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드레 김
또 한분의 죽음을 바라보고 있다. 먼저 머리 숙여 고인의 명복을 진심으로 빈다.
나는 결국 그분이 살아 있을 때 “앙드레김”이라는 브랜드 옷을 한 번도 사 입지 못하고 말았다. 값싼 짝퉁(가짜) 옷은 몇 번 사 입었던 기억이 나지만.... 어찌 서민들이 그가 디자인한 브랜드 의상을 사 입을 수가 있겠는가. 앙드레김 의상은 가격을 보고 사 입는 것이 아니라 맞춰 사 입되 그 가격을 묻지 않는다는 일화도 있다.
앙드레 김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세계 패션계의 거장. 그의 죽음으로 패션계와 연예계는 물론 온 나라가 슬픔에 젖어있다. 폐렴으로 2010년8월12일 타계했다. 향년 75세. 결혼을 하지 않았지만 유족으로 1982년 입양한 아들(중도 30)이 있다.
그의 나이 75세이니 요즘으로 따지면 장수 했다고는 볼 수 없다. 넘쳐나는 부와 명예를 누리고 산 그도 별수 없이 폐렴이라는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죽으니 정말 삶이란 무상한 것임을 절감한다.
죽음, 죽음, 죽음...... 죽음은 타인의 것인가? 타인의 것인 줄만 알았던 그 죽음이 이제는 내 것이되어 서서히 아주 서서히...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도 다가 올 것이라는 것을 느낀다.
오늘 앙드레김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또 한분의 큰 별이 유성처럼 떨어 졌음을 안타까워하고 나 또한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 둬야 하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내 주변을 잘 정리 정돈 해 두자. 나의 흔적들을 잘 살펴서 버릴 것은 버리고, 남겨 둬야 할 것은 잘 정리해 두자. 필요하면 유서도 써 놓고, 처자식들에게 물려줄 재산은 없지만 내가 즐겨 읽던 책 한 권이라도 잘 챙겨서 정리해 두자.
다시한번 “앙드레김” 님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분의 명복을 빈다.
>2010.8.13 미지로
----------------------------------------------------------------------------------
앙드레 김 프로필
1935년 서울 구파발에서 농사를 짓던 집안의 2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난 앙드레 김은 고등학교 졸업 후 1961년 고(故) 최경자씨가 서울 명동에 설립한 국제복장학원 1기생으로 입학해 디자이너 수업을 받았다.
1962년 서울 반도호텔에서 첫 패션쇼를 열고 한국 최초의 남성 패션 디자이너로 데뷔한 그는 이후 서울 소공동에 '살롱 앙드레'라는 의상실을 열고 본격적인 패션 디자이너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4년 당대 최고 인기배우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 때 엄앵란의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했고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한국 국가대표팀의 선수복을 디자인하는 등 유명 인사들의 옷을 디자인하면서 명성을 쌓았다.
1962년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 디자이너 최초로 패션쇼를 연 것을 비롯해 이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와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중국 베이징의 인민대회당, 이집트 피라미드 앞 등 국내외 수많은 곳에서 수백여차례 크고 작은 패션쇼를 열고 자신의 독창적인 패션을 선보였다.
패션에 대한 열정과 공로를 인정받아 1977년 패션디자이너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으며 2000년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학훈장을 받기도 했다.
1992년 이른바 '옷로비 사건' 청문회 증인으로 나선 자리에서 본명(김봉남)이 알려지며 곤혹을 겪기도 했으나 이후 흰 옷만 입는 패션과 외국어를 섞은 어눌한 말투 등 독특한 말과 행동 등으로 종종 TV 프로그램의 단골 소재가 되는 등 연예인 못지않은 대중적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1982년 입양한 아들 중도(30)씨가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