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15.경주 분황사 금강역사를 찾아서.......

migiroo 2009. 11. 22. 14:51

 

 

●경주 분황사 금강역사를 찾아서.......

 

 

사자 4마리가 사방을 바라보며 으르렁거리고...
금강역사가 눈을 부릅뜨고 지키고 있는 분황사 모전석탑....
원효의 *화엄경소(華嚴經疏)의 자취가 아직도 서려있는 곳...

사람들이  분황사 노거수(老巨樹) 아래에서 서성인다.
사람들은 무엇을 얻고자 여기에서 서성이는 것일까.
그러나 큰 나무를 보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수령 500년.... 1,000년도 넘은 나무가 있다.
어찌 인간들이 나무보다 잘났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숲은 우리 인간들에게 무한한 혜택을 주고 있지만....
인간들은 그 앞에 겸손을 버리고  오만(傲慢)할 뿐이다.

 

●분황사(芬皇寺)...
 

 

선덕여왕이 이 절을 세우면서(7세기 경) 어찌 절집 보다 더 큰 탑을 세우셨는지....
아마도 원효를 통하여 호국의 의지를 축적하기 위하여 진 것이리라,,,

탑도 그냥 탑이 아니고 일일이 벽돌을 구워서 세운.....
자그마치 9층(추정)이나 되는 거대한 탑이었단다.
 

탑신 4면에는 그야말로 역동적인 금강역사상를 배치했다.

 

 

 분황사의 금강역사상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 같은 모습이다.
웃통을 벗어버린 반라(半裸)에는 울퉁불퉁한 근육질이 꿈틀거리고 있다.

 그 앞에 서면 사나이로서 너무나 보잘것없는 나의 상체가 부끄러워진다.
그리고 엄청나게 큰 금강저(金剛杵)를 움켜진 권법(拳法)의 자세가
함부로 범접하지 말라는 단호함이 엿보인다. 

 


그리고 탑 네 귀퉁이에는 으르렁거리는 사자상과 물개상을
배치해 놓았는데....
불적(佛蹟)에 사자는 흔히 나오는 것이지만...
해구(海狗:물개)를 배치해 놓은 것은 무슨 연유일까?
(아래 내용 참조) 

 

 

그 힘찬 기상을 보면 아~ 하고 감탄이 터져 나온다.
석공의 손은 신의 손이 이었었나?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정 하나, 망치하나만 가지고도 저토록 섬세한 조각으로
단단한 돌에 생명을 불어 넣을 수 있다니…….
아무리 발달한 현대식 첨단 기계로 깎은 조각품 일지라도
어찌 신라의 석공 손에 비교할 수 있겠는가...
컴퓨터 화된 기계로 깎은 조각품에는 그림만 있을 뿐 생명이 없다.
천 수 백년의 모진 풍파를 견뎌 오고서도
아직도 살아 있는 분황사 금강역사 상을 보면서
나의 존재가 너무나 왜소(矮小)함을 느낀다.

 

 

분황사 뒷 마당에 외롭게 서 있는 석불이다.

광배와 불안(얼굴)이 심하게 깨지고 마모된체 발 아래는 땅 속에 묻혀있다.

신라시대 석불임은 분명하지만 정확한 시기는 알수 없다.

석불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프다.

 


>미지로(2008.4.2)

 

 

 

☞문화재 정보

 

○분황사 모전석탑 [芬皇寺(模塼石塔]-국보 제30호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 : 돌을 벽돌같은 크기로 다듬어 쌓은 탑.
모전탑)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基壇)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

634년(신라 선덕여왕 3년)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되며,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백제미륵사지석탑(국보 제 11호)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7세기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
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에 의해 수리된 이후 지금까지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수리 당시
탑 안에서 사리함과 구슬 등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1층 옥신 네 면에 돌문을 달아서 내부에 공간을 마련하여 목탑의 형식을 취하기도
하였다. 또 1층 옥신 네 면에는 문비(門扉 : 문짝)를 설치하였고, 사실적이며 한편
으로는 익살스럽기도 한 고부조의 금강역사상(불교의 법을 수호 한다는 의미)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잡석으로 쌓은 넓직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
(塔身)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1층 몸돌 네 귀퉁이에 한 마리씩
네 마리의 동물을 올려놓았다. 내륙 쪽에는 용맹스러운 두 마리의 사자를, 동해 쪽
에는 미끈한 두 마리의 물개를 각각 배치하였다.

