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상전과 팔상도 八相殿. 八相圖
팔상전과 팔상도 八相殿.八相圖
부처님의 생애는 크게 전생기前生期, 금생기今生期, 전도기傳道期 로 나눈다.
팔상도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난 때 부터 열반할 때까지의 금생기 모습을 극적인 사건 8가지를 골라 그린 불화로 그린 것이 팔상도이고
팔상도와 불상을 봉안한 전각을 팔상전이라고 한다.
여덟 폭의 그림에서 연유하여 팔상전, 부처님의 설법회상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하여 영산전靈山殿이라 부르기도 한다.
불단 없이 벽에 팔상도를 봉안하는 것이 보통이다.
주불은 석가모니불이고 좌우 협시로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봉안한다.
우리나라 절에서 언제부터 팔상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그 안에 불상과 불화를 봉안했는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국여지승람>에 1381년(우왕7)에 건립된 안영사 7층 전탑의 내부 벽의
동쪽에는 <약사회도藥師會圖>,
남쪽에는 <석가열반회도釋迦涅槃會圖.,
서쪽에는 <미타극락회도彌陀極樂會圖>,
북쪽에는 <금경신중회도金經神衆會圖>를 그려 봉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것으로 보아 고려말에 이미 불탑의 내부를 불화로 장엄했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법주사의 팔상전, 쌍계사의 팔상전 등이 있다.
# 양산통도사 영산전과 팔상도
영산靈山은 영축산靈鷲山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가장 오랫동안 머물면서 자신의 가르침[佛法]을 제자들에게 전하던 곳이다.
바로 이 영산을 이 땅에 재현한 것이 영산전이다.
그러므로 이곳을 참배하는 것은 부처가 제자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파한 영산회상靈山會上에 참석하는 것과 같은 의미가 있다.
이 영산전은 신앙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진 통도사의 세 영역 가운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하위 영역[下爐殿]의 중심 불전으로,
동서로 양옆에 약사전과 극락전을 거느리고 있다.
이런 구성은 조선 후기의 불화佛畵에서 흔히 삼세불三世佛로 표현되었다.
삼세불은 중앙에 자리 잡은 현세現世의 부처 석가모니불,
왼쪽에 자리 잡은 과거의 부처 약사불,
오른쪽에 자리 잡은 미래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말한다.
세 건물로 이루어진 구조는 바로 이러한 삼세불의 배치와 일치한다.
영산전의 건축연도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건물은 1704년(숙종 30)에 송곡선사松谷禪師가 중건한 것이라고 한다.
조선시대 사찰의 중심불전으로는 드물게 소박한 형식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아마 통도사 전체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과 격을 맟추기 위해 그런 양식으로 꾸민 것으로 짐작된다.
외형상으로 보면 영산전은 정면 3칸, 측명 3칸의 평범한 건물이지만, 정면의 기둥 간격이 넓어 외관이 위풍당당하다.
이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곳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또한 다포계의 화려한 장식을 사용함으로써 건물의 품격을 한층 높이고 있다.
내부벽에는 다보탑多寶塔을 비롯하여 법화경의 여러 내용을 담은 품격 높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또 석가모니의 생애를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도는 1775년(영조 51)에 제작된 것으로,
당시 불화의 화풍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이다.
* 다보탑의 그림 벽화
*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는 보살들...
* 영산전의 지킴이...
현재 각 사찰에 남아 있는 오래된 팔상도는 대개 조선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대개의 작품은 제목이 붙어 있는데, 그 내용은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4)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6) 항마수하상樹下降魔相
7) 녹원전법상鹿苑傳法相
8) 쌍림 열반상雙林涅槃相 등이다.
각 화폭의 세부 내용에는 주제와 관련된 세부적인 내용이 2-4개 정도 들어 있고,
시대와 무대가 서로 다른 것들도 함께 들어 있다.
이것은 시공時空이 원융한 우주적 드라마로 승화시킨 결과로 생각된다.
# 양산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 : 보물 제 1041호
빈 공간을 거의 남기지 않고
건물과 나무, 구름 등의 배경으로 적절하게 구도를 나누어 해당 장면을 표현하고 있다.
1)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부처님께서 호명보살로 도솔천에 계시다가 카필라국의 태자로 탄생하여 사바세계에 나투시는 모습이시다.
석가모니가 전생 소구담小瞿曇 시절에 도둑으로 몰려 말뚝에 묶인 채 활을 맞는 모습,
꿈에 흰 코끼리를 탄 호명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마야부인의 뱃속으로 들어가는[入胎] 모습,
바라문에게서 꿈의 해몽을 듣는 왕과 왕비의 모습,
등을 표현하고 있다 .
2)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비람[룸비니] 동산의 무수 꽃가지를 붙들고 서서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출산하는 장면,
그리고 제석천왕이 비단을 가지고 내려와 태자를 받으며 하늘의 모든 천왕들이 온갖 보물을 공양하는 모습과
땅에서 솟아오른 연꽃을 밟고 칠보를 걸으며 하늘과 땅을 가르키면서
天上天下 唯我獨尊 一切皆苦 我當安之(천상천하유아독존 일체개고 아당안지)라 외치는 장면과
하늘에서 아홉 마리의 용이 차고 뜨거운 물을 토하여 태자를 목욕을 시키는 모습과
태자를 가마에 태워 궁궐로 돌아오는 모습
그리고 아시타 선인이 태자의 관상을 보는 모습 등이 묘사되어 있다 (BC624. 4, 8음)
3)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태자가 성밖으로 나가 생로병사의 실상을 보는 것을 묘사.
