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제20호(다보탑). 제21호(석가탑)

migiroo 2010. 9. 20. 00:24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6)


 ▸국보 제20호(다보탑). 제21호(석가탑)

 
●불국사 다보탑(多寶塔) 과 석가탑(釋迦塔)
     -통일신라(불국사 대웅전 앞)

 

○인간의 소망을 형상화한 간결함과 조화미의 극치


불교 조각 미술의 백미-
조화미의 극치-
불교 상징세계의 함축적 표현-
완벽한 조화와 황금비율-
신앙심의 결정체-
심오한 극락정토의 표현-
인간의 소망을 형상화한 상징물-


석가탑과 다보탑을 평할 때 전문가들은 주저 없이 이렇게 극찬한다.
최고의 미사어구를 동원하여 찬사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렇다.
지극히 간결하고 단순하면서도 모든 것이 함축되어 있는 석가탑...
지극히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결코 뽐내지 않는 절재 된 다보탑...


석가여래를 모신 대웅전 앞에 서서 석가탑과 다보탑을 바라본다.
완전히 형식이 다른 두 탑을 말 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이 가슴으로 가득 채워 옴을 느끼게 된다.


그 작은 석탑들이 왜 이렇게 크게 보이는 것이며,
그 앞에 서있는 내 자신은 왜 또 이렇게 작아 보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현대 미술의 조각술이 아무리 뛰어난다 해도 저런 작품을 결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처음 무(無)의 세계에서 유(有)의 세계로 우주(서방정토)와 인간세계를 초월(超越)적으로

함축시켜 상징적 불교적 세계를 표현 한다는 것은  첨단 문명에 익숙한 현대인들의 정신세계에서는

그 같은 창조적 작품이 결코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의 기술로서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과 똑같이 복제품을 만들어 전시해 놓은 곳이 있다.

바로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있다.(1970년대 박대통령 지시로 만듦)
외형적으로는 진짜와 똑 같이 정말 첨단 기계로 잘 깎아 세운 탑이지만 그저 탑일 뿐이지 앞에서

말한 극찬의 미사어구가 절로 나오지도 않으며 탑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앙적 정신의 서기(瑞氣)

또한 느껴지지 않는다.

 

 

기술, 열정만 가지고는 불국사의 석가탑이나 다보탑 같은 전후무후 한 탑을 결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바로 혼과 정신, 신앙심이 들어가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석탑 조성을 소망하는 수많은 불자들의 간절한 염원의 발원 하에 탑을 만드는 장인들이 100일, 1,000일,

1,000배, 만배(萬拜)...
오체투지로 부처님께 기도 한 후 돌 하나, 하나를 깎아 다듬고, 차디찬 폭포수에 몸을 씻고 정신을 닦아

석탑을 쌓았기 때문에 천 수백 년 모진 풍파의 세월 동안도 끄떡없이 견뎌낸 지금의 석가탑과 다보탑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어찌 석가탑과 다보탑의 그 함축적 상징성을 다 풀어서 여기에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나의 안목의 한계는 여기까지이다.

다만 두 탑을 풀어서 설명한다면 이렇게 밖에 표현할 밖에 없다.


온 불경이 그 안에 다 들어가 있고,
온 부처의 세계가 다 표현되어 있고, 
온 불자들의 염원이 다 들어가 있다.


불경을 읽어 헤아릴 줄 안다면 석가탑과 다보탑의 의미를 알 수 있고,
부처의 세계를 들여다 불 수 있는 혜안이 열렸다면 탑의 상징성을
가르쳐 줄 것이고, 불자들의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다면
탑이 왜 쌓여졌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두 탑의 조성경위, 역사, 탑의 형식, 규모 같은 문화재적인 학술적 내용은 적지 않는다.
다만 두 탑을 바라보는 나의 감각과 느낌을 적었을 뿐이다.
그 마저도 나의 글 표현의 한계성으로 인하여 두 탑에 대한 생각을
좀 더 매끄럽고 품위 있는 표현을 구사하지 못했다.
어디는 표현이 거칠고, 어디는 조악한 표현이 되 버렸으니
존엄한 두 탑에 대한 모독(?)이고, 누가 되지 않았나, 걱정 된다.


