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2.11
■조선조 무소불위 권력자 문정왕후,
과연 그녀는 누구인가?
-승려 보우는 요승이 아니고,
조선불교의 중흥을 일으킨 선승 이었다.
*아래의 글은 필자가 여기저기에서 퍼 나른 문정왕후에 대한 정보를 수집, |
●문정왕후, 그리고 조선시대의 여성들~
조선시대에서 여성들은 남존여비라는 불평등의 그늘 속에서 살았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조선시대의 정치는 왕비 또는 왕대비라는 여인들의
치마폭에서 국정이 좌지우지 되고 농락(?)당하기도 한 나라였다.
이들은 왕을 움직여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함으로서 국정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 국정 운영에 도움을 주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과오를 저질러 국정을 혼란에 빠트리기도 했다.
아래 인물들이 그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태조 이성계의 정비 신의왕후, 태종의 원경왕후, 성종의 할머니 정희왕후
그리고 세조의 며느리 소혜왕후 즉 인수대비, 연산군의 비 장녹수,
중종의 비 문정왕후, 숙종 비 장희빈 그리고 고종 황제의 명성황후 등이다.
이중 대표적인 정치적 행사를 쥐락펴락 한 여인을 꼽는 다면 단연
악명(?) 높은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 일터이다.
문정왕후 하면 먼저 왕을 대신하여 정치를 하는 수렴청정이 떠오르고,
크고 작은 악행을 많이 저지른 여인으로 인식되고 있다.
오죽하면 실록에도 그녀에 대한 비판이 실려 있을 정도이니
아무래도 문정왕후는 왕의 선정에 도움을 준 것보다는
과오를 더 많이 저지른 인물이 아닌가 싶다.
문정왕후는 65세(1565, 명종20)나이로 죽었다.
그녀의 무덤은 지금 서울 태릉선수촌의 노원구 공릉동에 위치한
그 유명한 ‘태릉’이 바로 그녀의 무덤이다.
그 어느 왕의 능 뭇지 않게 화려하고 장엄하게 조성된 그녀의 무덤만
보더라도 생전에 그녀가 얼마나 큰 권세를 휘둘렸는지 짐작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날마다 태릉선수촌에서 땀 흘리며 연습하는 운동선수들이
내지르는 기합소리에 조용히 잠들고 있지는 못할 것이니 어찌 보면
그녀의 악행(?)에 대한 자업자득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를 그렇게 막무가내로 매도 하기는 이르다.
긍정적인 측면도 많이 있었으니 말이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문정왕후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자.
문정왕후,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대의 전, 후 정치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
●문정왕후를 있게 한 연산군을 끌어낸 중종반정
1506년 폭군 연산군을 끌어낸 중종반정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연산군의 폭정을 명분으로 박원종 등이 하룻밤사이에 연산군을 쫒아 내고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중종)을 왕으로 옹립 한 사건이다.
하루아침에 왕위를 강탈당한 연산군은 강화도로 유배되고 곧 바로 죽여 버렸다.
그러니깐 신하가 왕을 끌어내고 다른 왕족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인 셈이다.
당시 파직되어 있던 전 이조참판 성희안, 지중추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등이 거사를 일으켜 중종을 왕으로 앉힌 것이 바로 중종반정이다.
●문정왕후의 출현 배경
중종의 장인은 연산군 때 좌의정이었던 신수근이다.
그런데 새로 왕이 된 중종의 첫 왕비가 바로 신수근의 여동생인 신씨였다.
그러니깐 신수근은 중종의 처남였던 것이다.
반정세력으로 봐서는 신수근은 연산군 편이고 그의 여동생 신씨가
중종의 왕비가 될 판이니 이를 막고자 했다.
그래서 반정세력들은 중종을 압박하여 왕비 신씨를 폐위시켜 쫒아 내고,
중종의 처남인 신수근을 죽여 버렸다.
이로서 중종은 다시 비어있는 왕비를 맞았는데 이가 곧 인종의 모후 장경왕후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장경왕후는 인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7일 만에 죽고 만다.
중종은 장경왕후가 죽은 후에도 2년간이나 정비인 왕후를 다시 들이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총애하는 후궁 경빈 박씨가 있었기 때문이고, 경빈의 소생으로
복성군 왕자를 두었는데 이가 곧 중종의 장남(인종의 이복형)이었다.
그러나 복성군은 후궁의 소생이었기 때문에 중종의 실질적 장남이었지만
세자가 되지 못하고 정실인 장경왕후의 소생인 인종이 세자가 되었다.