태자의 성장에 따라 왕은 태자를 위하여 전단향, 염부단금, 보배, 신령스러운 약 등으로 몸을 보호하게 하였고 영락으로 몸을 장엄케 하였으며
三時殿(삼시전 : 1년 3계절에 각각 맞는 전각)을 지어주고 연못과 연꽃을 심게 하여 후원에는 귀한 꽃의 향기가 사라지지 않았으나
7세쯤 봄 농경제에 참석하여 흙구덩이에서 꿈틀대는 벌레(지렁이)를 새가 쪼아 물고 달아나고
그 새를 큰새가 날아와 작은새를 잡아먹는 것을 보고 약육강식의 비정함과
농부나 농부의 수고로 편안히 배불리 먹는 귀족 왕족의 처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이 염부수閻浮樹아래의 정관靜觀이라고 한다.
이후론 태자의 사색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사문밖에 나가 관찰하는 모습이다.
동문에서 노인을, 남문 밖에서는 병자를 보고, 서문으로 나가서는 상여를 보았고,
북문밖에는 사문<수도자>을 보고 출가 결심하는 모습 등이 표현되고 있다.
그 태자의 모습을 보고 한 여인이 넋을 잃고 다음과 같은 노래를 하였다.
"저러한 아들을 둔 어머니와 그 아버지는 얼마나 기쁘고 즐거우랴.
저 같은 분을 남편으로 맞이하는 여인은 참으로 가장 행복할 것이다" (五分律)
태자는 최상의 행복이라는 소리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마음속으로 "그렇다! 행복 중에서도 가장 행복인 무상의 열반을 얻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얻을 수가 있을까?" 하고 외쳤다.
태자의 행동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던 부왕은 태자의 심경변화를 알아차리고 크게 염려하였다.
아무래도 출가를 하고야 말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부왕은 태자에게 왕통을 이을 왕손을 얻기 전에는 출가할 수 없다는 조건을 내세우는 수밖에는 별 도리가 없었다.
태자는 19세에 같은 석가족의 콜리 성주의 딸인 야소다라와 결혼하였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 라훌라를 낳았다.
@ 부처님의 아내와 결혼 설화 및 아들
1)부처님의 아내
왕자로 태어 난 싯달타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매우 풍족한 생활을 하여
뒷날 부처님께서 직접 술회한 경전에 의하면
1년 중에 찌는 듯한 여름, 장마철인 우기, 추위 없는 겨울 등 매 계절마다 각기 다른 궁전에서 살았다고 한다(三時殿).
궁전은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하고
앞뜰에는 여러 종류의 고운 새들의 노래 소리와 연못에서는 청, 홍, 백색의 연꽃이 청초하게 피어 있어 집안 가득히 연꽃향이 진동하였으며,
몸에는 부드러운 옷을 입고 고급 향수로 치장을 하고 정원 뜰을 거닐 때면 뜨거운 햇살을 피하기 위한 양산이 준비되어 있었다.
더우기 3개월간의 긴 우기雨期에는 반라의 여자들만으로 구성된 악사들이 귀를 즐겁게 해주어 매일 흥겹게 지나고,
또 왕위를 이어 받기 위한 교육에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싯달타의 나이 16세 때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귀여운 라훌라를 낳았다.
태자의 부인인 야소다라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불본행집경"이나 "수행본기경"에는 분명 야소다라라고 하였으나
남방 불교의 경전에는 라훌라의 생모는 첫째 아내였다고 기록하고 이름은 명기하지 않았고,
어떤 문헌에는 싯달타의 아내가 데바다하에 사는 콜리족의 딸이며 밧다카치나라고 하였다.
그 외의 여러 이름으로 나타나 있어 싯달타의 아내에 대해 몇 명인지 의문을 일으킬 수가 있다.
여기에는 당연히 전생이나 전전생의 먼 옛날의 인연, 즉 연기에 대한 설화가 있고 후대에는 더 많은 전설이 첨가되어 무려 547개에 이른다.
그런데 어디를 보나 부처님의 가문은 명가라고 표현하여 "좋은 인연을 쌓은 집"이였다.
한 예로 본생담 중에 부처님의 생가는 4아승지 십만 겁으로 숫자로 셈할 수 없는 아주 오래전 옛날에 선혜善慧선혜라는 브라만의 집이였는데
그 집은 대대로 선근善根 즉 좋은 과보를 받을 수 있는 선인善因을 심었다고 했다.
이는 부처님의 초전법륜 즉 첫 설법에서 "나는 업론자(業論者)다" 라고 설하신 것처럼
부처님은 출생 전 전생에서부터 깨달음을 구하는 집안에서 태여 났으며
금생에 태어나서도 전생과 마찬가지로 명문가에 태여 나 바른 도를 위하여 정진하는 사람이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부처님의 아버지인 정반왕도 마야부인이 죽은 뒤 처제를 아들의 양모로 받아드려 아들을 하나 더 낳았을 뿐 다른 여인을 맞아 드렸다는 기록은 없다.
이로 미루어 본건데 본생담 등이 한사람만의 기록도 아니고 또 같은 시대의 기록도 아니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집필하는 과정에서 동명이인의 야소다라를 만들어져서 사람들의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2)결혼에 얽힌 비화
정반왕은 아시다 선인의 예언이 항상 마음에 걸려
아들이 출가하여 성인이 되는 것보다 세속에서 전륜성왕이 되어 가문을 빛내주기를 바랐기에
여러 가지 궁리 끝에 아들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우선 여자에 대한 즐거움을 알려주는 것이 최선책이라 생각하고 태자비의 간택을 서둘렀다.
