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운봉에서-인월-중군마을까지
▶첫째 날 걷기(제1구간-2)
●출발점 - 운봉의 광천(람천)
오늘 코스는 비록 긴 거리는 아니지만 초행길이고 지리산이라는 거대한 위압감에 눌려 무사히 걸을까 조금은 불안해 진다. 그러나 혼자 걷는 길이 아니고 여럿이 함께 하는 길이니 불안은 기우일 것이라 믿는다. 지리산 둘레길은 지리산 산자락에 모여 사는 마을과 마을, 계곡과 고개를 잇는 길이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은 11개의 마을을 지나고 3개의 재를 넘고 3개의 계곡을 건너는 난이도 중급 정도 되는 길이다.
오늘은 제1구간 운봉읍에서 인월을 거쳐 중군마을까지 약 12km를 걷는다. 우리가 지나가야할 마을은 운봉읍 - 서림공원 - 북천마을 - 신기마을 - 비전마을 - 군화마을 - 흥부골자연휴양림 - 월평마을 - 인월면 -중군마을이다.
출발지점부터는 광천(람천)의 뚝방 길을 따라간다. 뚝방길은 끝없이 직선으로 뻗어 있다. 제방 끝에 비전마을의 서림공원이 있다. 서림공원은 저 유명한 황산대첩비와 동편제의 텟자리 이다.
개천의 물은 다행히 크게 오염되지 않은 듯 억새와 갈대가 어우러져 피어 있고, 구절초, 개망초을 비롯한 가을 들꽃들이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다. 다행히 개천은 포크레인 정지작업을 하지 않아 직강화 되지 않고 자연그대로 이다. 흐르는 물이 제법 맑은 소리를 낸다.
똑방길 대추나무에 ‘대추 따지 마세요.’ 라는 경고판이 매달려 있는데 대추는 다 따가고 하나도 없다. 아마도 글을 모르는 사람들의 소행이 아닌가 싶다.
경고판을 붙인 농부가 얼마나 배신감을 가졌을까, 생각하니 왠지 미안하고 죄송스럽다.
운봉에서 인월까지의 구간은 너른 운봉들녘을 따라 지리산 서북능선과 백두대간을 조망하며 호쾌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약 10km 전 구간이 뚝방길과 임도 그리고 포장도로로 되어 있어 여럿이 함께 걷기에 좋은 평지길이다.
●신기마을
구렁이처럼 길게 누운 광천의 뚝방길 중간에 신기마을이 보인다. 보기에 참으로 평화로운 마을 모습이다. 신기라는 말은 삶을 시작하는 터전이란 뜻으로‘새터(신기,新基)’라는 의미이고, 소(牛)의 형국인 마을 북쪽
쇠잔등이가 잘려 마을의 쇠한 기운을 막고자 주민들이 직접 토성(土城)을 쌓았다한다.
●비전마을
광천의 제방이 끝나는 지점에 비전마을이 보인다. 비전마을에는 유명한 황산대첩비와 남원의 국악의성지, 그리고 판소리 동편제의 시원인 송흥록, 송만섭, 박초월
생가 등이 있는 곳이다.
●황산대첩비
황산대첩비가 어떤 것인가?
깨지고 으깨진 비편(碑片)만 바라봐도 가슴에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비석(碑石)다. 이제 한 세기가 가까운 세월이 지난 일제강점기 시대의 상처가 아직도 생생하게 아물지 않고
우리를 울분케하고 가슴 아프게 하고 있다.
일제의 만행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는 유물이 바로 황산대첩비 이다. 여기에 어찌 한 맺힌 그 사연을 다 쓰겠는가.
황산대첩비는 고려 말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격퇴시킨 사실을 기록한 승첩비(勝捷碑)이다. 그 후 이 승첩비는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인 들이 자국의 수치라 하여 조직적으로 이 대첩비를 파괴해 버렸다.
비석을 단순히 깨버린 것이 아니라 새겨진 글자 하나하나까지 으깨버린 만행을 저질렀다. 이런 참혹함 현장을 보고 어찌 분하고 가슴 아프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하여 비문(碑文)은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천만다행 옛 비문을 탁본해 놓은 것이 남아있어 해방 후
새로 비석을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1970년대에 들어와 대대적인 정화사업이 이루어져 새롭게 단장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의 새 비석 받히고 있는 귀부(龜趺)는 원래 것이다. 그리고 일제가 파괴한 원래의 비석 또한 다른 전각에
보존하였으니 두고두고 일제의 만행을 새겨 둘 일이다.