석가탑의 원래 이름은‘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이며,
흔히 줄여서 석가탑이라고도 한다. 또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에서 유래한
무영탑(無影塔)이라고도 하는데 아무튼 석가탑은 현세불의 석가여래을 상징하고,
다보탑의 원래 이름은‘다보여래상주증명탑(多寶如來常主證明塔)’으로
과거불의 다보여래을 상징한다.

 
우리 문화재청 지정 이름은 송구스럽게도 그냥 ‘불국사삼층석탑’이고,
'불국사다층석탑(다보탑)'으로 한 마디로 종교적 상징성을 빼버린 이름이다.
국보20호, 21호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탑 자체가 국보(20,21호)급 문화재이지만
그 뿐이 아니고 석가탑 안에서 나온 사리장구 등 각종 유물들이
모두 국보급 최고의 문화재로 일괄 지정(국보126호)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들을 일일이 소개 할 수는 없지만 사진만이라도
몇 개 선별하여 아래에 올린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더 많은 유물들이 나올 법한 다보탑에서는 남아 있는 유물들이 하나도 없다.

왜 그럴까?
모두 일제강점기 때 그 nom 들이 약탈해 갔기 때문이다.


1925년 일본인들이 다보탑을 해체, 보수하는 과정에서 탑 내부에 있던 사리와 사리장치 등의 유물을

몽땅 약탈해 갔고 그 뿐만 아니라 탑 기단부에 있는 네 마리 석사자상 가운데 세 마리도 가져갔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 마리는 지금 영국 대영박물관에 있다하며 나머지 두 사자상은 행적을 알 수가 없는

형편이란다.


그나마 다보탑의 4마리 석사자상을 보려면 현재의 국립경주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세운 복제품 다보탑

(석가탑도 있다.)에 가면 볼 수가 있으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이와 같이 석가탑과 다보탑은 천 수 백년 세월의 자연의 풍파는 잘 견뎌 왔으나 인간들에 의한 세파는

견뎌 낼 수가 없어  수많은 인위적인 수난사를 겪어 왔으니 정말 유감스러운 일이다.
그 중에서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일제강점기 시기의 수난이다.
약탈당한 다보탑의 석사자 자리에 복제품이라도 채워 넣지 않고 그냥 비워둔 체로 놔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아픔의 역사이기 때문일 것이고, 우리들이
기억하고 있어야할 비운의 역사이기 때이다.


지금 다보탑에는 한 마리의 석사자가 홀로 탑을 지키고 있고,
언젠가는 잃어버린 3마리의 동료 사자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한 마리는 영국에 있다는 것이 확인 됐으니 나머지 두 마리는 분명히
일본 어딘가에 있을 것이니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들 몫이다.
 

 

다보탑에 사자 상을 배치한 것은

그냥 보기 좋으라고 한 것이 아니다.
사자는 불교에서 어떤 존재인가?
묻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어흥~”


사자의 우렁찬 포효(咆哮) 소리가

들이는 듯하다.


바로 ‘사자후(獅子吼)’ 이다.


‘사자후’ 이 한 마디에 사자를 왜 탑에

안치 했는지 설명이 되고도 남을 것이니

더 이상 언급을 하지 않겠다. 
 

불국사는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제불(三世諸佛)이 상주하는 불국정토를 이 땅에 구현하려 했던 신라인의 정신세계가 이룩한 절이다. 불국정토의 한 영역인 대웅전 앞마당에 동서로 다보탑과 석가탑이 단아하면서도 근엄한 모습으로 우뚝 서있는데, 석가탑은 흔히 보는 석탑처럼 생겼으나 단순한 사리 봉안처가 아니며, 다보탑은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었으나 석조 공예미를 과시하기 위해 만든 탑이 아니다. 이 두 탑은 영산회상에서의 “석가여래 상주설법(釋迦如來常住說法)”과 “다보여래 상주증명(多寶如來常住證明)”의 장면을 환상적 수법으로 상징화 한 탑인 것이다.(*허 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

 
불국사이 석가탑과 다보탑 이야기는 몇날 며칠을 해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여기에서 나의 짧은 소감을 마무리 하고 특별히 석가탑과 다보탑에 있는 특이한
구조물에 대하여 한 가지씩 언급하기로 한다.