"아들아 너는 이제 결혼할 나이가 되었다. 혹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말해 보렴"
"아바마마 죄송한 말씀이지만 제가 결혼할 여자는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젊고 아름다워야 하고 누이처럼 다정해야만 하고, 어머니처럼 인자하고 부드러워야 하며. 모든 일에 진실하고 거만하지 말아야 하며,
잘 난체도 하지 말아야 하고, 귀한 것을 시기하거나 부러워해서도 안되며, 노예처럼 온순하고, 하녀처럼 겸손하며,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잘 것이며 옷으로 치장하거나 향수를 바르거나 소란스러운 놀이나 호화로운 잔치에도 무관심해야 하고
몸과 마음이 순결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이러한 여인이 있다면 서슴치 않고 결혼하겠습니다"
왕은 아들의 말을 듣고 식견이 빼어 난 궁전의 승려를 불러 아들의 의견을 전하며 그런 여인을 찾을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여러 날 동안을 찾아 헤매었으나 그런 여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승려는 실의에 빠져 궁전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와 함께 하녀를 데리고 나들이 나오는 한 소녀를 발견하고 순간 그의 눈이 빛났다.
샤카족의 딸 단다파니의 딸 야소다라였다.
승려는 그녀에게 여러 가지를 질문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여 왕에게 고하였다.
"폐하 드디어 찾아내었습니다. 틀림없는 천생연분입니다. 이 이상 더 찾아볼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왕은 아무리 슬기로운 승려라 하더라도 실수가 있는 법이라 생각하고 직접 시험해 보기로 하였다.
그는 신하들에게 일주일 후 태자가 젊은 처녀들에게 보석을 나누어 줄 터이니 모두 궁전으로 오라고 공포하였다.
약속한 날 많은 처녀들이 궁전으로 몰려 왔다. 태자는 처녀들에게 일일이 보석을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보석을 하나씩 받고 기뻐하며 돌아가는 처녀와는 달리 야소다라는 맨 뒤에 있다가 태자의 텅 빈바구니 앞에 서게 되어 몫이 없었으나
야소다라는 태자 앞에서 미소를 머금고
"태자님 아무것도 없군요. 저를 업신여기는 건가요?"
"천만에요 아가씨가 마지막으로 왔기 때문이지요. 그 대신 내 손가락에 낀 반지를 드리지요."
그러자 야소다라는 머리를 가볍게 흔들었다.
"아닙니다.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태자님 것이지 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제게 보석이 있다면 태자님께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야소다라가 물러가고 그 말을 전해들은 정반왕은 그녀가 바로 진짜 보석이며, 태자비로 손색이 없음을 직감하고 단타파니를 궁전에 불렀다.
"단타파니여 그대의 딸을 나의 아들에게 주게나"
그러자 그는 머뭇거리며 쉽게 승낙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반왕은 재차 청혼을 하였다.
"폐하 용서하소서 쾌히 허혼할 수가 없습니다. 왕자께서는 온갖 사치와 호강 속에서 자랐습니다.
조금도 부족함을 모르고 자랐기에 분명 명예와 권세에 나약하고 나태에 젖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제 딸의 남편감으로는 적격자가 아닙니다.
저희 가문은 힘세고 슬기롭고 머리 좋은 남자에게만 딸을 줍니다"
단도직입적인 거절에 왕은 오히려 당황하고 부끄러워 태자를 불렀다.
"아바마마 몹시 슬프고 괴로워 보이십니다. 무슨 사연인지 들려주십시오 "
왕은 여러 가지의 생각 끝에 단다파니에게 청혼을 거절당한 것을 털어놓았다.
태자는 얼굴에 웃음을 띠고
"공연한 걱정을 하고 계셨군요. 아바마마 저보다 더 재능있고 힘센 남자는 카필라성안에는 드물 것입니다.
저와 겨눌 사람을 전부 모아 주십시오. 저의 재능과 힘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부왕은 아들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쉬며 카필라성의 모든 젊은이를 모아 시합을 치렸는데 아무도 싯달타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를 지켜본 단다파니는 속으로 외쳤다.
"저같이 훌륭한 젊은이와 내 딸이 부부가 된다면 얼마나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하마터면 큰 보물을 잃는 실수를 저지를 뻔하였구나 !"
단다파니는 왕에게 사과하고 청혼을 받아들일 것을 오히려 간청하여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3) 부처님의 아들
본생담에는 싯달타는 라훌라를 탄생한 그 해 29세 때 출가를 한 것으로 되어 있어 결혼 후 13년 만에 아들을 낳은 셈인데
손자의 탄생소식을 학수고대하던 숫도다나왕은 왕자 출생 소식을 듣고 흐뭇한 마음으로 아들에게 그 소식을 전했는데,
그런데 라훌라의 출생에 관한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그것은 남방불교와 북방불교의 전승의 차이에서 오는 것으로
심지어 부처님께서 성불한 날 밤에 라훌라가 태여 났다는 경전이 있을 정도로 불합리한 것도 있다.
그 까닭은 앞의 야소다라와 마찬가지로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한 기록에는 라훌라는 불종(佛種:부처님의 종자), 즉 부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의문이 대두되자 정반왕은 크게 상심하였으며,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 며느리인 태자비와 손자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할 결심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경솔한 행동을 취할 수가 없어 한 가지 묘방을 생각해 내었다.
손자를 목판위에 싣고 돌을 매달아서 왕궁의 연못에 띄우는 것이다.
만일 가라앉으면 내 손자가 아니고 돌만 가라앉으면 손자가 틀림없다는 생각이었다.
결심을 한 정반왕은 여러 신하와 궁녀들 앞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실천한 결과 다행히도 돌만 가라앉고 어린 왕손은 아무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무사히 성장한 라훌라는 나이 10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인 부처님을 처음 만났으며
얼마 후 출가하여 불교사상최초의 사미(沙彌)가 되어 밀행 제일의 10대 제자가 되었다.
밀행密行이란 밀교密敎와 같이 비밀한 수행이 아니라 여러 계율을 세밀하게 지키고 잘 수행한다는 뜻이다.
