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팔공산, 인종의 태실 이야기~

migiroo 2014. 2. 7. 22:12

>2014.2.5

 

팔공산, 인종의 태실 이야기~

 

  -제위 기간 불과 9개월짜리 조선의 12대 왕~    

  -인종의 태실은 왜 그토록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몄는가?

  -조선 태실에 가한 일제의 만행


 
오랜만에 겨울 팔공산에 오른다.
산은 봄, 여름, 가을 산도 좋지만 겨울 산 또한 좋다. 
겨울 산은 텅 빔이 좋고, 나목(裸木)으로 변한 숲들의 쓸쓸함과 고독이 좋다.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버린 무소유의 겨울 산.....
그 고독한 적요(寂寥)의 겨울 산에 들어가 잠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속세의 스트레스를 푸는 한 방편이기도 하다.

 

 

 

 

 

은해사 일주문이 너무 크다.
일주문 기둥이 일주(一株) 아니고 줄지어 서 있는 열주문(列柱門)이다.
은해사는 왜 산문을 이렇게 크게 지었을까?
대찰로서의 권위 때문일까?
입장료 3,000원이 조금은 무겁다.


은해사를 지나치고 백홍암도 지나친다.
그리고 포장길을 버리고 가파른 능선 길로 오른다.
가파른 고개를 몇 개 넘자 독야청청 서 있는 만년송 앞에 선다.
거대한 바위를 뚫고 당당히 서 있는 소나무....

 

 

 

 

바위와 소나무의 질긴 생명력에 경이로움이 절로 솟아난다.

인간들이 아무리 위대하다 한들 이 소나무 앞에서는 고개가 숙여 진다.육중한 바위 속에 뿌리를 내리고 당당히 서있는 노송의 밑둥이 생명의 원천인 불뚝 솟아 있는 남근의 힘찬 정기를 느낀다.


그리고 자연의 힘에 덜컥 겁이 나 만년송 앞에 엎드려 절을 올린다.

경이롭고 두렵기 때문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너무 많은 등산객들이 만지고, 사진 찍는 다고 올라 타고,

마구 흔들어 만년송이 죽지나 않을까 걱정 되기 때문이다.

 

 

 

 

깎아지른 듯 한 절벽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중암암(中巖庵)을
들러보고 하산 길에 인종의 태실이 있는 태실봉을 향한다.

 

 

●팔공산 인종 태실

 

 

 

 

 

팔공산 자락 영천 치일리 태실봉에는 조선의 12대 왕 인종의 태실이 있다.
인종의 태실은 조선 왕실 태실 중에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장엄하게 장식했다.
그러나 정작 태 무덤에 있어야 할 태반이 없는 빈 태실이다.
인종의 태반은 일제강점기 때 일제에 의하여 태항리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한 구석으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태 무덤은 오랫동안 방치하다 주변에 흩어진 석 부재들을 수습하여
근년에 복원해 놓은 태실지(胎室址) 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태반이 서삼릉으로 옮겨 진 걸까?
여기에는 간교한 일제의 기막힌 만행이 숨어져 있다.
일제는 전국에 있는 태실을 관리하기가 어렵다는 명분으로 인종의 태반뿐만 아니라
태조 이성계를 비롯한 모든 조선 왕실의 태실을 파헤쳐 태반을 꺼내 서삼릉으로
옮겨 몽땅 한 자리에 안치했다.
물론 이는 일제의 간교한 계획 하에 이루어진 만행이었다.
전국 명산의 명당지에 조성된 태실을 파헤쳐 쇠말뚝을 박아 조선의 정기를 끓고
왕실의 권위를 폄훼하기 위한 파렴치한 행위였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서삼릉은 중종의 정릉, 인종의 효릉, 철종의 예릉 등 삼릉을 안치한 능역이다.
이 삼릉 한 구석에 조선의 역대 왕족들의 태실을 몽땅 한 곳에 모아
시멘트 대좌에 획일적으로 똑 같은 태비(비석)을 세우고 비명에 일본의 연호를
새기고, 담장이나 출입문 등을 일본식 구조물로 설치하였다.
그러다가 당국은 1995년에 와서야 비로소 일제가 설치한 일본식 정문과 담장을
걷어 내고 지금의 철책으로 울타리를 설치했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서삼릉 태실 무덤들...


서삼릉 구역에는 조선왕실 태실 54기가 몽땅 똑 같은 모양으로 봉안되어 있다.
마치 국립묘지에 줄지어 안장된 묘역처럼 말이다.

