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고래마을, 울산 장생포의 옛 흔적을 찾아서~

migiroo 2013. 11. 7. 11:52

>2013.11.1


고래마을, 울산 장생포의 옛 흔적을 찾아서~ 

 

 


오랜만에 고래마을 장생포를 찾는다.
울산의 장생포하면 먼저 고래가 떠오르기도 하지만....
내겐 또 다른 기억들이 잠자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1970년 초반, 40여 년 전의 오랜 기억들이다.
나는 그 즈음 새파란 총각 시절 1년 반 정도를 장생포에서 지낸 적이 있다.
해군 초급 장교(중위)시절, 장생포에 위치해 있던 해군부대에 근무했었다.  

 

 

 

 

그 때 장생포는 그야말로 고래천지였다.
날마다 집체만한 고래가 포경선 꽁무니에 밧줄로 묶여 끌려와서 부두 작업장에서 해체작업을 벌렸고,

해체된 고래 고기는 여러 곳에 분산 되어 커다란 가마솥에 하루 종일 삶았다. 커다란 칼로 고래의 배를

가르면 죽은 새끼고래가 나오기도 했는데 그럴때마다 구경하는 사람들은 안타까운 듯 바라보곤 했다. 

고래는 단 한 마리의 새끼를 낳아 기르는데 포경선 작살에 맞아 죽은 어미와 함께 죽고 말았으니 그런

아기 고래가 너무나 불쌍하여 눈물을 흘리는 여인들도 있었다.

 

 

 

 


선창가에는 크고 작은 고래잡이 포경선들이 정비를 위해 정박해 있었고,  포경선 뱃머리(船首)에는

고래를 잡을 때 쏘는 고래포(대포)가 당장이라도 고래를 향하여 날카로운 쇠 작살을 발사 할 듯

그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부두 가에는 고래 고기 파는 식당들이 즐비했고,

거리마다 식당을 비롯한 술집, 다방 등이 한집 건너 하나씩 진을 치고 들어 앉아 성업을 했다.
밤낮 할 것 없이 술집 작부들의 웃음소리, 술 취한 선원들의 싸움소리....
잡아 온 고래를 육지로 끌어 올리는 둔탁한 기계 굉음소리....
조금은 역겨운 고래 삶는 냄새가 온 포구에 진동했고....
잡혀온 고래 구경하러온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대고 흥청 거렸다.
 

뒷골목마다 여인숙, 거리마다 사진관, 이발소, 쌀집,·구멍가게, 담배 가게 그리고 자전거 수리소, 선박 수리소 같은

건물들이 성업을 하고 있었다. 
..........
......


장생포는 그야말로 주말, 평일 구분 없이 언제나 시끌버끌 흥청거렸고, 사람 사는 냄새, 고래 고기 삶은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그야말로 사람들이 사는 현장이 바로 장생포였다.

 

 

 
○한국 사람들은 고래 고기를 먹지 않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원래가 고래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한다.
한국에서 포경선에 의한 본격적인 고래 조업은 일제강점기 중에 장생포를 근거지로 주로 일본인들이 고래를 잡아 장생포에서

해체하여 전량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그러니깐 한국 사람이 고래 고기를 먹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동안 일인들로부터
배운 것 같은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이 반구대 암각화에 보면 사람들이 고래를 잡는 그림이 나오는데 아마도 선사시대 사람들은

고래고기를 먹었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가 일제 폐망 후 일본인들이 쫓겨 가면서 남기고 간 몇 척의 포경선으로 한국 사람들이 직접 고래잡이에 나서기 시작,

80년대까지 활발한 포경을 벌린 것이다. 그러다가 고래 멸종 위기를 느낀 국제기구에서 1986년 전 세계에 포경금지 선언이
발효되어 한국의 포경사업 또한 저물기 시작했고 장생포의 번성도 포경금지 이후부터 퇴행 길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근래 들어 장생포는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했다. 울산시가 공업도시에서 생태도시로 탈바꿈하면서 그 일환으로 고래를 적극 활용,

고래박물관을 설립하는 등 고래문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장생포가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래 조업의 근거지이기도 했지만 이미 세계적으로 알려진 국보 제285호, 대곡천의

반구대 암각화에 선사시대의 고래 그림이 무수히 발견 됐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해마다 성대한 고래축제가 열리고, 도심 곳곳에 고래 조형물이 설치되고 고래를 형상화한 디자인 물이 시내 곳곳에

넘쳐나고 각종 의류, 생활도구에 이르기 까지 다양한 분야에 고래 디자인를 도입 관광 상품화 하고 있다.
거리의 가로등도 고래형상이고, 도로 안내판도 고래 모양이다. 산책길 이정표도고 고래모양이고, 관공서 건물에도 크고 작은

고래 모형이 설치 되어있다. 심지어는 보도 불럭에도 고래 문양이 새겨져있는 등 도시전체가 고래천국으로 변해 가고 있다.


 

 

 

 

그러나 해마다 요란하게 벌리고 있는 고래축제도 그렇고.....
도심지를 온통 고래 조형물이나 형상물로 뒤 덮어 놓은 것들이 진정 고래를 보호하자는 것인지,

축제장에서 고래고기를 팔고 있으니 고래를 잡아먹자는 것인지.....
그 의도가 모호하여 시민들의 고개를 갸웃둥 하게하고 있다.