물론 어린 시절에는 경솔한 언동으로 부처님이 소망어계小妄語戒를 만들기도 하였지만 철이 들면서 계율을 아주 잘 지켰다.
예로 <라운인욕경羅雲忍辱經>을 보면 한때 사리풋다 존자와 사위성으로 탁발을 나갔는데
동네 악동들이 사리풋타의 발우에 모래를 집어넣고 라훌라의 머리를 때리는 행패를 부렸지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조금도 흔들림 없이 잘 참았다고 한다.
태도도 겸허하여 계율의 규정대로 구족계를 받지 않은 사미이기 때문에 비구들과 동숙치 못하여 타 곳에서 혼자 자면서도 조금도 불평을 않았다고 한다.
라훌라는 부처님의 열반 후 지극한 효심을 발휘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현장법사가 부처님의 입적지인 쿠시나가라를 참배하였을 때 1100여년이 지나 번화하였던 옛 모습은 없고 황량한 사당뿐이여서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그는 그때 그 지방에 오랫동안 살고 있는 한 브라만에게 깜짝 놀랄 이야기를 들었다.
"이곳에 이상한 비구니 한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옛날부터 부처님의 사리탑을 지키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 대한 내력을 알 길이 없었습니다.
하루는 그 비구에게 "스님은 어디에서 왔으며 출신은 어디냐"고 물은 즉
" '예 나는 이 탑의 주인이신 부처님의 아들 라훌라로 이 탑묘가 너무 황폐한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파 이곳을 지킨 것이 오늘날에 이르렀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
라훌라는 부처님의 독자이면서 출가 수행하여 인욕행과 계율행을 잘 지키고 수행을 잘하여 아라한이 되어서 존경을 받았다.
아라한이란 소승불교에서는 최상의 성자이며, 처음에는 부처님을 일컫는 명칭이었으나 뒤에는 아라한과 부처님을 구별하였다.
샤카족의 설화는 아주 많은데 그 중에 라훌라의 이름에 대한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여간한 보통 사람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더 많다고 할 것이다.
상식적으로는 자신의 귀여운 아들에게 상서롭지 못한 장애라는 뜻의 라훌라라는 이름을 붙여준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한역 경전에는 라훌라 또는 라호라(羅 羅)로 되어있다. 원 뜻은 장애(障碍)이다.
부처님께서는 태자시절부터 항상 명상에 잠겨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인간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생사 문제의 해결 없이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은 그를 괴롭혀 왔다.
이 같은 사고는 점점 사회적 향락에서 멀어져 조용한 명상에 들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바뀌게 되고,
이 사실을 안 부왕도 서둘러 결혼을 시킨 것인데 그 결과 아들을 낳았지만 태자로서는 싫증을 느낀 결혼생활에서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오 라훌라"라고 한탄하였던 것이다.
왕손의 탄생을 학수고대하던 왕은 왕손 탄생의 기쁜 소식을 듣고 태자의 입에서 장애가 생겼다는 한탄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잠시 생각을 한 후에
왕손의 이름을 라훌라로 정했다는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가장 힘세고 용감한 인드라(뒤에 제석천이 됨)신과 일식과 월식을 일으켰다는 '라후'라는 두 신이 있다.
항상 불만을 품은 것은 악마 라후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인드라에게는 불로불생불사의 영약인 아므리타(Amrta)가 있었는데
그에게는 그러한 영약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이 신비의 영약은 젊어지며 천하제일의 힘을 자랑하게 되기에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서라도
그 신비의 영약을 훔쳐 먹어야 인드라를 제압할 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 라후는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중에
인드라가 외출한 틈을 타서 몰래 숨어 들어가 인드라가 비장해둔 영약을 훔쳐 마시게 되었다.
그때 마침 집으로 돌아온 인드라는 악마 라후가 자신의 영약을 훔쳐 마신 것을 알고 라후의 목을 단칼에 치고 말았다.
하지만 신비의 영약의 힘은 대단하여 인드라의 칼을 맞은 악마의 목이 공중을 떠돌다가 요령성妖靈星이 되어
영약을 훔쳐 마신 것을 일러바친 월과 일을 원망하여 일식과 월식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것이 해와 달을 먹는 라후가 요령성(요사스러운 별)이 되었다는 전설이다.
7C중반 경 인도의 소, 대승불교를 거쳐 밀교가 성립되면서 라후도 태장계 만다라의 제일 바깥쪽 안에 들어가게 되어 불보살의 일원이 되었다.
4)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생로병사의 고통으로 얽힌 삶에 대해 번민하던 태자가 마침내 궁궐을 떠나 출가하는 모습니다.
싯달타는 자애에 넘친 아버지와 새어머니의 뜨거운 모정, 아름다운 아내와의 사이에서 태여 난 아들에게 향하는 말할 수 없는 연민,
그 모든 것에 등을 돌리고 가정을 버리고 뛰어 나온 것은, 깨닫음을 얻고 난 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중아함경에 "내가 출가한 것은 생, 사, 병, 노가 없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지저분함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涅槃]을 얻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밤중에 궁전을 나온 싯달타는 날이 밝은 뒤에 어느 강가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지나가던 사냥꾼과 옷을 바꾸어 입고 출가 수행자, 즉 사문이 되었다.
수행자가 된 그를 흔히 사문 고타마라고 부른다.
