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세종대왕 왕자태실 이야기~

migiroo 2014. 2. 12. 00:04

>2014.2.10

 

 

 

●조선의 왕 중에 누가 자식을 제일 많이 두었나?


우리 민족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세종대왕....
달리 뭐라 그분을 찬양할 말이 필요 없다.
그러나 그 분도 여색을 싫어하지 않은 듯....
부인 6명에서 무려 22명이라는 자식을 낳았다.

 

 

자식이 많으면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 할 터이지만
그것은 일반 백성들에게서나 듣는 이야기일 뿐이고
군왕이 자식이 많으면 형제간에 권력다툼으로 서로 모함하고 죽이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났으니 군왕의 다산은 결국 분란을 일으키는
요인이 되곤 했다는 사실이 역사가 잘 입증하고 있다.


조선 왕 27명 중에 가장 자식을 많이 생산한 임금은 누구일까?
세종대왕의 자식이 22명이라 하여 가장 많은 줄 알았는데.....
Best 1위는 아버지 태종이고, Best 2위는 성종 임금,
그리고 3위가 바로 세종대왕이다.


태종은 12명의 부인에게서 14남, 19녀 총 33명의 자식을 낳았고,
성종 역시 부인 12명에서 16남, 12녀 총 28명을 생산했다.
세종대왕은 부인 6명에게서 아들 18명, 딸 4명 총 22명의 자식을
얻었으나 최 다산기록은 태종과 성종에 미치지 못했다.

 
이들 임금들은 다산(多産)을 장려했던 조선시대에서 그야말로
다산(多産) 정책을 백성들에게 행동으로 보여 준 군왕들이다. 


 

●왕자가 많으면 분란이 일어났다.


그러나 왕의 다산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했다.
형제간에 권력다툼으로 싸우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세종의 위로는 아버지 태종이 형제간에 피를 묻히고 왕이 됐고,
아래로는 자신의 아들 세조가 어린 조카의 왕권을 찬탈하여 왕이 되는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을 뿐만 아니라 세종 자신도 세자였던 형 양녕대군이
폐위되는 바람에 왕위를 물러 받았으니 당신의 마음인들 오죽 불편했겠는가.

 

 

●세종대왕의 자식들...


우선 22명이나 되는 세종의 자식들부터 알아보자.
세종은 6명의 부인을 두었다.
다른 왕들에 비하여 결코 많다고도 적다고도 할 수 없다.
아무튼 부인이 많았으니 같은 남자로서 부럽기 한이 없다.
그러나 막상 부러운 마음에 앞서 어찌 그 많은 부인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찔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한명도 겨우 감당하기 어려운데 옛 날 남자들은 의학이 발달한
현대보다 훨씬 정력(?)이 좋았던 모양이다.

 
세종임금의 첫째 부인은 소헌왕후 심씨로 대군 8명, 공주 2명의 8남 2녀를 낳았다. 
그리고 둘째 부인 영빈 강씨로부터 1남, 셋째 부인 신빈 김씨로부터 무려 아들만
6명이나 얻었다.


그리고 넷째 부인 혜빈 양씨로부터 3남을 얻고, 숙원 이씨와 상침 송씨로부터
각각 옹주(딸) 1명씩을 얻으니 모두 합하여 18남 4녀, 22명의 자식을 얻었다.
(*상침(尙寢)이란 내명부의 직으로서 정6품 벼슬에 해당한다.)


아들 18명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먼저 제1부인 소헌왕후 소생으로 문종, 세조(수양대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정소공주, 정의공주 이고,
제2부인 영빈은 화의군 한 명만 낳았다.


제3부인 신빈 소생으로는 계양군, 의창군, 밀성군, 익현군, 영해군, 담양군이 있고,
그리고 제4부인 혜빈 소생으로는 한남군, 수춘군, 영풍군이 있다.
마지막으로 제5비, 6비인 숙원과 상침 송씨 소생으로 정안옹주와 정현옹주가 있다.