장경왕후가 죽은 후 경빈박씨는 세자 인종을 제거하여 자신의 소생인 복성군을
세자에 앉히려고 끊임없이 계략을 꾸몄고, 그리고 비어 있는 왕후 자리에 앉으려고
했지만 후궁이 정실이 될 수 없다는 조정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인종 제거 계략이 탄로나 유배되고 만다.
신하들 중 이미 폐비가 되어 사가로 나가 있는 중종의 첫 번째 부인 신씨를
왕후로 복위 시키려 했지만 결국 이마저도 반대파에 밀려 이루어 지지 않는다.
이에 중종은 할 수 없이 장경왕후 사 후 3년 만에 정식 간택령에 의해
새 왕후를 맞는데 그녀가 바로 ‘문정왕후 윤씨’ 이다.
문정왕후는 1501년 3월 생으로 파평 윤씨 지임의 딸로 왕비로 간택 되니
그녀의 나이 17세였다.
이후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이 죽고, 인종마저 죽어 자신의 소생 경원대군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자(명종) 수렴청정으로 조정의 실권을 장악,
그로부터 무려 20여 년 간이나 국정을 전횡하게 된다.
문정왕후도 초기에는 남편 중종이 후궁의 처소를 오가도 전혀 질투하지 않고
왕비로서 처신을 잘 하면서 사기(史記) 같은 역사. 정치에 관련된 책을 읽으며
학문에도 관심을 갖는 등 바른 왕후로서 행동 했다.
문정왕후가 실로 17년 만에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경원대군이고,
세자(인종)나이 20세 성년이 되는 해이다.
바른 왕후였던 문정왕후가 행동이 돌변 한 것은 이때부터 이다.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만들기 위해 지금의 세자(인종)을 제거하기 위하여
동생 윤원로와 윤원형을 앞세워 은밀히 음모를 꾸몄고,
이것이 세자의 외숙 윤임을 자극하여 두 세력이 대립하게 되었다.
이른바 대윤(윤임 일파)과 소윤(윤원형일파)의 싸움이었다.
대윤(大尹)은 세자의 어머니인 장경왕후 오빠인 윤임이 중심된 일파이고,
소윤(小尹)은 문정왕후의 동생인 윤원형이 중심이 된 일파이다
그러나 이미 죽은 장경왕후의 일파인 대윤은 힘이 부족했다.
문정왕후의 소윤 일파는 먼저 중종이 총애하는 경빈 박씨를 세자를
저주하였다는 혐의를 씌워 제거하였다.
그리고 소윤일파는 문정왕후에 큰 걸림돌 이었던 당대 최고 권신이었던
김안로를 문정왕후를 폐위시키려 했다고 음모하여 사사시켜 버렸다.
또한 세자를 제거하기위해 중종38년(1543) 1월 17일 새벽에 세자 침전에
불을 질렀으나 다행히 귀인 정씨가 세자를 구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중종은 이 사건을 단순 실화사건으로 축소하여 흐지부지 시켜 버린다.
●인종과 문정왕후 그 끝없는 악연
중종이 죽자 드디어 인종이 29세로 왕이 되었다.
그러나 계모 문정왕후의 인종 제거 음모는 꾸준히 진행 됐다.
워낙 성품이 온화하고 효심이 지극했던 인종은 문정왕후를
친 어머니라 여기고 그녀를 두둔하고 용서했다.
오죽했으면 인종은 노골적으로 문정왕후에게 왕위를 동생 경원대군에게
물려주겠으니 자신을 더 이상 음해하지 말라고 까지 했다.
문정왕후는 세자 인종을 죽이기 위해서 갖은 수단을 다 동원했는데
쥐꼬리에 불을 붙여 동궁전을 방화하기도 했다.
그리고 소위 '작서(灼鼠)의 변'이라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는데 이는
1527년(중종24) 2월 세자 생일에 쥐를 잡아 사지와 꼬리를 가르고, 입 ·귀 ·눈을
불로 지져서 동궁의 북정(北庭) 은행나무에 걸어 세자를 저주한 사건을 말한다.
김안로 등은 이 사건을 복성군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경빈 박씨의 짓이라 누명을
씌워 경빈과 복성군의 작호(爵號)를 박탈, 서인으로 강등 시키고는 1533년에
두 모자는 처형해 버렸다. (※1541년에 이 ‘격서의 변’ 사건을 조작한 자가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라는 것이 밝혀져 경빈과 복성군은 신원되었다.)
