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부도(浮屠), 그 적멸의 시간~

migiroo 2016. 6. 12. 21:37

2016.6.12


부도(浮屠), 그 적멸의 시간~





나는 산문(山門)에 들어서면 먼저 부도 밭(浮屠群)부터 찾는다.
깨지고 마멸되고 시커먼 이끼가 덕지덕지 낀 옛 부도들....
거기에 적멸이 있고, 수백 년 정지되어 있는 시간이 있고
그리고 그 속에 사색이 있고, 옛 고승들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항아리를 엎어놓을 것 같기도 하고....
삿갓을 눌러쓴 것 같기도 하고....
석탑도 아닌데 석탑 같기도 하고...
장식적 조각이 하나도 없는 단순하기 그지없는 부도....
그러나 수백 년의 시간이 그 단순함에 고스란히 담겨 있음을 본다.
너무 오랜 풍파에 마멸되어 어떤 부도들은 그 이름마저도 없다.
오직 세월 속에 묻혀 적멸의 시간대에 잠들어 있을 뿐이다.





화려한 문양의 부도와는 또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옛 부도들...
그것은 죽은 자의 무덤이라기보다는 죽음(滅)과 존재(生)란 무엇인지를
사색케 하는 산자들의 풀리지 않는 화두(話頭)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옛 부도 앞에 청승맞게 쪼그리고 앉아 사색하기를 좋아 한다.
내가 죽으면 부도는커녕 한줌 먼지가 되어 그 흔적조차 없어질 것이라는
허무와 허망함을 절감하며 존재에 대한 회의를 음미(?)하곤 한다.


요즈음은 부도(浮屠)를 승탑(僧塔)이라 고쳐 부른다.
부도의 형태는 크게 나누어 ‘석종형부도’와 ‘팔각원당형부도’
그리고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난 이형(異形)적 형태의 부도로 나뉜다.
그러나 오래된 고(古)부도는 대부분 범종 모양의 석종형부도가 주를 이룬다.

이러한 부도에도 계층이 있다.


유명한 고승들의 승탑(부도)은 탑비(塔碑)와 함께 국보나 보물로 지정 될 만큼
석조조형물로서 예술적 가치가 우수하고 문화재로서 소중히 취급하지만....
대부분의 이름 없는 승려들의 부도는 단순한 석종형부도로 쓸쓸히 남아 있을 뿐이다. 
요즈음 부유한 사찰의 부도들 중에는 유명세와는 상관없이 그 장식적 조각의 화려함이
극치를 이루어 민망함을 자아내기도 하는 부도도 있다.


●부도와 승탑은 어떻게 다른가?


부도는 부두(浮頭), 또는 포도(蒲圖), 불도(佛圖) 등 여러 가지로 표기되는 불타(佛陀), 또는 붓다(Buddha)의 전음(轉音)이다. 어원상으로 본다면 불타가 곧 부도이므로 불상이나 불탑이 곧 부도를 가르키는 것이며, 원칙적으로 부도란 매우 넓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승려의 탑을 부도(浮圖)라 일컬은 예가 더 많으며, 같은 뜻의 승탑이란 용어와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다. 즉 부도나 승탑은 모두 같은 의미로 승려의 유골이나 사리를 봉안한 묘탑을 일컫는다.

불교에서는 세 가지 성스러운 보배인 불(佛), 법(法), 승(僧)을 숭배하고 있다. 이 가운데 승보(僧寶)로 공경 받는 덕망 높은 고승들에게는 평소 스님을 받들던 제자와 신도들이 스승의 묘탑((승탑)과 함께 별도의 탑비를 세우기도 하였다.

승탑과 탑비는 왕명으로 탑호(塔號)를 받았으며, 탑비의 비문은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글을 짓고 명필가가 글을 써서 비석에 스님의 행적을 새긴다. 이것은 곧 개개인 승려들의 행적은 물론이고 다른 승려와의 관계와 사적(寺蹟), 나아가 당시의 사회 및 문화의 단면까지도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자료, 국립문화재연구소)



●최고의 승탑, 국보 4호, 국보 57호


여주 고달사지 승탑과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그 장엄하고 화려함의 극치.




고달사지 승탑을 보고 있으면 숨이 막힌다.
그 조각의 섬세함에 눈이 휘둥그레지고,
8세기 초기 고려시대 작품이라니 그 장구한 시간에 가슴이 떨린다.
살아 있는 듯한 석용(石龍)의 조각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살아 꿈틀거리며 달려들 것 같아 겁이 난다.
도대체 석공의 손이 사람의 손인가, 신의 손인가....
현대 첨단 장비로 쓱싹쓱싹 조각하기도 어려운데
천 수 백년 고려 석공의 솜씨라니 입이 딱 벌어진다.
국보 57호 화순의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도 마찬가지이다.
 

고달사지 승탑에 대한 문화재청 자료
고달사터에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승탑이다. 고달사는 통일신라시대 경덕왕 23년(764)에 창건된 절로, 고려 광종 이후에는 왕들의 보호를 받아 큰 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하기도 하였으나 언제 문을 닫게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신라 868년(경문왕 8)에 입적한 신라 말의 고승 원감(圓鑑)의 묘탑(墓塔)이라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 승탑은 바닥의 형태가 8각을 이루고 있으며,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완전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 잘 남아 있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상·중·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는데, 특히 가운데 돌에 새겨진 조각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가운데 돌은 8각이라기보다는 거의 원을 이루고 있으며, 표면에 새겨진 두 마리의 거북은 입체적으로 표현되어 사실감이 느껴진다. 각 거북을 사이에 두고 네 마리의 용을 새겨 두었으며, 나머지 공간에는 구름무늬로 가득 채웠다. 돌에 꽉 차게 새겨진 무늬들이 과장되지 않고 세련되어 능숙하면서도 대담한 힘이 느껴진다. 가운데 돌을 중심으로 그 아래와 윗돌에는 연꽃무늬를 두어 우아함을 살리고 있다.





사리를 모셔둔 탑 몸돌에는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새겨져 있는데, 문에 새겨진 자물쇠 모양의 조각은 밋밋하여 형식적으로 흐른 감이 있다. 이를 덮고 있는 지붕돌은 꽤 두꺼운 편으로, 각 모서리를 따라 아래로 미끄러지면 그 끝마다 큼직한 꽃 조각이 달려 있는데, 크기에 비해 조각이 얕아서 장식효과는 떨어진다. 지붕돌꼭대기에는 둥그런 돌 위로 지붕을 축소한 듯한 보개(寶蓋)가 얹혀져 있다.






전체적으로 신라의 기본형을 잘 따르면서도 각 부분의 조각들에서 고려 특유의 기법을 풍기고 있어 고려시대 전기인 10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인다. 돌을 다듬은 솜씨도 깨끗하고 조각에서도 세련미가 묻어나오는 작품이다. (*자료,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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