 

 

 

 

 

조선왕실의 태실은 전국 명산에 위치한 풍수상 명당을 택하여 안장했다.
그리고 태실을 화강암 석재를 장엄한 문양으로 조각하여 장식했다.
그런데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이런 태실을 파헤쳐 태반을 꺼내 지금의
서삼릉으로 옮겼으니 이것은 우리 문화의 침탈이고 맥을 끊기 위한 일제의
흉악한 만행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더 기막힌 것은 당국의 처사이다.
서삼릉 태실을 비공개 지역으로 특별한 경우에만 일반에게 공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실의 실상을 일반인 들이 보고 일제의 만행을 되새기는 역사 체험의 현장으로
활용하지 않고 문을 꼭꼭 잠그고 있는 것은 일제의 흉악한 만행을 감추겠다는 것인지
당국의 처사가 지극히 못 마땅하다.

 

 

●영천치일리 인종태실 (永川治日里 仁宗胎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50호

 

 

 

 

 

인종태실은 조선 중종 16년(1521)에 조성되었다.
그리고 1928년에 일제가 전국 각지의 54기의 태실과 함게 서삼릉 옮겼다.
이때 옮겨진 것은 인종의 태실은 태항아리, 지석 1점 등이다.


인종태실은 조선 왕실 태실 중에 그 규모가 가장 크고
각종 석조물의 장식이 화려하며 웅장하다.

 

11

 

 

 

인종의 태실지는 은해사에서 백흥암 쪽으로 가다보면 태실봉이 있는데
그 능선 길에 위치해 있다. 
인종 태실 비신 앞면에는 '인종대왕태실(仁宗大王胎室)'이라 새겨져 있고,
비석 뒷면에는 '가정 25년 5월 일건(嘉靖二十五年五月日建)'이라 새겨져 있었다.
가정 25년은 1546년을 말한다.
그래서 인종 태실은 그 조성 년대가 확실한 태실이다.


 

 

 

 

 

●인종은 어떤 왕이었던가?


인종이 어떤 왕이었기에 조선 왕실은 이토록 화려한 태실을 조성했는가?
인종은 조선의 12대 왕으로 역대 왕 중에 재위 기간이 불과 9개월 밖에 안 된다.
그러나 후대 사람들은 그를 성군으로 추앙하여 왕릉은 물론 태실까지도
화려하고 장엄하게 조성했다.
왜 그랬을까?


인종은 중종의 장남으로 이름은 호, 자는 천윤이다.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어 무려 25년간이나 세자의 자리에 있다가
중종이 죽자 1544년 조선의 12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인종은 성품이 조용하고 욕심이 적었으며,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깊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하였다.


인종은 중종과 영돈녕부사 윤여필의 딸인 장경왕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3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는 등 어려서부터 총명하기에 이를 때가 없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가 산후병으로 
죽는 바람에 세자 시절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했다.


인종이 중종의 장남 이긴 했지만 사실 태어나기는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에게서 태어난 복성군이 인종 보다 먼저 태어났다.
그러나 정실 왕비의 소생만이 정통적 후계자로 인정받는 조선의 법통상
인종이 중종의 장남으로 간주 됐다. 
그로 인해 경빈은 자신의 소생 복성군을 왕으로 만들려고 끊임없이
세자인 인종을 괴롭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다.


중종은 인종의 생모 장경 왕후 사 후에 새로운 왕후를 맞는데 바로 그녀가
조선 역대 왕후 중에 가장 악명 높았던 문정왕후이다.
어린 세자 인종은 문정왕후를 모후로 알고 그녀에 의해 길러졌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처음엔 세자인 인종을 감싸고 잘 길렀으나 그녀의 소생
경원대군(후에 명종)을 낳자 차츰 세자인 인종을 멀리하고
끝내는 갖은 모함과  노골적인 해코지로 세자를 제거 하려고 몰두 했다.
몰론 자신의 소생인 경원대군을 세자로 삼기 위함이었다.


이런 가운데 세자궁에 의문의 화재사건이 일어났다.
이 화재로 인종은 후궁 정씨(정철의 누나)에 의해서 구사일생 구출됐다.
화재는 물론 문정왕후가 인종을 제거하기 위한 교묘한 술책이었다.
그러나 물적 증거가 모호하여 이 사건은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인종의 삶과 인간성


드디어 중종이 죽은 후 인종이 왕위에 오른다.
인종의 나이 31세, 세자 25년 만에 왕이 되었다.


인종은 세자시절 동궁으로 있을 때는 화려한 옷을 입은 시녀를 궁 밖으로
내쫓을 만큼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해,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어려서 죽자 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깊어 병을 얻기도 했다.
복성군(福城君)의 모후 경빈이 교만으로 인해 귀양 가게 되었을 때,
이를 석방할 것을 간절히 원하는 소를 올리기도 했다.
이에 중종도 그의 우애 깊음에 감복해 복성군의 작위를 다시 주었다고 한다.
중종의 병환이 위독할 때는 반드시 먼저 약의 맛을 보고, 손수 잠자리를 살폈다.
부왕의 병환이 더욱 위중하자 침식을 잊고 간병에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이렇듯 인종은 성격이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등 
유학에 바탕을 둔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시키는 등
중종 때 좌절된 도학정치를 재현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인종은 몸이 매우 허약했다.
그런 와중에 계모인 문정왕후의 도가 넘은 악행과 압박 때문에
정신과 육신에 더욱 고초를 당하며 살았다.
문정왕후는 노골적으로 인종을 제거하려고 수차레나 음모를 꾸몄다.