태자를 감시하던 부인 야소다라와 시녀 챤타카이 술 취해 잠들어 있는 모습과 태자가 출가 했음을 상징하는 빈 의자,
그리고 궁궐안의 사람과 오백 군사들이 잠에 취해 있는 장면,
태자가 마부에게 성을 넘을 것을 지시하는 장면,
성을 넘은 태자를 돕기 위해 사천왕이 태자가 탄 말을 네 발로 떠받고 있는 장면,
제석천왕이 호위하며 하늘에는 오색광명이 비치는 장면,
머리를 깎은 태자가 사냥꾼과 옷을 바꿔 입는 장면,
마부 차익이 태자에게 하직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태자의 금관과 용포를 가지고 궁궐로 돌아오는 장면,
정반왕과 마야부인 그리고 태자비가 태자의 의관을 받고 슬피 우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29세 2월 8일 - 출가절)
5)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설산에서 수도하시는 모습으로 보통 사문 싯달타의 모습을 핏줄까지 튀여 나온 앙상한 모습으로 묘사를 한다.태자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자르자 제석천이 가사를 바치는 장면,
설산에 들어간 태자가 정반왕이 교진여 등 5신하를 보내 환궁을 종용하는 왕의 권청을 물리치고 신선과 함께 수도에 전진하는 모습들이 묘사되고,
머리 위에 새가 둥지를 틀 정도로 움직이지 않고 열심히 수행하는 태자,
6년 고행의 무상함을 깨우친 태자에게 강에 들어가 몸을 씻은 후 수자타가 바치는 우유죽을 받아 먹는 장면,
태자가 수도하면서 모든 스승을 찾는 장면,
풀 베는 천인에게서 길상초吉祥草를 보시 받는 장면 등이 묘사되어 있다.
사문 고타마는 저명한 수도인을 따라 편력의 길에 나섰다.
처음으로 찾아간 수행자는 고행주의자인 바가바로 그에게 그 고행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문의하였던 바, 그들은 천상에 태어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이에 고타마는 천상에 태여 난다고 하여도 죽지 않고는 불가능하며 수명을 다하면 고통을 당하여야 한다는 생각과
천상에 태여 난다는 것을 무엇으로 보장하는냐 하는 생각에서 그를 떠났다.
다음은 배화주의자를 찾아갔는데 그들은 범천과 해와 달과 물과 불을 섬기고 있었다.
이 또한 자신의 수행길이 아님을 직감하고 그 곳을 물러났다.
또 수정주의자인 알라라 칼라마와 웃타카 라마풋타였는데
이들은 정신통일을 통하여 정신적 작용이 전면 정지되어 숙정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는 것이다.
고타마는 이들에게 각각 지도를 받아 수행을 하였으나 그들이 해탈의 경지라고 일컫는 최고의 단계까지 수행을 하고서도
일단 정신통일의 상태가 끝나버리면 다시 전과 같은 상태로 돌아오게 되므로 수정은 끝없이 되풀이하게 되어
이것은 결코 무고안온無苦安穩한 해탈이 될 수가 없음을 알고
붓다가야의 네란자라강 근처의 고행림을 찾아 맹렬한 고행을 하였다.
이때 부왕이 보낸 다섯 명의 신하들도 함께 고행을 하였다.
그러나 곧 고타마는 출가의 목적이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이 아닌 열반 해탈이었으므로
고행을 버리고 강물에 몸을 씻고 거의 탈진 상태에 빠져 나뭇가지를 붙잡고 강변을 올라가서 지나가던 수자타의 우유죽을 공양 받았다.
그와 함께 수행하였던 다섯 수행자는 고타마의 이 모습을 보고 크게 실망을 하고 고타마는 타락하였다.
그는 정상적인 수행자가 아니다. 신성한 수행을 모독하였다. 우리는 그가 있는 곳에 머물 수가 없다고 하며 녹야원으로 가버렸다.
당시의 인도의 수행자들은 옷도 입지 않고 먹지도 않고, 목욕도 금물로 여겼다.
우유죽을 먹고 목욕을 한 고타마는 기운을 차려 심신을 회복하고 과거 6년간의 모든 수행을 청산하고 마음을 가다듬어 독자적인 길을 찾아 나섰다.
6) 항마수하상樹下降魔相
석가모니께서 보리수 아래 금강보좌 위에 결가부좌하고 선정에 들자부처님의 성도에 위협을 느낀 마왕 파순이 여러 가지 비술로 방해하는 모습과
석가모니가 마군들을 항복시키는 장면이다.
싯달타는 그늘이 좋은 핍파라수를 발견하고 그 아래로 갔다. 거기에는 안기에 알맞은 반석이 있었다.
고행에 지친 그가 앉기에는 돌바닥이 너무 딱딱해서 부드럽고 깨끗한 풀을 한 아름 깔고 앉았다.
사문 고타마는
"깨닫음을 구하기 전에는 결코 이 자리金剛寶座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인간을 괴롭히고 자유를 박탈하는 것은 결코 외부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내심에서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가를 깊이 추구推究하여 그것은 번뇌 때문에 생긴 진리에 대한 무지無知는 곧 무명無明이라는 것을 깨닫았다.
그리하여 싯달타는 내심의 깊은 성찰에 잠겨 모든 것이 연기緣起하는 도리를 알았다.
연기라는 것은, 이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도 예외가 없이 다 그것이 형성 될 수 있는 조건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
연기의 도리를 깊이 관찰한 고타마는 생사 괴로움의 근본 원인인 진리에 대한 무지, 즉 무명을 멸함으로써 무고안온의 열반을 증득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끝내 마구니의 항복을 받고 더 없이 바르고 참된 평등 원만平等圓滿의 깨닫음,
곧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 ;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곧 수행자 사문 고타마는 부처님이 된 것이다.
"나는 일체의 승자勝者이며 일체의 지자智者이다. 일체법一切法에 물들지 않고 일체를 버렸으며, 갈애渴愛가 다하여 해탈 하였다."{大品}
성도成道란 보편 타당한 우주와 인생의 진리를 올바르게 보고 참되게 알아 그것을 자기화 함으로써 자율적이고 자주적인 인격을 완성한 것이며
그와 같이 인격을 완성한 이를 부처님이라고 한다.