하지만 중종은 세자 모함의 배후로 문정왕후가 거론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이러한 분란이 생긴 원인은 세자(인종)에게 후사가 없었기 때문이었는데
소윤일파는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만일 세자에게 아들이 있었다면 왕위는 장자 계승이므로 경원대군이 거론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세자의 나이 서른이 넘도록 정비인 인성왕후 박씨와 후궁 귀인 정씨 모두 후손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에 문정왕후 일파는 세자를 경원대군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끊임없이 중종에게 간하기도 했다.
중종이 재위 39년 11월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대윤과 소윤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 즉 소윤은
인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왕위를 찬탈한 인물이라고 여겼다. 소윤의 주장은 문정왕후
윤씨가 정실 왕비이니 그녀의 소생인 경원대군이 세자가 되고
중종 다음으로 왕위를 물려받아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인종은 효심이 지극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록 계모였지만 문정왕후를 깍듯이 어머니로 모셨으며 그녀의 동생인 윤원형을 공조참판으로 임명까지 했다.
인종의 이러한 지극한 효심이 오히려 포악한 문정왕후와 소윤일파를 득세 시키는
결과를 초래 인종 제거 음모를 끊임없이 꾸미게 한 꼴이 됐다.
인종이 왕이 되고 즉각적으로 문정왕후의 정치개입을 거두게 하고 소윤일파를
강력하게 견제했었더라면 아마도 인종의 치세는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인종의 죽음에 대한 의혹
어찌 된 일인지 인종은 오랜 세자 시절부터 건강 상태가 심히 병약했었던 모양이다.
인종의 병세가 허약함은 실록에도 기록될 정도였으니 육신도 허약하고 계모 문정왕후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대한 정신적 스트레스도 상당하지 않았나 싶다.
이런 상황에서 인종의 죽음에 대한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은 인종이 죽기 한 달 전인 재위 1년(1544) 되던 어느 날 이었다.
몸져누워 있는 인종은 문정왕후의 병문안을 받는다.
그녀는 다과 등 음식을 준비해서 인종을 전례 없이 환대하며 대접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사흘 뒤 인종은 설사증세의 이질을 앓기 시작한다.
그리고 며칠 지나 인종의 병세가 잠시 호전의 기미를 보이다가 다시 위중해 진다.
그리고 며칠 뒤 인종은 일어나지 못하고 끝내 승하하고 만다.
인종의 죽음에 대한 어의들의 진단은 부왕 중종의 죽음에 크게 상심해 심신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뱃속의 비위가 손상, 사망에 이른 직접적 원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과연 그런 진단이 사실일까?
비장과 위는 모두 음식물과 직접적 원인으로 손상 되는 것이고
슬픔 같은 정신적인 스트레스로 뱃속의 장기가 갑자기 손상되는 것이 아니며
독극물 같은 음식물을 취했을 경우 가장 먼저 파괴되는 곳이 장기라는 것을
당시의 어의들도 잘 알 수 있었을 터이나 보이지 않은 힘에 의해서
거짓 진단을 내린 것이었다는 것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당시 많은 사람들의 판단은 인종의 죽음에 의문을 갖고 사망의 직접적인
원인은 음식에 들어 있는 독극물일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이 문정왕후의 계략이라는 물리적 증거를 찾지
못했으니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인종의 편은 너무 미약했고 문정왕후의 편은
막강했기 때문에 어찌 증거를 찾을 수가 있었겠는가.
문정왕후는 인종의 병문안을 위해서 세 번의 소동을 일으켰는데 모두 무산되었다.
당시 궁궐 법도 상 과부인 문정왕후는 궐 밖 출입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소생인 의혜공주의 사가 집에서 기거하면서 인종의 병구완을
하겠다고 했다. 이것은 후일 인종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질지도 모르는 의혹에서
벗어나고자 일반 백성들에게 인종의 중병 사실을 알리려고 했던 것이다.
특히 세자시절 부터 문정왕후와의 사이가 나빴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로
재위 1년 만에 갑자기 죽는다면 모든 혐의는 자신에게 쏠릴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러나 아무리 문정왕후가 시치미를 떼도 '인종의 독살설'은 여러 종류의 야사를
통해서 퍼졌으며 일반백성들은 사실로 받아들였다.
어찌 됐던 인종의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경원대군이 명종으로 즉위했다.