세종대왕께서 한글을 창제 하신다고 무진장 바쁘셨을 터인데 언제 그렇게 자식을
많이 만드셨는지 밤마다 이 부인, 저 부인 찾아다니신다고 얼마나 힘드셨을까.
ㅎㅎㅎ

 


●동생들을 죽인 형...


왕이 자식이 많다는 것이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었다고 말했다.
세종대왕도 예외는 아니었다.
당신 자신은 성군으로 존경받고 한글창제 등으로 민족의 가장 위대한
인물로 추앙 받고 있지만 정작 자식들은 권력과 왕권 다툼으로
형이 아우를 죽이고 아우가 형을 저주하는 그야말로 불행한 일들이
벌어졌으니 세종대왕도 자식 농사는 잘 못 지은 것이 아닌가 싶다.


우선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세조)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는 동생들과 조카(단종)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왕이 되기 위하여 수많은 충신들을 죽이고 조정에 많은 간신들을 두었다.
우선 세종의 3째 아들이자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을 계유정난으로 죽이고,
세종의 6째 아들 금성대군 또한 단종의 복위를 꽤했다고 처형시켜 버렸다.
결국 수양대군은 동생들과 조카를 죽이고 왕권을 거머쥐니 바로 그가
조선의 7대왕 세조이다.

 


●세종대왕 왕자 태실...

 
태실 이야기 하려다 엉뚱한 이야기로 빗나갔다.
세종대왕 왕자태실지는 경북 성주에 있다.
수년전에 답사를 하고는 다시 또 가보질 못 했다.
그 때의 기억을 더듬어 세종대왕 왕자태실 이야기를 여기저기에서
수집한 자료를 정리하여 다시 재구성하여 꾸며본다.


비교적 자식을 많이 둔 왕들도 많은데 자식들의 태실이
한 자리에 안치한 임금은 세종이 유일하다.
세종대왕의 왕자들 태실은 경북 성주 태봉에 모두 모여 있다.
풍수지리상 천하명당 자리라 하는데......
그 태실에 얽힌 이야기들을 들어 본다. 
 

 


 
세종대왕 왕자태실 묘역에는 모두 19기의 태실이 줄지어 모여 있다.
정비 소생의 수양대군을 비롯한 8기의 대군(大君)들 태실이 나란히 안치되고,
10기의 후비들 소생인 군(君)들의 태실이 배치되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맨 끝자락에 세종의 세손 단종의 태실이 끼어 있다.


그러나 이 19기의 태실에 실제 태반의 유무는 분명치 않다.
그 중 세조의 태반만이 일제가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태실 묘역으로
옮긴 것은 확인할 수 있다.
단종의 태반도 없다. 그저 일부 파괴된 태실의 석조물만 있을 뿐이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세종은 세손 단종을 너무 사랑하여 단종의 태실을
자신의 태실이 있는 경남사천 태봉에 묻었다고 하여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사천시에 있는 세종과 단종 태실터 이야기는 뒤에 다시 언급한다.

 

 

 

왕자들의 태실 앞에는 각각 이름이 새긴 태실비가 세워져 있는데,  비석의 글자가
닳아서 몇 기를 제외하곤 누구의 것인지 알아보기가 어렵다.
비문을 확실히 판독할 수 있는 것은 평원대군, 영응대군, 의창군 등인데 나머지
비석은 다행히 1977년 12월, 이곳을 보수, 정비하면서 금성대군, 화의군, 단종 등의
태실로 추정되는 자리에서 토기, 태호, 분청인화문 대접, 분청상감 연화문 등의 유물이
출토된바 태실의 주인을 알게 됐다.


세종 왕자 태실에 봉안된 19기의 태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문종(추정)·세조,·안평대군,·임영대군,·광평대군,·금성대군(추정),평원대군,·
영응대군, 한남군,·밀성군,·수춘군,·익현군,담양군, 영해군, 영풍군, 의창군,
계양군, 화의군, 단종(추정)
  

 

 

 


●세조의 태실과 태실비


세조도 세종의 아들이니 수양대군의 태실 또한 형제들 태실과 함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기막힌 사실은 세조 수양대군의 행각이다.
수양대군은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 왕이 되고나서 자신의 태실 옆에
귀부(돌거북)로 된 가봉비(加捧碑)를 왕의 태실이라 하여 추가로 설치했다.
그리고 비겁하게도 자신의 왕위 찬탈을 반대했던 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을
비롯한 다섯 왕자들의 태실을 파헤쳐 석물을 파괴해 버렸다 한다.
참으로 비정한 형이었다.
  