 


 
오늘 내가 장생포를 찾는 것은 화려한 현대적 고래관련 시설물을 보러 온 것이 아니다.
40여 년 전 내가 보았던 장생포의 옛 흔적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다. 
포구에 도착했다.
짐작대로 포구에는 옛 흔적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콘크리트로 뒤덮인 부두 일대에는 고래박물관, 고래해양체험관 등의 현대식

건물들과 각종 고래관련 조형물이 들어서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고, 거대한 고래바다관광여행선이 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서울대공원에서는 돌고래 재돌이를 바다로 돌려보냈다는데....
고래도시 울산은 일본으로부터 비싼 돌고래를 사 들여와 와 어린이를 상대로 해양생태체험이라 하면서 돌고래 쇼를 하니

조금은 민망스럽기도 하다.


발길을 돌려 장생포 후미진 곳을 찾아 간다.
혹시 옛 흔적들이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부두 선창가에 즐비했던 고래해체 작업장은 하나도 찾아 볼 수 없고 겨우 낡은 건물 몇 체가 남아 옛 흔적을 말해 주듯 아직도

그 자리에서 빈약한 고래 고기를 팔고 있다. 그러고 보니 길가 식당가에는고래 고기 파는 식당이 여럿 보인다.
식당 안쪽 진열장엔 먹음직스러운(?) 고래 고기가 접시에 담겨져 있다.
사진한방 찍으려고 카메라를 대니 식당 아주머니 한 분이 내 앞을 가로막으며 소리친다.

 

“안 돼요, 사진 찍으면 안 돼요.”
“사 먹으면 몰라도..."

 

고약하다.

 

 


◆고래 고기

 


울산에서 고래 고기 식당은 여럿 있고 비교적 비싼 편이다.
고래 고기 애호가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한 남자들이다.
생선회보다 훨씬 비싸지만 애호가 들은 자주 고래 고기를 사 먹는다.
맛이 일품이라는데 나는 개고기처럼 고래 고기도 먹지 않는다.
고래 삶는 역한 냄새에 대한 옛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래도 안 잡는데 고래 고기는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일본이나 동남아, 러시아 등에서 수입해 온 다고 한다.
그리고 조업 중 죽은 고래 사체가 어망에 걸린 것을 유통하기도 하고....

 

 
◆포경금지 협약


현재 포경은 국제포경협약에 의해 1986년부터 금지 되어 있다.
국제 포경 위원회(IWC, International Whaling Commission)는 고래에 관한 자원연구조사 및 보호조치를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이다.
본부는 영국의 케임브리지에 있으며, 전 세계 국가가 모두 가입한 것이 아니고, 2011년 현재 89개국이 가입하여 한국도 1978년도에

가입하였다.


약삭빠른 일본은 포경금지 국가로 완전 가입한 것이 아니고 실험 등 필요에 따라 고래를 잡을 수 있는 나라로 분류 되어 있다 한다.
근래 한국도 일본처럼 일부 울산의 포경관련 단체에서 기구 탈퇴를 주장, 이를 행정 당국 에서 수용 영국 본부에 탈퇴 신청을 하려

했으나 좋지 않은 여론에 밀려 없던 일로 처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만약 탈퇴할 경우는 국제적으로 고래 미 보호 국으로 낙인

찍힐까 우려 되어 차마 공식적으로 탈퇴 요구를 못 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울산은 예부터 고래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멀게는 선사시대부터 이고 그 증거는 반구대 암각화가 말해 주고 있고, 가깝게는 19세기 이 후 근대에 들어서 미국, 프랑스, 영국,

일본 등 소위 포경 선진 국가들이 고래잡이 각축장으로 벌린 곳이 바로 울산 앞 바다이다.
특히 일본강점기 동안 울산 앞 바다 고래를 깡그리 일본으로 잡아간 사실은 고래의 멸종 위기를 더욱 부채질 했다.


 

 

 

 

울산 앞 바다는 전 세계적으로 고래의 회유해면(廻遊海面)으로 유명한 곳이다.
회유해면이란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이동하는 필수 경로를 말한다.
그래서 울산의 장생포는 고래와 인연이 깊어 고래마을이 된 것이다.
고래 고기를 안 팔고 먹지 않아도 울산의 고래관광 사업은 희망이 있다고 본다.
그 희망의 꿈은 고래를 우리의 진정한 친구로 받아 줄 때 이루어 질 것이다.

 

 

◆흔적을 찾아서~

 

 

 

 

석유화학단지가 보이는 해안가에는 크고 작은 철선들이 닻을 내리든가 부두 가에 밧줄에 묶여 정박해 있지만

옛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부둣가에는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도록 철책이 쳐져 있다. 고래관광선, 해군과 해경의

고속정 함정들이 자리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부두가 한 쪽에 몇 체의 낡은 건물이 옛 흔적을 희미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고래 고기 간판이 걸려 있으니 아주 문은 닫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다시 옛 흔적을 찾아 포구 안쪽 뒷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학교가 보인다.


