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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장엄미사곡을 들으며~

migiroo 2020. 12. 7. 22:52

베토벤 장엄미사곡을 들으며~

Ludwig van Beethoven

장엄미사 D장조(Missa solemnis in D-dur) Op. 123

 

 

-나의 장엄미사곡에 서린 추억....

 

나는 20대 청년 시절에 어느 지방의 성당에 다녔다. 그리고 그 성당의 성가대(합창단)원 이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미사는 우리말 미사가 아니라 모두 라틴어(Latin language) 미사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신자들은 그 어려운 라틴어 미사문과 성가를 뜻도 잘 모른 체 읽고 성가도 불렀다.

 

그런데 그 때 성당의 주임 신부님은 유별나게 음악을 좋아 하시고 미사는 모두 라틴어 성가만을 부르도록 고집하셨다.(몇몇 번역되어 나온 우리말 성가도 있긴 했었지만...) 신부님은 예배의 의례 자체를 라틴어 성가로 채워 미사 전체를 장엄한 분위기고 끌고 가셨다그 당시 서울의 명당성당을 비롯한 전국의 주교좌 성당은 거의 대부분 미사통상문을 라틴어로 집전했다. 우리 말 미사 집전은 그로부터 수 십 년 후부터 실행되었다.

 

나는 그 때 부른 키리에kyrie eleison, 아누스데이Agnus Dei, 글로리아Gloria, 등의 라틴어 미사곡을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물론 그 때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을 모두 부른 것은 아니었다.

 

나의 20대 그 시절, 나는 한 여인을 좋아했다. 그녀는 나와 성당에 같이 다녔다. 주말마다 성당에 나가 다른 성가대원들과 함께 라틴어 성가를 연습하며 지냈다. 그 때 싹튼 그녀에 대한 나의 첫사랑은 이루지 못한 체 끝나고 말았지만 나의 가슴은 베토벤의 장엄미사 곡처럼 슬프고 애절한 상처로 남았다. 딱 한 번 그녀에게 고백을 했었지만 그녀는 수줍은 듯 좋다, 싫다는 의사를 유보한 체 시간을 흘러 보냈다. 재차 고백에 용기가 부족했던 나는 그 후 직장 때문에 서울로 이주하고 곧 다른 여인을 만나 사랑하고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수 십 년이 지나 그녀와 우연속에 극적인 해후가 있었는데 내 앞에 나타난 그녀는 까만 성의를 입은 수녀가 되어 있었다. 지난 나의 고백에 대한 그녀의 대답을 이제 듣게 된 셈이었다.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 때 대답을 유보 했던 이유를..... 60이 다 된 내 앞에 나타난  그녀도 나도 초노의 나이가 되었지만 수녀복을 입은 그녀는 훨씬 젊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녀가 나를 만나 처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안드레아 씨, 나도 그때 당신을 좋아 했었답니다. 그리고 지금도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아는 나의 천주교 세례명(영세명)이다.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의 세례명을 잊지 않고 있었다니.... 그녀의 말에 순간 나의 가슴은 먹먹해버렸지만 그녀가 말한 사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다음 이어진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사랑이라는 의미를 이해 할 수가 있었다.

 

“안드레아 씨, 나는 지금 천주님의 딸 수녀입니다. 수녀로서 모든 사람을 사랑하며 당신 또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지 않고 파란 하늘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때 당신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유보한 것은 수녀가 되기로 확고한 결심을 하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재차 나에게 고백하지 않은 것에 너무나 감사했었습니다. 나는 당신 덕분에 부담 없이 내 소망였던 수녀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미소 띈 온화한 얼굴로 내 손을 부드럽게 만져 주었다. 나는 그녀가 내민 손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수줍어서가 아니라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내 앞에 서 있는 그녀는 한 여인이 아니라 성녀마리아이었음을... 베토벤의 장엄미사곡만 들으면 지금도 그녀가 그렇게 나에게 스크랩 되곤 한다.

 

유튜브 해설을 들어보니 아이러니 하게도 베토벤의 장엄미사곡은 미사 의식을 위한 곡이 아니고 공연을 위한 곡에 가깝다고 했다. 미사곡 자체가 너무 어렵고 투입되는 오케스트라의 규모나 합창단의 수가 너무 많아 웬만한 성당에서는 소화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라 했다.

 

베토벤 장엄미사곡 동영상

Missa Solemnis, en Re mayor, Op. 123.

Ludwig van Beethoven (Latin/ Engl./Span. subtitles) (1h19m)

 

 

베토벤은 이런 음악을 작곡하기 위하여 세상 소리를 못 들은 것이 아니라 듣지 않고 하늘의

소리로만 듣고 작곡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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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밴 장엄미사곡에 서린 배경이야기

-나무위키 자료 간추림

 

▲예술의 전당 서울오라토리오 정기공연 베토벤의 장엄미사 공연장면

베토벤과 각별한 사이였던 루돌프 대공이 1819년에 올뮈츠(현 체코 올로모우츠)의 대주교로 취임하게 되었는데, 이미 전년도에 이 소식을 들은 바 있었던 베토벤은 이 취임식의 미사에서 연주할 목표로 이 미사곡의 작곡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느린 작곡 진척도 때문에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결국 마감시간을 놓친 이 구상은 장장 5년에 걸쳐 거대한 대작으로 변모했다. 이왕 작곡을 시작한 김에 이벤트용 작품이 아니라 자신만의 의도와 철학에 의거한 대작을 창작하겠다는 식으로 베토벤은 계획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본 여행] 베토벤 동상이 있는 뮌스터 광장 (Münsterplatz)

 

이 장엄미사는 9번 합창 교향곡과 거의 병행해서 작곡했는데, 두 곡 모두 그 동안 이 분야에서 찾아보기 힘든 복잡한 구성과 장대한 규모를 지니고 있었으므로 작곡 속도는 대단히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 두 대작을 창작할 당시 베토벤은 굉장히 신경이 날카로웠기 때문에 한창 작곡 중에 약속이나 연락 없이 찾아오면 시중들던 하녀든 절친한 친구든 귀족 나으리든 간에 무조건 욕설을 퍼부으며 내쫓아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래서 굳이 베토벤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가 작곡을 마치고 쉴 때까지 무작정 밖에서 기다려야 했다(...). 베토벤은 작곡에 집중하기 위해 한동안 빈을 떠나 뮈들링이라는 한적한 시골에서 지내기도 했는데, 이 때 고용된 하녀들이 베토벤의 극에 달한 괴팍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모두 1달도 되기 전에 그만 뒀으며 심지어 밤중에 몰래 도망간 경우도 있었다. 또한 작곡할 때 문을 걸어 잠근 채 큰 소리로 소절을 불러제꼈으며 악상이 떠오르지 않거나 뭔가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밤 늦은 시간에도 온 동네가 떠나갈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고 하는데, 당시 뮈들링 사람들은 이 위대한 거장을 모신 혜택(?)을 톡톡히 받았을 것 같다.(*나무위키 자료 발췌)

 

베토벤 사진(그림)

오늘날 대표적으로 온오프라인에 널리 퍼져 있는 베토벤의 사진이다이 그림은 요제프 칼 슈틸러作品으로 1820년에 그렸는데 그림 속 베토벤이 손에 든 악보가 바로 장엄미사(Missa solemnis) 곡이다.

 

 

 

카톨릭 라틴어 성가 남녀혼성합창 동영상

Agnus Dei - Samuel Barber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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