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정보
○분황사 모전석탑 [芬皇寺(模塼石塔]-국보 제30호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 : 돌을 벽돌같은 크기로 다듬어 쌓은 탑. 모전탑)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634년(신라 선덕여왕 3년)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 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 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층 옥신 네 면에 돌문을 달아서 내부에 공간을 마련하여 목탑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또 1층 옥신 네 면에는 문비(門扉 : 문짝)를 설치하였고, 사실적이며 한편 으로는 익살스럽기도 한 고부조의 금강역사상(불교의 법을 수호 한다는 의미)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잡석으로 쌓은 넓직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 (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1층 몸돌 네 귀퉁이에 한 마리씩 네 마리의 동물을 올려놓았다. 내륙 쪽에는 용맹스러운 두 마리의 사자를, 동해 쪽 에는 미끈한 두 마리의 물개를 각각 배치하였다.
각 층 옥신에는 전탑의 특징인 우주(隅柱 : 네 귀퉁이의 기둥)의 표시가 없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 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는 3층이나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한다.
모전석탑은 석재를 이용하여 전탑(塼塔)과 같이 건립(建立)한 탑으로서 전탑이 더 이상 유행하지 못하고 침체되자 이에 뒤이어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모전석탑도 석재 로 벽돌형을 다듬어 모전석(模塼石)을 생산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크게 유행하지는 못했다.
*분황사 석사자 와 물개
석사자(石獅子)는 모전석탑 네 모서리에 한 마리씩 배치되어 있는 데, 그 중 서북쪽(내륙 쪽) 두 마리 석사자(石獅子)는 오랑캐를 막기 위해서 그리고 남동쪽(동해 쪽)의 두 마리 물개는 왜적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배치한 것이라고 한다.
*금강역사
신라 탑에서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배치는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처음 등장을 하고 석탑으로써 금강역사를 배치한 것은 장항리사지 서탑(西塔)이 처음이다. 서탑(西塔)에서는 복련(伏蓮) 대좌 위에 금강역사를 배치 하였는데 비해, 분황사 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은 암좌(岩座)위에 상을 세웠다.
탑신부 각 면에 새긴 여덟의 금강역사상들은 저마다 자세와 바라보는 방향을 달리 하고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호통치는 듯 벌린 입, 불끈 쥔 주먹과 상반신의 울퉁불퉁한 근육들은 강한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양편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 조각상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은 신라조각의 걸작품에 속한다.
*원효의 화엄경소(華嚴經疏)
신라 문무왕 때의 승려 원효(元曉:617~686)가 엮은 불서(佛書).
진역(晋譯)으로 된 《화엄경(華嚴經)》 60권을 간략하게 해석하여 10권으로 묶었으나 현재는 제3권 1책만이 전한다. 그러나 다행히 그 서문이 남아 있어 전체의 대의는 알 수 있다. 즉 불법(佛法)은 원래 허공(虛空:無)과 같아서 걸리는 것이 없으며, 또 모든 법이 불변 부동이므로 생사는 즉 열반(涅槃)이 되며, 일(一)도 아니고 다[一切] 도 아니므로 일법(一法)이 곧 일체법(一切法)이 되는 것이 법계(法界)와 법문의 도술이다. 따라서 모든 보살이 입주하고 많은 불타가 출현하는 것이라 하였고, 또 이것은 범부는 알지 못하는 일인즉 사람이 법문에 출입하는 것은 오로지 일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현전하는 제3권은 <여래광명각품(如來光明覺品)>을 해석한 것인데, 이것을 보면 원효는 방대한 경문(經文)을 더욱 넓혀서 해석하지 않고, 먼저 전체적인 대의를 논한 다음, 또 주로 분과를 하여 송(頌) 등의 구절마다 간명하게 요지를 따서 그의 독특한 수법으로 알기 쉽게 설하고 있다.
원효와 의상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후대에 알려지지 않아 애석하게 생각하던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 삼룡변어정 - 신라 시대 우물. 내부는 원형, 외부는 팔각형으로 되어있다.
내부의 원형은 원불(圓佛)의 진리를 상징한며, 외부의 팔각모양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한다. 이 우물에는 오래 전부터 호국용 3마리가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속에 사는 용을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군사를 보내 빼앗아왔다 한다. 그 후로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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