 

 

●석가탑 아래의 팔연화좌(八蓮華座) 
 

 

 

석가탑 아래에 사방으로 8개의 연화좌(연꽃무늬 좌대)가 있다.
석가여래의 영산 설법 당시 무수한 부처들이 모여들어 석존 주변의

팔방에 둘러앉았다는 경의 내용을 구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지대석 아래에 작은 바위들이 불쑥, 불쑥 솟아 있는 것이 보인다. 
이는 산을 의미하고, 탑 주변 8방에 장식된 여덟 개 연꽃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8방에 앉은 여러 부처님의 연화좌(蓮華座)를 상징하는 한다.


 

●다보탑의 특이한 구조 
 

 

 

다보탑은 어떤 석탑과도 닮지 않은, 아주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마치 나무를 깎아 만든 목조 건물의 복잡한 구조를 단단한 화강석을
이용해 아름답게 표현한 탑으로 그 모습이 경쾌하면서도 장려하고,
번잡한 것 같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정연함과 통일성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돌을 나무 깎듯이 자유자재로 다룬 기법은 놀랄 만한 것으로
세계의 어느 탑에서도 그 유래를 찾기 힘든 것이고,
미술학적으로 봐도 석조 조각품으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탑이 바로 다보탑이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인상보다도 탑을 이루고 있는 여러 구조물에
담겨 있는 상징성은 더욱 복잡하고 깊고도 오묘함이 서려 있다.


갑석 위에는 4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돌기둥을 돌려 팔각연화석

(八角蓮華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蓮華石)위에는 8개의 기둥머리 모양의 받침

(장화모양)이 있어 8각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8각의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 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백번, 천번 가 봐야지 비로소 그 보는 안목이 조금 트일 것이다.

 

나는 행복하게도 경주 인근에 살고 있는 덕분에 불국사에 자주 가는 편이다.
그런데도 그 장엄한 불국의 화엄세계를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그냥 화려한 불국사의 전각이나 석축과 석가탑, 다보탑 같은 문화재만 보고
왔을 뿐이다.

 

그런 내가 어찌 세계문화유산의 찬란한 걸작 품

석가탑과 다보탑을 말 할 수 있겠는가.
그저 아는 만큼만, 느낀 만큼만....

말한 것 뿐이다.

그래서 쑥스럽고,

부담스럽고 

부끄럽다. 

 

 

>미지로 생각

 

 

 

 

■문화재 설명(*문화재청)


●석가탑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혜공왕 10년(774) 12월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한 후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불국사삼층석탑과 불국사다보탑(국보 제20호)은 절의 대웅전 앞 뜰 동서쪽에 각각 세워져 있는데, 서쪽탑이 삼층석탑이다. 탑의 원래 이름은 ‘석가여래상주설법탑(釋迦如來常住設法塔)’으로, ‘석가탑’이라고 줄여서 부른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하는 것을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에 따른 것이다. 탑은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때 조성된 것으로 추측되며,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석탑으로,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과 고선사지삼층석탑(국보 제38호)의 양식을 이어받은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훌륭한 작품이다.