석존의 성씨는 고타마(Gotama), 이름은 싯달타(Siddartha)로 붙여서 고타마 싯달타라고 부르기도 하며, 부족의 이름은 샤카이며
성자란 의미의 무니(Muni)를 덧붙여 석가모니라고 한다.
이 장면은 보리수 아래서 마구니를 항복시키는 모습으로 태자가 마구니들의 온갖 유혹과 위험을 물리치고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는 모습이 묘사.
금강보좌에 앉아 있는 세존을 마군이 내려가라고 방해하는 모습,
정병을 넘어뜨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마군들,
조금도 요동치 않고 오히려 돌비石雨와 바람이 쏟아져 마구니들을 물리치는 모습,
마왕 파순이 딸들(열비悅妃, 희심喜心, 다미多媚)로 하여금 마녀로 변신케 하여 부처님을 유혹하는 장면,
마왕의 무리들이 코끼리를 타고 부처님을 위협하는 장면,
마왕이 1억 8천의 마군을 몰고와 부처님을 몰아 내려고 하나 창칼이 모두 연꽃으로 변하는 장면,
마군을 물리친 부처님이 지신地神에게 증명토록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수인을 나타낸 장면,
이 태자의 전생공덕과 계행을 마왕에게 증명하는 장면,
드디어는 마왕의 무리들이 항복하고
부처님과 모든 천신, 천녀, 군중들의 수희 찬탄하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35세, 12월8일이다)
7) 녹원전법상鹿苑傳法相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룬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모습이다.깨달음을 구한 싯달타는 보리수 아래에 앉은 채 형연 할 수 없는 기쁨 즉 법열法悅에 잠겨 있었다.
대우주 속 조그마한 인간에 불과한 자신이 대우주와 하나의 생명으로 통해 있는 자신을 발견하여 목적을 달성하였다는 만족과 기쁨으로 충만했고
그 만족감과 기쁨은 자신만의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기쁨은 온 누리의 생명이 있는 존재, 즉 중생衆生 모두의 기쁨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이 성불한 기쁨과 만족감으로 혼자 법열에만 젖어있다면 그것은 진실로 부처님이 취할 태도라고는 할 수가 없다.
법열에 잠겨 빙그레 미소 짓고 있는 그 순간에도 중생들은 생, 노, 병, 사의 고통에서 허덕이고 있다.
무엇이 행복이며 괴로움인지 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안락을 누리는 것은 부처님의 도리가 아니다.
처음에는 스스로의 무고안온한 열반을 얻기 위함이지만 완전한 열반이란 개인주의적인 안락만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과 다름없이 보는 대자대비하신 분이다.
자신의 무고안온한 열반을 구한 이를 우리는 벽지불이라고 한다.
보리수 아래서 부처님은 법열의 자리로부터 몸을 일으켰다.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는 움직임의 시작되어 바로 거룩한 부처님의 길이 비롯된 것이다.
진리에 무지한 중생들에게 진리를 어떻게 알려 줄 것인가?
어떻게 그들을 고통의 세계에서 밝음으로 이끌어 낼 수가 있을 것인가?
문제를 안고 처음으로 붓다가야의 녹야원으로 향하셨다.
그 다섯 비구가 수행하고 있었기 곳이기 때문이다. 고타마가 성도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그들은 아는 체를 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고타마가 곁에 이르자 자신들도 모르게 일어나 자리를 권했다.
부처님은 이 자리에서 다섯 비구 즉 교진여, 아사바사, 마하나마, 발제리가, 바사파에게 비로소 가르침을 펼치시니 이를 초전 법륜이라고 한다.
욕락과 고행의 두 극단[二邊]을 버리고 중도를 취할 것과
사성제 팔정도의 법문으로써 그들을 깨우쳐 진리의 세계에 눈뜨게 하였다.
이리하여 비로소 불교가 세상에 출현하게 되었으며 불(佛; Buddha), 법(法; Dharma), 승(僧;Samgha)의 삼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또 근처에서 부호의 외아들로 인생을 비관하고 번민하고 있던 야사(Yasa)라는 청년이 녹야원에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출가하였고,
야사의 부모 아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 불자가 되었는데 이들이 우바새, 우바이의 시초이다.
또 야사의 친구55명도 감화를 받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귀의한 제자가 60명이 되었다.
이들이 진리를 증득하게 되자 부처님은 이들로 하여금 각 지방으로 가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게 하였다.
불본행집경(佛本行集經 전도선언)에 의하면
"그대들은 이미 해탈을 얻었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원하고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가도록 하라.
다른 마을로 갈 때 혼자 가되 두 사람이 한곳으로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대들은 많은 사람들을 연민憐愍하고 섭수하여 이치에 맞게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법하라.
나도 우루벨라의 병장촌으로 가서 설법 교화 하겠다"고 하셨다.
가급적 빨리 많은 곳으로 가서 가르침을 펴도록 하시고 마가다국 왕사성(王舍城;Rajagrha)으로 향하였다.
이 길목에서 30명의 젊은이들을 교화하시고,
우루벨라의 병장촌으로 가셔서 사화외도事火外道의 바라문 가섭 3형제를 교화하여 제자로 삼았다.
이들 가섭3형제는 당시 왕사성에서는 가장 이름 있는 종교가이었으며 국왕인 빔비사라왕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들 삼형제는 부처님보다도 연상이었는데 그들의 제자 등 모두 1000명이 스승을 따라 부처님께 귀의하여 새로운 제자가 되었다.
이들의 귀의로 마가다국 국왕을 비롯한 국민들의 놀라움은 아주 컸다.
