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13."아사녀석불좌상" 그 러브스토리...

migiroo 2009. 11. 17. 01:32

 

 

●"아사녀(영지)석불좌상" 그 러브스토리...

 


 



 

          눈도, 코도 주었습니다.
          입도, 귀도 주었습니다.
          몸뚱이마저도 다 내 주었습니다.
          그래서 석불(부처님)은 몸도 얼굴도 다 뭉개져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만큼 만신창이가 되셨습니다.
          겨우 사람의 형상만 남았습니다.

 

          바람이 가져갔습니다.
          비와 눈이 가져갔습니다.
          억 겁의 세월이 훑고 갔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의 욕망이 가져갔습니다.
          자식 생산에 효험이 있다하여 석불의 코를 떼다 갈아먹었습니다.
          귀가 맑아 진다하여 석불의 귀도 떼어갔습니다.
          눈이 밝아 진다하여 석불의 눈도 후벼 팠습니다.

          오늘 그 석불 아닌 부처님 앞에 서서
          하염없는 눈물을 흘립니다. 

 

 

                       아사녀(영지)석불좌상! 
 

 


          공식명칭은 영지석불좌상입니다.
          경주 외동읍 괘릉리 영지 마을가는 길섶 송림 속에 있습니다.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4호, 통일신라시대 때 만든 석불입니다.
          그냥 보통 석불이 아닙니다.
          아사달과 아사녀 이야기 다 아시지요?
          그 아사달과 아사녀의 기막힌 러브스토리가 서려 있는 석불입니다.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 석가탑(국보 제20호)...
          영지(影池)와 함께 슬픈 전설이 깃들어 있는
          아사녀석불좌상 입니다.
          이제부터 그 기막힌 전설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

 

          >미지로(2007.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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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사달과 아사녀의 러브스토리

 

          백제의 유명한 석공인 아사달에게는
          아리땁고 어여쁜 아사녀라는 아내가 있었다.
          신라에서 불국사 라는 큰 절을 짓고 있을 때
          석공 아사달은 김대성의 초청을 받아 신라(경주)로 왔다.
          아사달이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을 세우는 일에 온 정성을
          기울이는 동안 한 해 두 해가 흘렀다.

 


  
          한편 남편과 만날 날만을 고대하며
          그리움을 달래던 아사녀는 아사달을 기다리다 못해
          천리 길을
마다않고 신라 불국사를 찾았다.
          하지만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여자를 들여보낼
          수 없다는 금기 때문에 남편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사녀는 그리움에 사무친 나머지
          날마다 불국사 문 앞을 서성거리며
          먼발치에서나마 남편을 보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주지스님이 아사녀에게  말했다.
          "여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자그마한 못이 있소.
          지성으로 빈다면 탑 공사가 끝나는 대로 
          탑의 그림자가 못에 비칠 것이오.
          그러면 남편도 볼 수 있을 것이오."라고.

 

          아사녀는 할 수 없이 주지스님의 말을 듣고
          그 연못으로 가서 탑이 완성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편 아사달은 사랑하는 아내 아사녀가 신라 땅에 와서
          자신의 일이 끝나기를 눈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른는 채, 탑 마무리 작업을 위해
          마지막 힘을 쏟았고, 마침내 석가탑이 완성되었다.

          그날 밤 연못을 들여다보고 있던 아사녀는 자기 눈을 의심했다.
          연못 속에 석가탑의 그림자가 거꾸로 서 있는게 아닌가. 
 

         " 여보!"


          아사녀는 남편이 보이는 못 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들었다.
          그녀는 남편이 너무 그리워 탑의 환영을 보았는지 모른다.

          드디어 탑을 완성한 아사달은
          아사녀가 영지에 있다는 주지스님의 말을 듣고 영지로 달려갔다.

          그러나 영지에는 아사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아사녀가 신고 있던
         신발만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아사달은 아사녀의 신발을 붙잡고  땅에 엎드려 미친 듯이 아사녀를 불렀다.

 

 

 

 

          이윽고 아사달이 눈을 뜨자 그의 앞에 큰 바위가 솟아올랐다.
          아사달은 망치와 정을 들고 바위에 아사녀의 모습을 새겼다.
          작업을 끝내고 쳐다보니 그것은 아사녀가 아닌
          거룩한 부처님의 상이었다. 그는 망치를 놓고 두 손을
          합장하며 나무아미타불을 목 놓아 불렀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아사달은 연못에서 웃고 있는 아사녀를 보았다.
          " 아사녀!" 하고 외치며 아사달도 그 연못으로 뛰어들었다.
          그 후 세상 사람들은 이 연못을 '영지' 라 부르고, 끝내
          그림자를 비추지 않은 석가탑을 '무영탑' 이라고도 불러오고 있다.
          아사달이 조각한 불상은 지금도 영지 못가에 쓸쓸히 앉아계신다.


          이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인 아사달은 황룡사 구층탑을 완성한
          백제사람 아비지의 후손이며, 이 이야기로 볼 때  백제의  건축 수준이
          얼마나 뛰어난 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경주 불국사내에 있는 이 석가탑은  750년경에 세워졌으며, 
          그 정식 명칭은 불국사 삼층석탑이다. 동쪽의 다보탑과 함께
          불국사가 쌍탑가람(雙塔伽藍)임을 보여주는  석탑이다.

          (자료출처:인터넷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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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석불좌상 [影池石佛坐像]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석불.

          지정번호  경북유형문화재 제204호 
 
          1985 년 10월 15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04호로 지정되었다.
          경주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저수지 남쪽에 있는 얼굴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불상이다. 마멸이 심한 것도 있지만

          원래  미완성의 불상이라는 말도 있다. 불국사(佛國寺) 석가탑(釋迦塔)을 건립 할 당시

          아사달을 찾아온 아사녀가 남편을 기다리다 영지에 몸을 던져 죽은 후 아사달이 그녀를

          위해 조성    하였다고 전한다.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완전히 갖추었지만 많은 부분에 손상이 있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건장한 신체와 허리, 양감(量感) 있는 무릎 표현

          등에서 통일신라 석불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우견

          편단(右肩偏袒)이며 수인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모양을 하고, 자세는 결가

          부좌한 좌상이다. 수법이 석굴암(石窟庵) 본존불형식(本尊佛形式)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상·중·하대의 형식을 갖춘 팔각연화대좌(八角蓮華臺座)에는 쌍잎으로 된 앙련(仰蓮)

          의 연꽃 무늬와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으며, 불신(佛身)과 한돌인 광배에는 번잡한

          불꽃무늬 안에 화불(化佛)이 화려하게 새겨져 있어 당시의 대좌와 광배 형식을 잘 보

          여주고 있다. 광배 일부도 손상을 입었다        

 

          >미지로(2008.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