각 층 옥신에는 전탑의 특징인 우주(隅柱 : 네 귀퉁이의 기둥)의 표시가 없다. 회흑색
안산암을 작게 벽돌모양으로 잘라 쌓아올린 탑신은 거대한 1층 몸돌에 비해 2층부터
는 현저하게 줄어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는 3층이나 원래는 9층이었다고 한다.

모전석탑은 석재를 이용하여 전탑(塼塔)과 같이 건립(建立)한 탑으로서 전탑이 더
이상 유행하지 못하고 침체되자 이에 뒤이어 유행하게 된다. 그러나 모전석탑도 석재
로 벽돌형을 다듬어 모전석(模塼石)을 생산하는 작업이 먼저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에
크게 유행하지는 못했다.
 


 *분황사 석사자 와 물개 

석사자(石獅子)는 모전석탑 네 모서리에 한 마리씩 배치되어 있는 데,
그 중 서북쪽(내륙 쪽) 두 마리 석사자(石獅子)는 오랑캐를 막기 위해서
그리고 남동쪽(동해 쪽)의 두 마리 물개는 왜적을 막고자 하는
의도에서 배치한 것이라고 한다.  

 

*금강역사 

신라 탑에서 금강역사(金剛力士)의 배치는 분황사 모전석탑에서 처음 등장을 하고
석탑으로써 금강역사를 배치한 것은 장항리사지 서탑(西塔)이 처음이다.
서탑(西塔)에서는 복련(伏蓮) 대좌 위에 금강역사를 배치 하였는데 비해, 분황사
모전석탑의 금강역사상은 암좌(岩座)위에 상을 세웠다.

탑신부 각 면에 새긴 여덟의 금강역사상들은 저마다 자세와 바라보는 방향을 달리
하고 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호통치는 듯 벌린 입, 불끈 쥔 주먹과 상반신의
울퉁불퉁한 근육들은 강한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분황사 모전석탑의 양편에는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 조각상은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은 신라조각의 걸작품에 속한다.

 
*원효의 화엄경소(華嚴經疏)  

 

 

 

신라 문무왕 때의 승려 원효(元曉:617~686)가 엮은 불서(佛書).

 진역(晋譯)으로 된 《화엄경(華嚴經)》 60권을 간략하게 해석하여 10권으로 묶었으나
현재는 제3권 1책만이 전한다. 그러나 다행히 그 서문이 남아 있어 전체의 대의는 알
수 있다. 즉 불법(佛法)은 원래 허공(虛空:無)과 같아서 걸리는 것이 없으며,
또 모든 법이 불변 부동이므로 생사는 즉 열반(涅槃)이 되며, 일(一)도 아니고 다[一切]
도 아니므로 일법(一法)이 곧 일체법(一切法)이 되는 것이 법계(法界)와 법문의 도술이다.
따라서 모든 보살이 입주하고 많은 불타가 출현하는 것이라 하였고,
또 이것은 범부는 알지 못하는 일인즉 사람이 법문에 출입하는 것은 오로지 일념에
불과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현전하는 제3권은 <여래광명각품(如來光明覺品)>을 해석한
것인데, 이것을 보면 원효는 방대한 경문(經文)을 더욱 넓혀서 해석하지 않고,
먼저 전체적인 대의를 논한 다음, 또 주로 분과를 하여 송(頌) 등의 구절마다 간명하게
요지를 따서 그의 독특한 수법으로 알기 쉽게 설하고 있다. 
 

 

원효와 의상은 동방의 성인인데도 불구하고 비석이나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후대에 알려지지 않아 애석하게 생각하던 숙종이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 삼룡변어정 - 신라 시대 우물. 내부는 원형, 외부는 팔각형으로 되어있다.

 
내부의 원형은 원불(圓佛)의 진리를 상징한며, 외부의 팔각모양은 부처가 가르친 팔정도를 상징한다. 이 우물에는 오래 전부터 호국용 3마리가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우물속에 사는 용을 물고기로 변하게 한 뒤 가져가는 것을 원성왕이 군사를 보내 빼앗아왔다 한다. 그 후로 '삼룡변어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분황사에 얽힌 이야기


