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16.원원사지 삼층석탑의 사천왕과 12지신을 만나러 가다.

migiroo 2009. 11. 22. 20:22

 

 

●원원사지 삼층석탑의 사천왕과 12지신을 만나러 가다.

   -보물 제1429호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

 

원원사지(遠願寺址) 가는 길은 흙먼지가 풀풀 난다.
아직도 꾸불꾸불한 외길 비포장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길이 험하고 먼지가 뽀얗게 나도 좋다.
거기에 가면 동, 서 삼층석탑에 아주 멋진 고부조(高浮彫)의
사천왕상과 12지신상을 만 날 수 있기 때문이다.

 

 

 

 

옛 원원사 절터에는 지금 원원사라는 요즘 지은 절이 있다.
절은 제법 사찰 건축양식에 충실하게 잘 지었고
단청도 아주 정성 드려 한 것이 눈에 보인다.
그런데 절 입구에 일주문 대신 아주 우람하게 생긴
금강역사 두 분과 사천왕 네 분의 석상(石像)이 길 양편에
떡하니 버티고 서서 들어오고 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고 있다.
비록 현대식 기계로 깎아 만든 볼품없는 조각품이지만
석상의 모습이 뚜렷이 구별되어 금강역사와 사천왕의 모습을
공부하는데 초보자들에겐 좋은 본보기가 될 듯하다.  
 

 

 

첫째 쌍 탑 상층 갑석 4면에 옷자락이 하늘을 향하는
국내 최초의 십이지상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는 점이고...

 

 

 

둘째 1층 탑신 4면에 무기를 든 사천왕상이
고부조로 그야 말로 역동적으로 새겨져 있는 점이고...

 

셋째 금당으로 들어가는 삼층석탑 오르는 돌계단이
탑의 조성 시기인 8세기 경, 그 당시 계단이기 때문이다.

 

넷째, 원원사지는 호국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절이기 때문이다.
김유신 장군은 김의원, 김술종 등과 당 군을 물리치는데
불력(佛力)을 얻기 위해 당시 고승 안혜, 낭융 등과 더불어
원원사를 창건한 호국의 사찰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사나 문화유적 가치로 볼 때 국보로 상향 지정함이 옳지 않을까
생각 드는데 이것은 순전히 나의 생각 일뿐....

오늘 나는 천년 석탑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과 십이지신을 만났다.
그런데 그들이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아니라
아주 따듯한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동서 삼층 석탑 가운데에 석등이 서 있다.

석등은 화사석이 없어 지고 간주석과 옥개석만 보인다.

석등이 있는 점으로 보아 뒤편에 금당자리임을 알 수 있다. 



>미지로(2008.4.5)

 

 

 

☞문화재 정보.
 

▷원원사지삼층석탑에 대한 칼럼 소개


경주 원원사지삼층석탑(보물 제1429호)은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2번지 봉서산 기슭의 원원사지(사적 제46호)에 있다.
경주와 울산의 중간지점인 봉서산 기슭 모화리에 위치하고 있다. 한 쌍의 석탑이 사지의 동쪽과 서쪽에 상대하여 서있는데, 규모와 형태는 서로가 비슷하다.
이 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기단과 옥신에 품위 있고 다양한 신상들이 조각되어 있다는 점인데, 특히 기단 면석에 장식된 십이지신상은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우리나라 석탑 십이지 장식미술의 최초의 작례라는 점에 불교미술사적 가치가 크다.

 
원원사(遠願寺)는 원래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 명랑법사가 세운 금광사, 그리고 사천왕사와 더불어 통일신라시대 문두루비법의 중심도량이었다. 원원사는 명랑 법사의 후계자인 안혜.낭융 등과 김유신.김의원 등 당시의 지도급 인사들이 함께 뜻을 모아 세운 호국사찰이다. 그러나 창건 이후의 역사 및 폐사시기 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다음은 원원사지 석탑 복원에 관한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조선 순조 9년(1809년)에 울산에 사는 이모씨가 모화리 봉서산 기슭에 찾아왔다. 그곳에 조상의 묘를 쓰기로 작정하고 주변에 있던 원원사 석탑을 무참하게 쓸어버리고 정지작업을 강행했다.
그 후 대부분의 탑재가 땅속에 묻히거나 잡초에 덥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인 1921년 어느 날 경주에 사는 삼산(杉山)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사냥하러 왔다가 우연히 탑재 일부를 발견하고 그 사실을 조선총독부에 보고했고, 총독부는 촉탁 소탕(小湯)씨를 현장에 보내 조사케 하여 원원사 탑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그 후 여러 해 동안 잊혀 진 채로 방치되어 있다가 1929년 일본 경도제대의 능세(能勢丑三) 교수에 의해 탑재의 대부분이 수습. 실측되었고 그 후 1931년 12월 20일 경주유적보존회에 의해 두 탑이 복원됐다.


이렇게 해서 다시 빛을 보게 된 원원사 석탑의 옥신석과 기단 면석에서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확인됐다. 사천왕은 칼, 금강저, 보주 등의 지물을 들고 악귀를 밟고 선 입상의 형태로 1층 옥신석에 조각되어 있었고, 십이지신상은 도복차림의 수수인신 형태로 기단 면석을 돌아가며 사방에 새겨져 있었다. 이처럼 석탑에 사천왕상과 십이지신상이 함께
장식된 사례는 원원사 탑이 처음일 뿐만 아니라, 이 석탑이 후에 제작되는 십이지신상 석탑의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미술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하 생략..(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불교신문 225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