그로 인해 국왕과 왕실권속과 많은 신하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랐으며,
그때 가르침을 펼칠 장소를 지어 바쳤는데 이가 바로 최초의 불교 사원 죽림정사竹林精舍이다.
이로서 불교는 왕사성을 중심으로 크게 교세가 확장되어 갔다.
그 뒤 부처님은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가서 부왕을 비롯한 많은 친척과 그 곳 사람들을 교화하고
아우 난다와 아들 라훌라를 출가 시켰을 뿐만 아니라 아난, 데바닷타, 어누룻다등 사촌동생과 적지 않은 석가족 사람들을 교화 귀의 시켰다.
그리고 코살라(Kosala)국의 수도인 사위성(舍衛城: Sravasti)의 큰 부호 수달다(Sudatta)가 많은 재산을 들여
유명한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부처님의 교화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로부터 코살라국의 파세나짓왕과 그의 비 말리부인을 교화하고 기원정사를 중심으로 널리 가르침을 폈다.
부처님이 직접 교화한곳으로는 왕사성과 사위성이 가장 중심지였으며,
북쪽으로는 카필라, 남쪽으로는 바라나시, 동쪽으로는 참파, 서쪽으로는 코삼비 등이 있다.
당시 그 가르침은 파격적으로 각계각층에 펼쳐져서 종래의 풍습에 의해 출가한 수행자나 새로운 출가 수도자나
국왕, 왕비, 귀족, 부호, 평민, 천민이나 모두가 차별 없이 교화 되었고, 큰 감화를 받게 되었다. 신분이나 출신에 의한 것이 아닌 오직 진리에 의한 질서만이 존중되었으며, 여자 출가 수행자[比丘尼]도 나오게 되었다.
-녹야원에서 교진여 등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하는 장면,
-연화좌에 앉아 대중 설법 장면,
-수달다 장자가 기원정사 터를 사기 위해 땅 위에 황금을 깔고 있는 모습,
-아이들이 흙을 쌀로 생각하여 공양하자 부처님께서 이를 탑으로 바꾸는 장면 등.
@ 1) 부처님의 귀향에 따른 왕가의 출가 소동
부처님께서는 성도成道 후 풍찬노숙을 하면서 형극의 고행을 마친 후
4여 년 동안 유행하며 포교 활동을 하시고 많은 제자들과 카필라성으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열렬한 환영 속에서 귀향한 부처님의 영향으로 카필라성은 물론 나라 전체에 새로운 기류가 감돌기 시작하였다.
쌰카족에서는 왕자들이 앞을 다투어 출가를 하게 되자 왕실에서는 후계자의 문제로 큰 파문이 야기되게 되었다.
당시 왕위계승자인 밧디아(Bhaddiya)가 출가를 고집하자 당황한 왕실에서는 출가를 강경하게 반대 저지하였고
상호 대안을 제시하여 결국은 7년을 고집한 밧디아의 뜻과는 달리 7일간으로 단축하여 일곱 왕자들과 출가수행하고 돌아왔다.
이때 함께 출가하게 된 우발리(Upali - 왕궁의 이발사 - 천민인 수드라계급)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교단의 규칙상 먼저 삭발한 사람이 상수인 윗사람 대우를 받게 되는데,
부처님은 우발리가 자신들의 종이였기에 출가 후에도 왕자들이 우발리 위에 있게 되면 자만심이 생겨 수행에 지장을 초래할것으로 생각하여
우발리의 출가를 먼저 인정하고, 우발리부터 순서대로 삭발을 하였다.
불법의 평등사상을 그대로 실천한 본보기로 높이 평가 받을만한 일이었다.
부처님은 그들을 7일간 혼자 있도록 하여 자신들이 과거의 왕자였다는 생각을 완전히 잊게 한 다음
교단의 규칙대로 기꺼이 수행할 것을 다짐받고 정식으로 제자로 받아 드렸다.
그 다음 부왕과 양모인 마하파자파티, 자신의 아내였던 야소다라비, 왕족, 귀족, 일반인등 500여명이 재가신도로 귀의하거나 제자로 출가를 하였다.
왕후 마하파자파티와 야소다라비는 여러 번의 거절에도 불구하고 아난의 노력으로 결국 불교 교단의 첫 비구니가 되었다.
@ 2) 샤카족의 멸망
부처님 당시 강대국의 하나였던 코살라 국 파세나디왕과 빔비사라왕은 부처님의 큰 후원자들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파세나디왕의 뒤를 이은 비두다바(Vidudaha 琉璃)왕에게 샤카족은 멸망하게 되었다.
파세나디왕은 미남 미녀가 많은 샤카족의 왕족이나 귀족의 미녀를 왕비로 삼기를 원하여 청혼을 하였는데, 그 청혼을 거절하기 어려웠던 샤카족은
그 대안으로 왕족 마하나마(Mahanama)와 그 하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왕족이라고 속이고 코살라국 왕비로 시집을 보냈다.
그 몸에서 태여난 아이가 바로 비두다바였다.
그가 성정 하면서 외가집인 카필라 성에 갔을 때 샤카족 사람들은 그를 천민의 자식이라고 경멸하고 모욕을 주었다.
그때 어린 왕자의 가슴에 원한의 싹이 심어져,
부왕 파세나디왕의 제위시는 어쩔 수가 없었지만 자신이 왕위에 오르자 군대를 동원하여 샤카족의 정벌에 나섰다.