차라리 파괴하지 말고 일본으로 가져가지.... ‘북관대첩비’처럼 가져갔으면 원형이나 보존하지... (북관대첩비는 2006년에 반환되어 북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이 같은 일제의 만행이 어찌 이 황산대첩비 뿐이겠는가. 전쟁 폐망 이후 일본은 자국과 관계되는 유물은 물러가면서 극비의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가져가고 일부는 파괴했다.
귀부(돌거북, 龜趺)의 몸은 거북이 몸인데도 머리는 거북 머리가 아닌 용(龍) 머리이다. 좁디좁은 전각 속에서 무거운 비석을 지고 눈을 부라리며 금방이라도 만행을 저지른 일본을
향하여 튀어 나아 갈듯 살아 있는 듯 사실적이다. 귀부를 파괴하지 않을 것만도 다행한 일이다. 일제의 만행에 대한 울분을 달래 주려는 듯 어디선가 판소리가 한 대목이 바람에 실려 들려온다.
인근에 있는 거장 송흥록과 박초월의 생가에서 들려오는 소리다.
걷기를 잠시 멈추고 우리들은 송흥록과 박초월의 생가를 둘러본다. 걷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정 중간 중간에 주변의 문화유적을 찾아보는 것도 빠트릴 수 없는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잠간 송흥록과 박초월에 대해서 알아보자.
●동편제 시원지 송흥록, 송만갑 과 박초월의 생가
가왕 송흥록(宋興祿,1801~1863)은 누구인가?
조선 후기의 판소리의 명창으로 모든 가조(歌調)를 집대성하였고 매부인 김성옥(金成玉)이 시작한 진양조를
자신의 노래에 도입 완성하였다. 웅건·청담한 창법으로 동편제(東便制)를 이룩하였고 특히 춘향가, 적벽가 등을 잘 불렀다. 송흥록의 손자 송만갑도 이곳에서 태어나서 할아버지 송흥록의 유지를 받들어 그도 국창이
되었다.
국창 박초월(朴初月, 1917.2.20~1983.11.26)은 누구인가?
근대에서 국악인, 판소리의 명창 하면 박초월이다. 유창하면서도 무게 있는 소리로 이름을 떨쳤다. 많은 문하생을 양성했고 한국 국악의 해외소개에도 앞장선 분이다. 초라하지만 이 분들의 태어난 생가를 찾아보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흔히 동편제와 서편제는 한 마디로 말해서 어떻게 다른 것인가? 사전을 살짝 열어 여기에 옮겨 본다.
●동편제와 서편제의 차이점
▶동편제는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쪽지역에 있는 지방, 남원, 운봉, 구례, 순창, 흥덕에서 불리에진 소리.소리의 특징은 특별한 기교를 부리지 않고 그저 [목으로 우리는 소리]이다.
동편제 소리에서는 소리꾼의 풍부한 성량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기교가 적게 들어가는 대신 쭉쭉 뻗는 우렁찬 소리가 동편제 소리의 매력이기 때문이다. 동편제의 장단은 진행속도가 대체적으로 빨라서 잔가락이 적고 장식음 없이 노랫말을 촘촘히 채워나간다. 따라서 발림을 할 시간적 여유가 없다. 동편제 소리에서는 발성이 매우 신중하며 매 구절마다 끝마침이 명확하여 마치 쇠망치로 내려치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진다. 이처럼 동편제가 비기교적이고 건조한 연기로 일관된다는 것은 그만큼 예스럽고 소박하다는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예술 형태가 기교면에서 고졸(古拙)하다는 것은 그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 동편제는 판소리 예술이 발생하여 독립된 새로운 예술 형태로 형성되었된 당시의 수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정통적인 유파로 규정지어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서편제는
동편제보다 한세대 늦은 박유전을 시조로 하는데 보성, 나주, 목포등지를 중심으로 발달한 소리로 동편제소리의 상대적인 것이라 하겠다. 동편제가 선천적인 음량에 의존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서편제는 후천적인 노력이 그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가공과 기교와 수식으로 만드는 유파라는 뜻이 되겠다. 따라서 선천적으로 풍부한 음량을 타고 나지 않았더라도 절묘한 기교로써 그 약점을 커버할 수 있는 창법이다.
이처럼 소리에 기교를 부리자니까 자연히 템포가 늘어질 수밖에 없다. 동편제처럼 거뜬거뜬히 소리를 하다가는 "갈 데를 다 못 간다"는 결과를 빚어내게 마련이므로 기교를 부릴 수 있는 시간적인 여유를 요구할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렇게 소리에 여유가 있기 때문에 자연히 발림도 풍부하여지게 마련이어서 연기면에서도 발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수확 후의 빈 들판
판소리를 뒤로 하고 다시 걷기 시작한다. 남윈의 국악의 성지 건물이 웅장하게 서 있지만 너무 시간에 쫓겨 들어가 보지 못하고 아쉽게도 그냥 지나친다.