광덕과 엄장 스님 이야기
 

신라 문무왕 때 광덕과 엄장이란 두 스님이 있었다.
이 스님들은 네것 내것을 가리지 않을 만큼 몹시 절친한 사이여서 공부하면서도 서로 알려주고 도우면서 성불을 향해 정진했다.
『자네가 먼저 극락에 가게 되면 반드시 알리고 가야 하네.』
『물론이지 이 사람아. 자네도 마찬가질세.』
두 스님은 밤낮으로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약속하면서 사이좋게 공부를 겨뤘다.
분황사 서리에 숨어 신 삼는 것을 업으로 살고 있던 광덕 스님은 부인을 거느렸는데 그의 처는 분황사 노비였다.
엄장 스님은 남악에 암자를 짓고 숲의 나무를 벤 후 밭을 일궈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어느 날 저녁. 엄장 스님은 저녁공양과 예불을 마친 뒤 집 주위를 산책하고 있었다.
석양에 물든 하늘빛은 아름답기 그지없었고, 초여름 저녁 미풍에 날리는 송화가루는 싱그러움을 더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한 줄기 밝은 빛이 땅까지 비추더니 광덕 스님의 음성이 들렸다.
『나는 서쪽으로 가니 그대는 잘 있다가 속히 나를 따라오라.』
엄장 스님은 얼른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 속에선 신비스런 하늘의 음악소리가 들려왔다.
이튿날 엄장 스님이 광덕 스님이 살고 있는 서리로 가보니 과연 광덕 스님은 열반에 들어 있었다.
『언제 가셨습니까?』
『어제 저녁 석양 무렵에 가셨습니다.』
『역시 그랬군요….』
광덕 스님의 우정 어린 마지막 인사를 들은 엄장은 그 부인과 함께 유해를 거두어 다비식을 치뤘다.
장례식이 끝난 후 엄장은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스님,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더 늦기 전에 돌아가셔야지요.』
『네. 그런데 부인 혼자 두고 가려니 왠지 마음이 안되어서 발길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혼자 지내실 수 있겠습니까?』
『염려마옵시고 어서 돌아가십시오. 혼자인들 어떻고 반쪽이면 어떻습니까?』
엄장은 일어설 생각을 않고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부인, 부인께서도 알다시피 광덕과 저는 서로 가릴 것 없는 절친한 사이가 아니었습니까. 이제 그가 먼저 서쪽으로 갔으니 그와 살았듯 나와 함께 사는 것이 어떻겠소?』
『그렇게 하시지요. 광덕 스님 섬기듯 성심껏 시봉하겠습니다.』
광덕의 처가 거리낌없이 선뜻 답하자 엄장 스님은 약간 의외이긴 했으나 쉽게 뜻을 이루어 기분이 좋았다.
그날 밤, 밤이 깊어 두 사람은 각각 잠자리에 들었다.
엄장이 그 부인 곁으로 다가가 잠자리를 함께 하려 하자 부인은 놀라는 기색으로 말했다.
『스님이 서방극락을 구함은 마치 나무에 올라 고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엄장은 의아했다.


초저녁, 선뜻 함께 살기를 응낙하던 부인의 몸 빛이 마치 고승의 준엄한 자태로 바쳐왔기 때문이다.
엄장은 문득 부끄러운 생각이 일었으나 마음을 굳게 다잡고 다시 물었다.


『광덕도 이미 수년간 그렇게 살았는데 나라고 안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이오?』
『남편은 10여 년이나 저와 동거했으나 하루 저녁도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밤마다 단정히 앉아 한결같이 아미타불 명호를 부르거나 16관(아미타경에 설해진 대로 태양과 물 등 16가지 일을 명상하는 관법)을 하며 정진했습니다.


또 밝은 달빛이 창에 비쳐들 때면 그 빛을 타고 가부좌를 틀었으니 어찌 미혹을 깨고 서방극락에 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엄장은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일 뿐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부인은 다시 말을 이었다.
『대개 천 리를 가는 사람은 그 첫걸음으로써 알 수 있는데, 지금 스님이 생각이 동쪽에 있으니 서방은 미처 알 수가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엄장은 부끄러워 더이상 듣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부인에게 큰절을 올렸다.
『아니, 스님 왜 이러십니까?』
『몰라뵈옵고 무례했던 점 널리 용서하옵소서.』
엄장은 부인에게 크게 사죄한 후 날이 새자마자 분황사로 달려가 원효 스님에게 간밤의 이야기를 사실대로 고한 후 가르침을 청했다.
원효 스님은 쟁관법(징을 치면서 산란한 생각을 없애며 선정에 들게 하는 특수 관법으로 추측되고 있다)을 일러줬다.
엄장은 그 길로 남악 암자로 돌아왔다.


그 동안 자신의 공부가 헛되었음을 절감하면서 그는 다시 시작하는 자세로 공부에 임했다.
엄장 스님은 오직 한마음으로 관(觀)을 닦았다.
몇 년이 지난 어느 초여름 해질 무렵, 엄장 역시 광덕 스님처럼 극락왕생했다.
광덕 스님의 부인은 비록 분황사 노비였지만 사실은 관음의 19응신중의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