 

 

 

그리고 세조 자신이 세운 태실비 비문의 글자는 닳고 훼손되어 현재는 알아
볼 수가 없다. 이는 세조의 행각을 비난하는 주민들이 세조가 미워 비문의 글자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라고 전하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그러나 비문은 지워졌지만 그 원문은 기록에 남아 있으니 바로 세조 당시 예조
판서였던 홍윤성이가 세조을 극구 찬양하는 내용이다.
홍윤성이의 세조 찬양 내용이 얼마나 요사 간사스러운지 낯이 간지러워 차마
여기에 옮겨 싣지 못한다.


자신의 주군(?)를 지나치게 미화 찬양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는 듯 하다.
간신배의 전형적인 아부 수법이다. 절대 권력자 앞에서 아첨 굽실거리는 행태는
지금의 정치권이나 조선시대의 가신들이나 마찬가지로 닮았다.

   
이러한 세조의 태반도 여기에 온전히 남지 못하고 일제강점기 때 다른 왕실의
태반과 함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으로 강제 옮겨졌다.


한편 세종은 자신의 왕자태실을 수호 하는 사찰을 두었는데
바로 지금의  ‘선석사(禪石寺)’라는 사찰이다.

  

 

 

 

 

●세종의 태실지과 단종의 태실지


세종대왕의 태반 역시 원래의 태실지에서 서삼릉으로 옮겨졌다.
세종과 단종의 태실지는 엉뚱하게도 지금의 경남 사천에 안치 했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던 해인 1418년, 전국에서 가장 좋은 길지를 수소문 한 결과
당시 사천의 곤명현(昆明縣) 소곡산 자리가 천하명당이라 하여 그곳에 태실을
안치하고 이듬해인 1419년 곤명현은 이웃의 남해현과 합해 곤남군으로 승격시켜
태실을 관리하게 했다.
그리고 세종은 당신이 가장 사랑했던 원손 단종의 태실을 자신의 태실 지척에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영조 9년(1733)에 태실비를 다시 세웠다.

 

 

 

 

●임진왜란 때 파괴된 세종대왕 태실

 
세종의 태실은 불행하게도 한 차례 커다란 수난을 겪게 된다.
바로 정유재란 때에 왜구들이 세종 태실지를 크게 훼손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란이 끝나고 선조는 세종 태실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다시
영조 10년에는 태실비(胎室碑)를 만들어 세웠다.
그러나 세종의 태실은 또 다시 수난을 맞는다.
바로 일제강점기 때의 일제의 의해 서다.
일제는 조선의 태실지가 모두 길지(吉地)라는 사실을 알고 조선왕실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전국에 산재한 조선왕실 태실을 경기도 양주(楊州),
지금의 고양시 서삼릉 지역으로 옮겨 버렸다.
그리고 세종태실지를 파괴하고 그 땅은 조선의 민간에게 강매 해 버렸다. 
그리하여 세종 태실지는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되고,
부서진 석물들은 계곡에 버려지거나 땅에 묻혀버렸다고 한다.


다행이 인근에 있던 단종의 태실지는 일제가 미쳐 건드리지 못해 화를 면할 수
있었으나 이 후에 실제 태반이 있는지 없는 지 분명치 않은 상태에서 극심히
훼손되어 현재도 민가의 무덤이 들어서 있는 상태이다.