당시 나이가 12살 밖에 안 되었으므로 왕의 모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
명분을 제공했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에 대한 평가
문정왕후는 명종 뒤에서 수렴청정을 시작하자마자 소윤의 우두머리 이자
자신의 동생인 윤원형과 함께 윤임의 대윤일파를 제거해 버렸다.
대윤일파에 대한 숙청 명분은 참으로 기막힌 조작으로 시작되었다.
윤임이 인종의 왕비인 인성 왕후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짜로 써서 가지고
가다가 고의로 실수한양 가장해 궐내에 떨어뜨렸다.
편지의 내용은 윤임이 인성왕후와 모의해서 왕위를 중종의 여섯째아들인
봉성군에게 옮기려 한다는 내용 이었다. 물론 조작이고 모함이었다.
이로 인해 봉성군은 귀양을 갔고 윤임을 비롯한 대윤일파들을 모두 제거 당했다.
이 사건은 인종의 장례 중에 단행된 문정왕후의 모략이었다.
문정왕후의 이 사건으로 민심의 동요가 일어나 사림파 등이 문정왕후와 소윤일파의
행태을 비난하고 반대를 하자 문정왕후는 드디어 윤임을 비롯한 대윤일파와 모든
사림파를 귀양 보내거나 참형시켜 버리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문정왕후의 수렴청정 기간은 명종이 성인이 되어 친정으로 들어 갈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8년간이지만 그 뒤에도 그녀의 국정개입은 계속되어 사실상
무려 20여 년 간이나 수렴청정을 했다.
이러한 기간 중에 일일이 거명하기도 어려울 만치 수많은 정치적 박해가 일어났다.
이렇게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은 조선 정치사에서 두고두고 사대부들의 비난거리였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적 평가를 떠나 문정왕후의 또 다른 치세(?)가 있었으니
바로 숭유억불 조선시대에 꺼져 갔던 불교를 중흥 시켰다는 점이다.
아무튼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사관은 실록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하니
그녀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얼마나 컸나를 미루어 짐작할 수가 있다.
“종사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일 뿐이다.”
“윤비(문정왕후)는 사직(社稷)의 죄인이다.”
●문정왕후와 승려 보우의 불교 중흥
문정왕후 하면 또 다른 면이 떠오르는 것이 있다.
바로 조선시대의 ‘불교중흥’이다.
그리고 ‘보우’라는 승려가 그 중심에 있다.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때는 불교가 국교와 다름없었으니 거론 할 필요도 없지만
조선시대야말로 유교가 득세하고 불교를 탄압하는 ‘숭유억불’의 나라이었으니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그나마 불교 중흥을 꽤했으니 문정왕후와 보우는 불교계의
입장에서 보면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꺼져 가는 불교의 불씨를 다시 일으킨 오늘날로 보면 문정왕후와 보우는
한국 불교사에서 고마운 존재로 여겨야 될지도 모른다.
숭유억불정책의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불교역사의 최대 시련기였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성종에서 중종 대까지는 그 탄압이 더욱 극심하여 불교의 맥이 거의
끊길 번한 시기였었다. 다행히 명종 때에 이르러 정권을 장악했던 문정왕후에
의하여 새로운 불교중흥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문정왕후와 보우스님을
무조건 부정적 측면으로만 봐서는 안 될 듯 싶다.
●조선 왕실과 문정왕후의 불교
유교의 나라 조선이었지만 왕실과 민초들은 암암리에 불교를 믿는 자가 많았다.
특히 왕비를 비롯한 왕실 여성들에게서는 독실한 불교신자가 많았다.
심지어는 세종대왕을 비롯한 세조 등 역대 왕까지도 속으로는 불교에 매달려 살았다.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천년을 이어온 불교 신앙이 어찌 금방 없어지겠는가.
나라 이름이 조선으로 바뀌었을 뿐 사람들은 여전히 음지에서 불교를 놓지 못했다.
왕실 여성 문정왕후 역시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남자들은 유교와 성리학에 매달렸지만 조선의 여성들은 기복 신앙화 된 부처님
섬김을 쉽사리 놓을 수가 없었다. 문정왕후는 집권하자마자 막강한 권력의 힘으로
조선의 불교를 음지에서 양지로 끌어내 보우라는 걸출한 승려를 봉은사 주지로 삼고
본격적으로 불교 중흥을 꽤한다.
문정왕후는 그동안 폐지 됐던 승과를 부활시키고, 봉은사(奉恩寺)에 선종을 두고
봉선사에 교종을 두게 하여 선·교 양종을 부활시켰다.
