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비 내리는 산사, 울산 석남사를 찾다.

migiroo 2014. 7. 4. 16:19

>2014.7.3


비 내리는 산사, 울산 석남사를 찾다.


비가 내린다.
간밤부터 내리던 비가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주춤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가지산은 목도리를 두른 것처럼 온통 뿌연 안개를 뒤집어쓰고 있다.


내 가슴에는 아직도 세월호의 트라우마(trauma)가 아물지 않고 응어리져 있다.
차디찬 물속에서 울부짖고 있는 수백의 어린 영혼들이 생각나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리고 요즈음엔 또 다른 트라우마로 인하여 괴로워하고 있다.
바로 무능한 정부와 그 대통령, 그리고 악마 같은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와 혐오감... 
이런 것들로 인한 속상함이 정신적이 트리우마를 더욱 골 깊게 하고 있다.
언제쯤 내 가슴 속 깊숙이 응어리져 있는 트라우마가 치유 될 수 있을까?

 

 

 
빗물에 젖은 7월의 신록, 그 싱싱한 숲속에 잠시 지친 내 영혼을 맡겨본다.
오랜만에 비구니 도량 울산 울주군 석남사(石南寺)를 찾는다.
산사로 들어가는 길은 그야말로 초록빛 세상이다.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이어진 약 800여 미터의 산사로 드는 길은
그야 말로 환상의 길이고 극락정토로 들어가는 길인 듯 싶다.
간밤에 내린 많은 비로 석남사 계곡은 수많은 폭포로 변해 있고,
우렁찬 계곡 물소리는 세상 일체의 잡음들을 일시에 잠재우고 있다.


 

 

 

 

길 가에는 수 백 년 묵은 거목들이 마치 불가의 오백나한처럼 무리지어 서 있다.
그런 거목들 밑에 서 있으면 그 장대한 위엄에 두렵지 않을 수 없고,
절로 경외심(敬畏心)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자연 속의 인간들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일주문 안으로 들어 조금 지나니 석남사 부도 밭이 숲속에 앉아 있다.
안내판조차 없으니 관심을 가지고 찾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싶다.
4기의 부도(浮屠)는 그야말로 시간을 초월한 듯 적요(寂寥) 속에 묻혀 있다.
먼 과거의 영혼이 오늘 날까지 남아 무언의 역사를 말해 주는 듯....
그 낡고 마모된 부도에서 감히 속세의 인간들이 범접 할 수 없는
세월의 무게가 느껴진다.


 

 

 

청운교를 지나 섭진교(涉眞橋)에 이른다.
‘涉眞‘이 무슨 뜻일까?
涉자가 ‘건널섭’ 자이니 진계(眞界), 즉 진리를 향하여 건너는 다리란 뜻일 터이다.
다시 말해서 참 진리인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다리라는 뜻이 아닐까 싶다.
섭진교 아래 너럭바위 위로 용트림하며 흐르는 계곡물이 거침없이 휘어돌아
다리 밑으로 사라진다.


 

 


 
섭진교를 지나 침계루에 이른다.
침계루 아래 계단에 올라서니 빗물에 흠뻑 젖어 있는 삼층석탑
상륜부가 대웅전 지붕 용마루에 걸려 있다.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라면 적멸보궁일터인데 과연 진신사리를 모신 탑일까?
의문이 일어난다.
안내판 내용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이 탑은 원래 신라의 도의국사가 1,200여년 전에 15층 대탑으로 세운 것이었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 된 것을 1973년에 삼층석탑으로 복원하고 스리랑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모셔와 봉안 한 탑이라 한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을 제외하고 현존 신흥 사찰에 스리랑카에서 가저온
석가 사리탑이 여럿 있는 것을 보았는데.....
스리랑카에는 아직도 부처님 진신사리가 많다니 믿어지질 않는다.
어쩟던 석가 사리탑이라하니 믿을 수 밖에.....
 

 

 

 

절 마당은 그야말로 티끌 하나 없는 정갈 그 자체이다.
그 정갈함 앞에 감히 속세의 삿된 생각들이 발을 들릴 수조차 없다.
불가(佛家)에 무명(無明)이라는 것이 있다.
글자 그대로 ‘밝음이 없음’ 이다.
밝음이 없다는 것은 어둠이다.
어둠은 곧 죄업을 의미하고 온갖 삿된 집착과 망념을 뜻한다.
그래서 스님들이 머리를 깎는다.
머리카락 하나하나가 모두 밝음을 가리는 무명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의 머리카락은 바로 '무명초'이다.