 
심지어는 임금 앞에 나가 자신과 자신의 소생 경원대군을 가르키며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거냐. 죽이려거든 지금 죽여라."라고
포악을 부리기도 했다고 전한다.
그래도 인종은 극진한 마음으로 문정왕후를 해치지 않고 모후로서
모시고 경원대군을 친 동생처럼 대하곤 했다.
그러나 인종은 결국 문정왕후의 포악함을 견디지 못해
왕위에 오른지 9개월 만에 죽고 마는데 독살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인종이 죽게 된 진짜 원인은 상례 도중 너무 단식을 오래 하여
거식증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중종이 병에 걸려 앓아 누웠을 때 침식을 거르며 간호에 몰두했고
즉위 이후에도 5개월 동안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단식한 뒤 수많은
왕실 제사와 정무에 시달리는 등, 과로 때문에 죽었다고 실록은 전한다.


드디어 1545년, 인종은 죽음을 직전에 문정왕후의 소생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러주니 그가 바로 조선의 13대 왕 명종(明宗)이다.
명종이 왕위에 오른 때는 불과 12세, 드디어 명종의 시대가 아닌 문정왕후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바로 명종 뒤에서 수렴청정을 하기 시작 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조선은 문정왕후라는 여인의 손에 놀아 나기 시작했다.

문정왕후는 인종의 계모로서 인종에게 악행을 저절렀지만

명종의 수렴청정 시기에는 승려 보우와 함께 꺼져가는 조선의 불교을 일으키기도 했다.

문정왕후에 대해서는 다음 이야기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한다.


야사에는 명의 사신이 왔을 때 인종을 보고 평하기를 
"조선의 왕은 공자에 버금가는 성인이다.
그런데 조선은 땅이 좁아 성인이 태어날 수 없다.
그러니 곧 얼마 안가 왕은 죽을 것이다."
라고 예언했다고 전한다.


인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러 받은 명종은 그래도 착했던지 형인 인종을
정중히 대했다 한다. 명종 원년에는 인종의 태실을 장엄하게 조성했다니 
어머니 문정왕후 보다 사람 됨됨이가 훨씬 나았던 모양이다.

 

 

●서삼릉 인종의 효릉(孝陵)

 

 

 

 

 

인종은 중전 인성왕후와 나란히 묻히니 서삼릉의 효릉이 바로 인종의 무덤이다.
얼마나 효심이 지극했으면 무덤마저 묘호를 효릉(孝陵)이라 지었을까.


그래서 인종의 태실을 그렇게 화려하고 장엄하게 꾸민 것일까
팔공산을 내려오면서 인종의 삶과  짧은 치세에 가슴을 여민다.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은 희릉, 효릉, 예릉을 말한다.
희릉(禧陵)은 조선 11대 왕 중종과 그의 부인 장경왕후의 무덤이고.
효릉(孝陵)은 12대 왕 인종과 그의 부인 인성왕후의 무덤이며,
예릉(睿陵)은 25대 왕 철종과 그의 부인 철인왕후의 무덤이다.

 

 

●인종태실의 수호사찰 팔공산 은해사

 

 

 

 

 

하산 길에 은해사에 들른다.
팔공산 은해사는 인종태실의 수호사찰이란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인종태실과는 거리감이 있다.
엄청나게 큰 주차장....
엄청나게 큰 일주문....
그리고 엄청나게 큰 사찰의 규모 앞에 위압감이 느꼈기 때문이다.
휘휘휘~
대충 한 바퀴 경내를 둘러보고 서둘러 나온다.

 

 

 

 

 


어느덧 해는 서산에 지고 서서히 어둠이 찾아 든다.
팔공산의 해는 유난히도 짧다.
인종의 기구한 삶과 그의 짧은 치세를 생각하니 왠지 가슴이 울컥해 진다.
여늬 왕들처럼 이복형제를 죽이고, 계모 문정왕후를 폐위시켜 쫒아 냈었더라면
아마도 그의 왕권도 강해 졌을 것이고 재위 기간도 훨씬 길었을 것이니
이렇듯 늘 어진 자와 착하고 선한 정의로운 자는 늘 불의에 당하고만 사니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듯 하다.

 

 

 

                                                  ▲은해사 극락보전의 아름다운 국화문 창호 문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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