한편 전국의 300여 사찰을 국가공인 사찰로 부활시키고, 승려가 출가했을 때 국가가
허가증을 발급하여 신분을 공인해 주는 도첩제(度牒制)를 다시 시행, 2년 여 년 동안
5000여 명의 승려를 뽑는 한편, 폐지 됐던 승과시를 부활시켜 훌륭한 승려를
배출했는데 그 대표적 역사적 인물이 바로 휴정(休靜)서산(西山)대사 이고,
유정(惟政)사명(泗溟)대사 이다.
이때의 승려들은 명종 이 후 선조 대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 승군으로서 위기의
나라를 구하는 주체가 됐으니 문정왕후와 보우의 불교 중흥 정책을 부정적으로
인식 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이점 일 것이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승려 보우를 병조판서 직에 제수하는 등 지나친 불교치중으로
조정 대신들의 불만을 사는 등 성리학자들의 강한 반발을 초래. 사후 그녀에 대한
악평의 요인이 되기도 했으니 과유불급이라 아무리 좋은 일이라해도 정도가
지나침은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닌듯 싶다.
●문정왕후의 최후
명종 즉위 20년, 드디어 문정왕후가 생을 다하게 된다.
한 때 조선을 20년 간 실질적으로 통치한 그녀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회암사에서 큰 재를 위해 목욕재계 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녀가 죽자 예상한 대로 승려 보우는 요승(妖僧)으로 매도되어 제주도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처참하게 죽고 마니 이로 인하여 안타깝게도 불교는 다시 수난의 시대로
접어들어 수많은 사찰과 승려들이 핍박을 받기 시작한다..
죽은 문정왕후는 남편 중종 옆에 묻히지 못했다.
아들 명종은 어머니 능을 지금의 서울 공릉동에 조성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 서울에서 유명한 '태릉'이다.
어머니가 죽고 난 후 명종은 문정왕후의 무덤을 단릉(單陵)으로 화려하고 장엄하게 조성했다.
다행히 명종은 어머니와는 달리 인종처럼 착하고 선한 임금이었다고 전한다.
문정왕후는 후대에 대체적으로 정권을 휘두른 악후(惡后)로 평가 절하 하지만
남성중심의 조선사회에서 여자의 몸으로 정권을 잡고 불교를 중흥 시키는 등
탁월한 전략가이자 정치가로 평가하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 걸 보면 무조건
부정적으로만 평가해서는 안 될 듯 싶다.
●승려 보우(普雨)는 어떤 인물인가.
문정왕후는 조선 불교 중흥을 위한 보우의 막강한 후견인 이였다.
문정왕후는 보우를 봉은사 주지로 삼아 조선 불교를 다시 일으키려 했다.
그 결과 많은 불교적 성과를 얻기도 했지만 유교와 성리학의 조선조에서
그 열기가 오래 가지는 못했다.
보우 스님은 문정왕후가 죽자 곧 바로 땡중, 요승으로 낙인찍어 제주도로
유배시키고, 절차도 없이 제주 목사 변협에 의하여 처참하게 매를 맞아
죽는 수모를 당했다.
그러나 과연 보우가 요승이며 땡 중이었을까?
그것은 권력을 쥔 후대인들이 만든 잘못된 명분일 뿐이다.
보우 사후 400년이 지난 지금은 그를 어떤 인물로 평가 하고 있을까.
물론 불교계에서는 그를 조선시대에 단절된 불교의 맥을 오늘날 까지
잇게 한 불교의 대선사(大禪師)로 추앙하고 있다.
그가 주지로 있던 지금의 서울 강남 봉은사에는 그를 기리는 봉은탑 과
동상이 세워지고, 잘 못 인식되어 온 역사적 보우 스님에 대한 재평가를
위한 연구가 학계와 불교계에서 활발히 재조명 되고 있다.
보우의 호는 허응당(虛應堂)·나암(懶菴)이다. 15세에 금강산으로 출가,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등지에서 수행하였다.
1548년(명종3) 문정황후의 부름을 받고 봉은사 주지가 되었다.
1550년 선교양종(禪敎兩宗)을 다시 세우고,
1551년에는 도승시(度僧試)를 실시하여 도첩제도(度牒制度)를 부활시켰다.
1552년에는 승과(僧科)를 다시 설치하게 했다.
이때 배출된 인물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이다.