 


장생포 초등학교이다. 
바로 40여 년 전에 내가 보았던 장생포의 유일한 그 학교 이다.
학교 건물은 페인팅 하여 깨끗했지만 건물 모습은 옛 그 모습이다.
반가운 마음으로 교정 안으로 들어서니 어디서 나타났는지 검은 점퍼의  경비원이 나타나서 무엇 하려 들어왔냐 하면서 당장 나가라 한다.
경비원의 서슬에 겁이나 재빨리 학교를 빠져 나오고 만다. 근래 들어 학교 폭력이나 성폭력 범죄가 교정 안에서 자주 일어나다 보니
학교 측에서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니 나를 쫒아낸 경비원이 야박하다고 서운해 할 수도 없다.
학교 정문으로 오르는 계단 위에는 이순신 장군과 신사임당 동상도 보인다.
남학생은 이순신 장군처럼 강하고 충직하게 나라를 사랑하라는 것일 게고....
여학생은 신사임당처럼 현모양처로 이율곡 같은 훌륭한 자식을 교육하라는
깊은 뜻이 담긴 동상이 아닌가 생각 든다.


한 때는 학생 수가 2,000명에 이르렀단다.
그러나 지금은 겨우 6.70명 뿐 이라니.....
그래도 학교 문을 닫지 않는 것만이라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다른 뒷골목으로 들어가 본다.
거기에 초라한 마을 집들이 4,50년 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겨우 한 두 사람이 다닐 정도의 골목마다 새로 생긴 도로 명 주소 표지판이 대문마다 붙어 있으니 그래도 마을의 명맥은 유지하고 있는 듯 했다.
마침 작은 텃밭에서 상추를 뜯고 계시는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여기 사신지 오래 되셨나요?”


할머니가 대답을 하신다.


“음, 한 50년 쯤 됐나....”
“내가 장생포에 시집올 때부터 살았으니....”
“할머니, 그 땐 장생포가 어땐나요?”
“아주 좋았었지, 삼시 세끼 고래고기를 달고 살았으니깐....”
“일찍 죽어버린 우리 서방님도 그때 포경선 선원 이었다오”


할머니의 주름진 얼굴에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이 되살아 나 보인다.


“할머니 여기서 누구랑 사세요?”
“혼자 살제....”
“자제분들은....”
“안에서 살지, 시내 큰 아파트에서 살아, 큰애는 서울서 살고....”
“혼자 외롭지 않으세요?”
“외롭지, 하지만 어쩌겠수, 여기를 떠날 수가 없으니....”


장생포 포경선 선원에게 시집온 할머니의 예뻤을 새색시 모습을 잠시
머릿속에 그려본다. 할머니가 상추를 한 움큼 쥐고 일어나신다.
그러나 할머니 허리는 거의 45도 쯤으로 굽어 있다.


“할머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세요.”


나도 늙었지만 할머니는 더 늙으셨다.
할머니 같은 장생포의 산 증인들이 얼마나 남았으며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무상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간다.

 

 

 

 

또 다른 골목길을 찾아 이집 저집을 기웃거려 본다.
길은 집에서 집으로 이어졌지만 골목길의 끝은 항상 빈집으로 끝이 났다.
사람이 떠난 폐가이다.


장생포와 인접해 있는 매암동 일대는 옛 마을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크고 작은 공장이 빼곡히 들어 앉아 있다. 장생포 마을 너머에

지금 한창 건설 중인 울산대교 거대한 현수교 주탑이 시야에 들어온다.
울산항만을 횡단하여 현대의 왕국이라 불리는 방어진으로 건너가는 다리이다.
현수교 교각이 골리앗처럼 바다 가운데 양쪽으로 우뚝 서 있다.
울산대교는 울산의 랜드 마크가 될 것이라니 기대가 되지만.....
약 5,500억이라는 엄청난 돈을 들여 별로 필요도 없을 것 같은(?) 다리를 왜 놓는 것인지 아직은 수긍이 안 간다.
다리는 유료 통행으로 2015년에 준공 한단다.


 

 


지금 장생포에 남아 있는 옛 흔적들이 너무 미미하다.
그나마도 모두 개발에 밀려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조금 위안이 되는 소식도 전해 온다.
울산시(남구)가 2014년까지 장생포에 ‘고래문화마을’을 조성하여 5,6,70년대 장생포의

옛 모습을 재현해 놓겠다고 발표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순전히 돈벌이 관광 목적으로 만든다면 이 또한 삼갈 일이다.
고래를 잡는 문화마을이 아니라 진정 고래를 사랑하는 마을로
재현되기를 바란다.

 

 
석유화학단지 공장 지대를 뚫고 장생포를 벗어난다.
나의 젊었을 때 추억이 담긴 장생포는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집에 돌아와 옛 앨범을 뒤적인다.
거기에 40여 년 전의 장생포의 옛 모습이 희미하게 담겨 져 있었다.
지금 나의 아내와 한창 열애에 빠져 있던 장생포의 사진도 있다.


 

 


현대적 장생포 그리고 추억의 장생포.... 
모두가 무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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