밝음을 가리는 무명초, 잘라도 잘라도 솟아 나는 잡초 무명초 말이다.
 

머리카락은 잡초처럼 밀어도, 밀어도 또 자란다.
거울을 닦아도 닦아도 잠시 뒤에 또 먼지가 끼듯이....
세상은 곧 무명의 세계이다.
그래서 스님들은 무명을 벗어나려 끊임없는 정진과 수행으로 심신을 닦는다.

무명을 벗어 날 때 진정한 해탈의 진계로 들어 갈 수 있다.

 


 

 

강선당 댓돌 뜰에 스님들의 흰 고무신이 나란히 놓여 있다.
너무도 깨끗하다.
스님들은 왜 흰 고무신을 신는 것일까?
이 또한 무명을 벗어나려는 집념이 아닐까 생각한다.
요즈음은 고무신 대신 메이커 운동화를 싣는 스님들도 있으니
상징성 보다는 효율성을 택한 것이리라....


 

 

 

 

석가삼존불을 모신 대웅전의 화려한 단청은 다시 개청한 듯 했지만
그 마저 오랜 시간에 이제는 빛이 많이 바래 있어 그 퇴색함이
오랜 고찰(古刹)로서의 위엄을 느끼게 하고 있다.


 

 

 

 

대웅전을 빗겨 극락전 앞마당에 이르니 작은 또 하나의 삼층석탑이 서 있다.
석남사에서 진정 가장 오래된 신라시대의 진품 석탑이다.
석남사의 창건은 신라 헌덕왕 16년(824) 도의선사(道義禪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하니 이 작은 삼층석탑이야말로 석남사의 역사인 셈이다.
탑신에는 덕지덕지 세월의 주름 같은 석화(이끼)가 끼어 석탑의 장구함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다.

 

 

 

 

 

 

 

대웅전 뒤켠을 돌아 돌계단으로 올라서니 석남사의 유일한 보물,
석남사 승탑(부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보물 제369호인 석남사 승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석남사를 창건한
도의국사의 사리탑이라 전해지지만 확실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아무튼 팔각원당형 석남사 승탑은 기단부에 새겨진 문비와 두 분의
금강역사상이 사실적으로 새겨있는 등 다른 여러 문양이 남아 있어
그 예술적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승탑이다.

 

 

 


진리를 찾은 걸까?
진리는 커녕 진리의 그림자조차 찾지 못하고
진리의 문 반야교(般若橋)를 건넌다.

 
반야교를 건너니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우산을 챙기지 않은 불찰일까 비를 피할 수도 없어 뛰기 시작한다.
비 좀 맞으면 어떻다고 늙은 노구를 뛰게 하다니 이 또한 오만이다.


들어 올 때는 가슴 속에 엉겨 붙어 있는 트라우마를 조금이라도
씻어 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세월호의 안타까움과 정부에 대한 배신감.....
그리고 아집과 오만과 불통의 그녀에 대한 불신감은 언제쯤 치유 될 수 있을까.
이 트라우마는 아마도 박근혜 정권이 끝나는 날, 아니 그 먼 훗날까지도
가슴속 깊은 상처로 남아 있을 듯 하다.


점심을 거른 탓 일까.
석남사 주차장 상가에서 칼국수 한 그릇으로 시장 끼를 달래고
빗속을 달려 집으로 돌아 왔다.


>미지로

 

 

석남사의 이모 저모~~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라 화질이  조금은 부족하다.

  삼성 겔럭시 S3 촬영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이지만 이 정도면 불로그 사진으로서는 큰 부족함이 없는 듯 하다.

  수 십만원에서 수 백만원씩하는 요즘 DSLR 카메라와 역시 카메라 보다 더 비싼 렌즈를 갖추어야 하는

  요즘 카메라에 비하여 스파트폰의 화질이 조금 떨어지긴 하지만 그런데로 아마추어로서는 쓸만하다.

  휴대도 간편하고 언제 어디서는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휴대폰 카메라도 좋은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