산 이지만.....
역사의 흔적이 깊게 배여 있는 산이다.
여기에서 수천여 명의 우리의 선조들이 왜군과 싸우다 죽었다.
그 이름 모를 죽음들이 있었기에.....
풍요로운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존재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그 분들을 기리는 충혼탑이나 비석(碑石) 같은 것을 못 새울망정....
그들의 원혼이 잠들어 있는 역사 유적지 정상에 화장실을 짓다니....
위정자들은 감정이나 감성이 없는 사람들임에 분명하다.

 

 
학성공원(울산왜성) 사진

 

 

 

 

 

 

 

 

마지막 가을의 꽃 '털머위'가 노란 꽃을 피웠다.

마치 울산왜성에 잠들어 있는 그 때 도산성 전투에서 처연히 죽어간 조, 명 연합군 병사들과

가토기요마사의 왜병들의 원혼을 위로 하듯 털머위는 꽃을 피운 듯 하다.

 

*위 글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사실에 근거했으나
글의 구성은 순전한 나의 감정과 주장을 픽션 식으로
전개했음을 밝혀둔다.

 

추기

 

울산시 도산성 전투도 거액 매입 논란

 

오늘(2013.12.5)신문(한겨레)에 울산 왜성의 도산성 전투도에 대한 기사가 올라와 있다.
이미 인터넷 등에 많이 떠 있고, 울산박물관에도 전시되어 있는(모사본) 임진왜란 의 '도산성 전투도' 가 일본인이

그린 그림인데 울산시가 그림의 주인인 일본인으로 부터 25억원에 매입 하겠다고 하니 시의회에서 일본인 그림을

왜 거액을 들여서 사는냐 하고 논란이 되고 있다.

 

도산성 전투도는 임진왜란 말기인 1597~1598년 13일 동안 도산성(현 울산왜성) 일대에서 벌어졌던 조·명 연합군과

왜군의 전투에 대해 왜군 장수의 가신이 설명을 듣고 당시 전투 장면을 6폭 병풍 3개에 그린 것으로, 원본은 소실됐다.
울산시가 구입하려는 것은 18세기 이후 제작된 모사본 가운데 일본인 수집가가 소장한 작품이다.

시의회 주장은 “도산전투는 조·명 연합군이 성을 끝내 함락시키지 못했던, 일본으로선 자랑이겠지만 우리로선 뼈아픈

전투였는데 엄청난 예산을 들여 꼭 이 그림을 살 필요가 있는지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한다.

 

그러나 꼭 우리가 승리한 전투도여만 하는 인식은 잘 못된 역사 인식이다. 설령 패배를 한 것이라도 역사는 역사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액이긴 하지만 임진왜란 최후의 전장이었던 도산성 전투에 대한 그림이 하나도 없으니 일인이

그렸던 누가 그렸던 개의치 말고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물이니 적당한 선에서 매입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울산박물관 특별전시회에 전시 되어 있는 일인 그림 '도산 전투도' 3폭

(전시 기간 2013.11.26-12.22. 울산시가 매입 하겠다고 한 전투도임)

 

아래 사진은 울산박물관 전시장 유리상자에 들어 있는 것을 카메라도 찍은 것이라

선명도가 아주 불량함)

 

 

 

 

1폭, 전체도

 

 

 

 

2폭, 조, 명 연합군이 울산성(도산성)으로 진격해 가는 모습 

 

 

3폭, 왜의 구원군(8만명)이 울산성에 오자 작전상 후퇴하는 조, 명 연합군

 

 

 

기타 세부도

 

 

 

 

 

 

2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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