이러한 태실지에 얽힌 사연을 알고 나니 말할 수 없는 비애가 느껴짐과 동시에
아직도 두분의 태실지에 대한 별다른 관리와 유적지 정비를 하지 않은 당국의
처사가 한심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민족의 위대한 인물 세종의 태실지에 태반이 있든 없던 중요한 유적지임을
감안 한다면 남아 있는 석물을 비롯한 주변 정비를 잘 하여 국민의 역사 인식교육
현장으로 삼아도 부족한데 현재의 관리 상태는 비교적 허술하다고 볼 수 있다.
세종대왕의 동상을 서울 한복판에 요란하게 세우는 것도 좋지만 이러한 유적지를
국가적 차원에서 보다 분명하게 보수 관리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에필로그

 
조선 왕실의 태실은 전국의 길지에 조성 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태반은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일제강점기 중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서삼릉 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러니깐 전국에 산재해 있는 지금의 태실은 태반이 사라진 빈 태실이며
태실이 있던 터만 남은 것이다. 그리고 화려하게 조각된 태실의 석조물들이
장기간 방치 훼손되어 태실지로서 무색할 만큼 망가진 상태로 있는 곳이 많다.

 

다행히 근년에 들어 문화재청과 각 지방자치단체에서 태실지를 복원한다든가
정비하여 관리하고 있으니 천만 다행이지만 아직도 방치된 곳이 많다.

영천 치일리 팔공산 태실봉에 있는 인종의 태실같은 경우는 최근년에 복원을

잘 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유적지가 되고 있다.

지금도 지명을 보면 태실이 있는 산을 태봉(胎峰) 또는 태실봉 이라고 한다.
전국에는 태봉이라고 불리는 곳이 40여개소가 있다. 
조선왕실에서는 왕자나 공주(옹주)의 태를 묻기 위해 태실도감(胎室都監)을
설치하고, 태를 봉안(奉安)할 길지를 물색한 후 안태사(安胎使)를 보내어
태를 안치하고 화려하게 석조물을 설치하였다.

 

 

■태실에 대한 유익한 정보

 

 

●태실과 지석의 구조

 

 

 

 

태실은 왕실에서 자손을 출산하면 그 태를 봉안하는 곳을 말한다. 예로부터 태는 태아의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라고 인정하여 태아가 출산된 뒤에도 함부로 버리지 않고 소중하게 다루었다. 민간에서는 땅에 묻는 경우도 있었으나 많은 경우 출산 후 마당을 깨끗이 한 뒤 왕겨에 태를 묻어 몽긋몽긋하에 태운 뒤에 재를 강물에 띄워 보내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그러나 왕족의 경우에는 국운과 직접 관련이 있다고 여겨 태를 항아리에 담아 전국의 명당에 안치시키는 방법으로 처리하였다. 이때 이를 주관하는 관상감에서 길지로 선정된 명산에 일정한 의식과 절차를 밟아 묻었는데, 이 의식과 절차를 거쳐 완성한 시설을 태실이라 불렀다. 또한 태봉은 태실 가운데 그 태의 주인이 왕으로 즉위할 경우에 격에 맞는 석물을 갖추고 가봉비를 세운 것으로 임금의 태실을 말한다.

  

 

 

●태실의 조건

 

 

 

 

▶왕실에서 왕족의 태를 전국의 길지(명당)을 찾아 묻은 이유는 땅의 기를 받아 태 주인의
  무병장수을 기원하여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는 동기감응론(同氣感應論)에 따른 것으로 이
  는 사대부나 일반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명당자리를 빼앗아 왕실의 태실을 만들어 왕실에
  위협적인 인물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의도였다.


▶왈릉은 도읍지 100리 안팎에 조성되었지만 태실은 왕실과 백성들의 유대감을 조성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태실의 관리와 보호를 정성드려 하도록 함으로서 통치 수단을 강화할
  목적으로 태실을 전국에 조성 했다.


▶태실은 반드시 돌혈(突穴)이다. 즉 거북의 등이나 가마솥을 엎어놓은 형태인 봉긋한 봉우
  리여햐 했다는 것이다. 전국의 태실봉이나 태봉산이란 지명이 붙은 산은 모두가 이런
  형태를 갖추고 있다.

 

 

>미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