특히 1471년(성종 2)에는 불교 탄압이 심하여 세조(世祖)가 불경을 언해(諺解)해서
간행하기 위해 설치한 간경도감(刊經都監)을 폐지했으며, 중종 대에 이르러서는
도승시 마저 아예 없애 버렸다. 그리고 유생들은 전국의 사찰을 방화, 파괴하고
약탈하는 등의 만행을 일삼았다. 이런 시기에 보우는 출가를 하였다.
금강산의 보우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정왕후를 만나 불교의 선종과 교종을
다시 세웠다. 그리고 문정왕후와 함께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때부터 유생들의 표적이 되어 요승을 죽이라는 상소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 1565년 문정왕후가 갑자기 죽음을 맞자 드디어 보우를 배척하고
탄압하라는 상소문에 못 이겨 명종은 할 수 없이 보우의 승직을 박탈하고,
1565년에 제주도로 귀양 보내 죽게 하니 그의 나이 세수 56세(법랍 49)였다.
보우는 선교일체론(禪敎一體論)의 불교관을 갖고 있었으며, 일정설(一正說)을
주장하여 불교와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보우의 저서로는 승려들의 시문을 모은 『허응당집(虛應堂集)』상하 2권,
승려들의 법어와 잡문을 모은 『나암잡저(懶庵雜著)』1권,
조선 불교의 도량 의식의 지침서인 ‘수월도량공화불사여환빈주몽중문답
(水月道場空花佛事如幻賓主夢中問答)』1권, 중생들의 극락왕생을 위해
염불을 권장하는 『권념요록(勸念要錄)』1권 등이 있다.
보우의 무덤은 알 수가 없다.
제주도 어딘 가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흔적도 찾지 못했다.
그 당시 보우를 때려죽인 제주 목사 변협이 보우의 시신을 거두어
무덤을 만들게 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에필로그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문정왕후가 인종에게는 왜 그토록 자비롭지 못했고
갖은 사화를 일으켜 많은 정적들을 유배시키고 제거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불심(佛心) 따로, 권력욕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닌지.....
정치와 종교는 양면의 동전인가?
정치도 인간성이 하는 것, 종교는 그 인간성을 선하게 만드는 것...
결국 선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이 좋은 정치를 하는 것이고
그런 좋은 인간성은 종교로부터 나온다.
그런 진리를 문정왕후는 몰랐단 말인가.
요즘 사극 드라마에는 문정왕후가 악후(惡后)로서 묘사 되곤 하지만
만약 명종 대에 그녀의 불교 중흥 정책이 없었다면 어찌 됐을까?
명종 다음 선조 대에 발발한 임진왜란이 이순신 장군 힘만으로
승리로 이끌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든다.
사명대사나 서산대사 같은 분들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었을까?
두 대사 같은 승군들이 임진왜란 때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문정왕후와
보우 스님의 덕분이이라고 생각한 다면 잘못된 역설 일까.
나의 젊었을 한 때는 수년 동안 서울에 살았으면서 문정왕후가 묻힌
노원구 공릉동 태릉을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니 참으로 아쉽다.
중종의 무덤은 정릉으로 서울 삼성동 선정릉 구역에 있다.
인종의 능은 효릉으로 부인 인성왕후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있고,
명종의 무덤은 강릉으로 서울 공릉동 태강릉 구역에 있다.
중종의 제1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은 희릉으로 서삼릉에 홀로 있고,
제2계비인 문정왕후의 무덤은 태릉으로 그의 아들 명종의 강릉과 함께
공릉동 태강릉 구역에 있다.
여기에서 중종의 능이 9대 성종의 선릉이 있는 서울 삼성동
선정릉 구역으로 이장된 경위가 재미있다.
원래 중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에 그의 제1계비 장경왕후(인종의 모후)와
나란히 묻혔었는데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가 의도적으로 중종의 무덤만을 서울로
이장하고 서삼릉에 홀로 남게 된 장경왕후의 무덤은 희릉이라 이름 지었다.
이는 문정왕후가 자신이 죽은 후에 중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기 때문인데
그녀 사 후 조정대신들의 반대로 중종의 정릉에 합장 되지 못했다.
할 수 없이 문정왕후는 서울 공릉동에 외롭게 묻히니 바로 그게 태릉이다.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이 죽어 어머니 태릉 옆에 묻혀 태강릉이 되었으니
그녀의 소원대로 남편 중종과는 함께 묻히지 못했어도 아들 명종과 며느리
인순왕후와 같은 구역에 묻혔으니 그나마 위로를 받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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