운봉 들판은 벌써 빈 들판이다. 익은 벼들을 거의 걷어 들인 논은 그저 황량하기만 하다. 수확 후의 풍족함이 허망함으로 변해 있다. 여기 저기 진공 포장한 하얀 볏짚 단들이 논바닥에 누어있다.
요즘 가을 논에는 수확 후 남은 이삭이 없다. 그리고 이삭이 없는 황량한 논에는 철새들도 찾지 않는다. 한 톨의 이삭마저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쓸어 가기 때문이다. 농작물은 오로지 인간만의 것이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찾지 못 하는 날짐승들과 들짐승들은 갈 곳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개체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공생이 아닌 오로지 인간만이 사는 세상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씁쓸한 마음으로 빈 들판을 걷는다.
비전마을을 지나 옥계저수지를 거쳐 이름도 재미있는 흥부골 휴양림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여기서부터는 산허리를 도는 임도다.
●흥부골 휴양림
오후 4시반경 흥부골휴양림 휴게소에 도착하여 따끈한 커피를 마신다. 기온이 춥거나 덥거나 커피는 역시 따끈한 것이 제 맛이다.
휴양림 입구에 흥부 부부가 박을 타는 석상이 있는데 아이들이 3명뿐이다. 원래 흥부네 자식들은 모두 열 명이 넘는다고 들었는데 왜 그렇게 자식을 많이 낳았는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런데 왜, 흥부골휴양림인가? 이곳 골짜기가 흥부전의 발상지란다. 아니 그렇다면 흥부와 놀부가 그냥 이야기가 아니고 실존인물들 이었단 말인가? 휴양림 안에는 흥부네 집도, 놀부네 집도 있다했다. 그래서 휴양림 시설도 흥부네 식으로 조성하여 자연생태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여 흥부전과 부합된 테마 시설과 숙박시설을 한옥 너와집으로 짓고, 휴양림을 향토 민속놀이 마당으로 조성하여 자연 휴식 공간으로서 최적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고 휴게소 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언제 한번 며칠 묵고 흥부와 박이라도 타고 싶다.
●월평마을
휴양림을 나와 월평마을 쪽으로 간다. 큰 포장도로를 버리고 야트막한 숲길을 따라 간다. 그런데 길가에 온통
밤송이가 수북이 떨어져 있다.
이미 한바탕 털고 간 듯 밤송이는 입을 벌린 빈 껍질뿐이다. 혹시나 하고 숲을 헤치고 밤을 찾아보니
제법 쓸 만한 것들이 풀 속에 숨어있다. 모두들 걸음을 멈추고 밤 줍기에
신이 났다. 밤송이에 손이 찔려 호호 불어가면서 밤을 줍는다. 반 소쿠리 정도의 밤을 주었다. 밤은 알갱이가 작은 토종밤이다.
월평(月坪)마을은 그 지형적 형국이 반월형이라 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했다. 마을을 지나는데 길에 매달려 있는 현수막에 쓰여 있는 글귀가 재미있다.
“만들어요. 푸른 농촌! 함께 해요. 희망 찾기!”
얼마나 멋진 구호인가? 역시 달처럼 맑은 월평마을 답다. 도심지의 구호는 온통 “반대, 반대, 절대 반대...“라는 구호뿐인데 말이다.
●민박집 숙소로 돌아오다.
오후 5시 반경, 1구간 오늘 예정된 걷기를 끝내고 인월면을 거쳐 숙소인 중군마을 도토리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대략 4시간 반, 12km 정도를 걸었다. 별로 힘든 줄 몰랐지만 오랜만에 먼 거리를 걸으니 다리가 저려온다.
저녁은 직접 해 먹기로 했다. 여성 도반들이 인월면에서 장을 봐 왔다. 민박집의 허술한 취사도구로 밥을 하고, 반찬을 하고, 찌개를 끓이고, 고기까지 구어서 저녁 성찬을 차렸다. 여자들의 손맛이 과연 신기(神技) 인 듯 성찬이 맛이 있다. 빠질 수 없는 술도 거나하게 마시고...
기분이 좋아진 우리들은 읍내의 노래방까지 가서 놀다 늦은 잠에 들었다. 피곤 몸을 따뜻한 구들방에 뉘이면 금세 잠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낯선 곳이라 그런지 깊은 잠이 오지 않는다.
밤은 고요하다. 깊어가는 시골 밤.... 밤 하늘을 보니 별이 총총하다. 언제 저런 별들을 보았었지? 역시 외롭지만 농촌의 밤은 좋다. 힘이 들것 같은 내일 일정을 생각하여 잠을 청한다.
>다음 장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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