그때 부처님은 이미 노년에 접어든 시기였으나 자신의 조국이 멸망하는 것을 차마 보고만 있을수 없어
비두다바의 군대가 진격해 오는 길목에 말라 죽어가는 니그로다 나무 옆 땡볕에 앉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군대를 인솔하여 오던 비두다바는 나무 그늘을 마다하고 태양이 작열하는 땡볕에 앉아 있는 부처님을 발견하고
늙은 노인이 되어 슬픈 모습으로 자신을 기다리는 뜻을 짐작한 비두다바는 부처님께 정중히 예배를 하며,
"부처님이시여! 어찌하여 그늘을 마다하고 이처럼 뜨거운 불볕아래에서 앉아 계십니까?"
"대왕이여! 동족이 없는 것은 그늘이 없는 것과 똑 같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대답하자 비두다바는 군대를 그대로 철수하기를 세 번이나 반복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뿌리 깊은 원한은 참고 참아도 참을 수가 없어
네 번째의 정벌에 오르면서 이번에도 부처님이 보이시면 복수를 영원히 포기하고 되돌아간다는 각오를 하고 달려왔지만
부처님은 보이시지 않자 샤카족을 군왕을 위시한 모든 백성 가릴 것 없이 모조리 살육하였다.
궁전은 불바다가 되고 카필라서은 폐허가 되어 현재는 그 흔적조차도 찾을 수가 없다.
이렇게 철저한 살육 속에서 도 살아남은 두 그룹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불가사의하게 살아 남았다.
부처님께서는 망어(妄語; 거짓말)을 경계를 하였는데 이 가르침을 지키는 샤카 족 사람들 목에 칼을 들여댄 병사들은 물었다.
"너희들은 샤카 족이냐? 코살라 족이냐?"
만일 정직하게 샤카 족이라고 대답하면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는 판이다.
이 광경을 지켜본 한 장로는 너무나 참혹한 일이라 생각한 나머지 방편을 생각해 내었는데.
인도 사람들은 지금이나 예나 즐겨 씹는 담배풀이 있는데 이 풀은 이 앓는 데도 씹었다고 한다.
이것을 씹고 있으면 대답을 하지 않아도 거짓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그 씹는 담배풀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서 샤카 족은 멸망하고 코살라국 역시 머지않아 마가다국에 멸망을 당하여 마우리야 왕조의 일부가 되고 말았다.
너무나 정확한 인과응보라 하지 않을 수가 없다.
8) 쌍림 열반상雙林涅槃相
쿠시나가라(Kusinagara) 니련선하泥蓮禪河 사라쌍수 아래서 80세의 생애를 마치고 열반에 든 모습을 표현.
부처님께서는 바아살리 근처 대림중각강당大林重閣講堂에서 설법 끝에 석 달 후에 입멸을 예고 하셨다.
그 후 쿠시나가라로 가시던 중에 대장장이 춘다(Cunda)의 버섯죽 공양을 받으시고 아무 차별 없이 드셨다.
춘다의 공양을 수자타의 공양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보셨던 것이다.
부처님은 성도한지 45년이 되는 80세 때에 북쪽 쿠시나가라의 살라나무사이[少羅雙樹間]에 자리를 잡고
아난을 비롯한 여러 제자들에게 마지막 말씀을 하셨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를 의지하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의지하라. (自歸依 法歸依 自燈明 法燈明)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너희들은 내 가르침을 중심으로 서로 화합하고 공경하며 다투지 말라.
물과 젖처럼 화합할 것이요, 물 위의 기름처럼 겉돌지 말라.
다함께 교법敎法을 지키고 배우며 수행하고 부지런히 힘써 도道의 기쁨을 누려라.
나는 몸소 진리를 깨닫고 너희들을 위해 진리를 말하였다.
너희는 이 진리를 지켜 무슨 일에나 진리대로 행동하여라.
이 가르침대로 행동한다면 설사 내게서 멀리 떨어져 있다 하여도 그는 항상 내 곁에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죽음이란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
육신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므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여래는 육신이 아니라 깨달음의 지혜이다.
육신은 여기에서 죽더라고 깨달음의 지혜는 영원한 진리와 깨달음의 길에 살아 있을 것이다.
내가 간 후에는 내가 말함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이 말씀을 남기시고 부처님은 열반에 드셨다.
부처님의 육신은 이 세상을 떠났지만 그 가르침은 어두운 밤에 등불처럼 중생의 앞길을 밝게 비추고 있다.
사라쌍수 아래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 열반에 드시는 장면,
사라쌍수 아래 길게 누워 열반에 드신 부처님과 그 주위로 비탄에 잠겨 있는 사부대중과 천룡팔부중의 장면,
가섭이 크게 슬퍼하자 부처님의 두 발을 관 밖으로 내보이시는 장면,
아나율존자가 하늘로 올라가 부처님의 열반 소식을 전하자 마야부인이 천녀들과 허공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꽃을 뿌려 공양하는 장면,
관이 성밖으로 저절로 들려 나가는 장면,
다비를 하니 사리가 비 오듯이 쏟아 졌는데
이 사리를 모시려는 여덟 나라 왕들에게 바라문이 골고루 나누어주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열반은 성도하신지 45년 세수 80세 때인 B.C 544년 2월 15일에 드셨다.
1) 예천 용문사 팔상도 : 보물 제 1330호
조선 숙종(1709년) 때 제작된 것으로 우리나라 팔상도 중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조선 전기의 도상과 화풍의 흐름을 잇고 있다.
화면의 구성이 간결하면서도 주제가 뚜렷한 것이 특징이다.
2) 순천 송광사 팔상도 : 보물 제 1368호
용문사 팔상도 다음으로 이른 시기에 제작되었다.
여유로운 경물의 배치와 수목을 자연스럽고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3) 하동 쌍계사 팔상도 : 보물 제 1365호
송광사 팔상도와 유사한 형식.
4) 보은 법주사 팔상도 :
5) 경주 골굴사 외벽에 있는 그림...
하나의 벽화에 모두 들어 있다.
작은 행복을 함께 나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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