탑 전체의 무게를 지탱할 수 있도록 2층의 기단이 튼실하게 짜여 있으며, 목조건축을 본따서 위·아래층 기단의 모서리마다 돌을 깎아 기둥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탑신에도 그러한 기둥을 새겼으며, 지붕돌의 모서리들은 모두 치켜올려져 있어서 탑 전체에 경쾌하게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더한다. 1966년 9월에는 안타갑게도 도굴꾼들에 의해 탑이 손상되는 일이 있었으며, 그해 12월 탑을 수리하면서 2층 탑신의 몸돌 앞면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던 사각형의 공간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여러가지 사리용기들과 유물을 찾아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국보 제126호)이다. 이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로 닥나무 종이로 만들어졌다. 탑의 머리장식(상륜부)은 16세기 이전에 유실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73년 남원 실상사삼층석탑(보물 제37호)의 머리장식을 본따서 복원하였다. 탑 주위로 둘러놓은 주춧돌 모양의 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는데, 이를 부처님의 사리를 두는 깨끗한 곳이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탑은 ‘무영탑(無影塔:그림자가 비치지 않는 탑)’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여기에는 석가탑을 지은 백제의 석공(石工) 아사달을 찾아 신라의 서울 서라벌에 온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보지도 못한 채 연못에 몸을 던져야 했던 슬픈 전설이 서려 있다.


불국사(佛國寺) 대웅전(大雄殿) 앞뜰에 동서로 세워진 두 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일반형 석탑으로, 각부의 비례가 아름다운 우수작의 하나이다. 기단부는 몇 장의 돌로 결구(結構)되었고, 아래위 면석(面石)은 탱주(탱柱) 둘을 세워 3구(區)로 구분하였다. 탑신부는 탑신과 옥개석(屋蓋石)이 각각 한 돌로 되어 있고, 옥신(屋身)에는 우주(隅柱)가 표현되어 있으며, 옥개받침은 층마다 5단이다. 상륜부(相輪部)는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까지만 남고 나머지는 없어졌다. 특히 탑 주위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연화(蓮華)가 조각된 8개의 둥근 돌을 돌리고, 이들 연화석(蓮華石) 사이에 긴 돌을 끼워 경계를 삼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팔방금강좌(八方金剛座)’이다. 정역(淨域)을 나타내기 위한 시설이라고도 해석되며, 한편으로 연화대(蓮華臺) 위에 8보살(菩薩)을 안치하여 공양하는 의태(意態)를 나타내려 한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탑은 일명 석가탑(釋迦塔)이라고 하는데, 동쪽의 다보탑(多寶塔)에 대한 호칭으로, ‘법화경(法華經)’에 보이는 석가여래(釋迦如來) 상주설법(常住說法)의 상(相) 곧 다보여래(多寶如來)와 나란히 앉기 이전의 상(相)으로 해석된다. 동서 두 탑의 대조가 묘할 뿐 아니라 조형(造形)이 소박 장중하여, 신라(新羅) 석탑 중에서 하나의 전형이라고 할 만하며, 이 탑의 건립연대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정된다.

 

●다보탑

 


불국사는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의 발원에 의해 창건된 사찰로, 과거·현재·미래의 부처가 사는 정토(淨土), 즉 이상향을 구현하고자 했던 신라인들의 정신세계가 잘 드러나 있는 곳이다.『삼국유사』에는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서 석굴암을,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지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가 목숨을 다할 때까지 짓지 못하여 그 후 나라에서 완성하여 나라의 복을 비는 절로 삼게 되었다. 다보탑과 석가탑(불국사삼층석탑,국보 제21호)은 우리나라의 가장 대표적인 석탑으로, 높이도 10.4m로 같다. 절내의 대웅전과 자하문 사이의 뜰 동서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동쪽탑이 다보탑이다. 다보탑은 특수형 탑을, 석가탑은 우리나라 일반형 석탑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두 탑을 같은 위치에 세운 이유는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多寶佛)이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가 설법할 때 옆에서 옳다고 증명한다는『법화경』의 내용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탑으로 구현하고자 하기 위함이다.


석가탑을 보면 2단의 기단(基壇)위에 세운 3층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지만, 다보탑은 그 층수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십(十)자 모양 평면의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로는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탑이 건립된 시기는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으로 추측된다. 목조건축의 복잡한 구조를 참신한 발상을 통해 산만하지 않게 표현한 뛰어난 작품으로, 4각, 8각, 원을 한 탑에서 짜임새있게 구성한 점, 각 부분의 길이·너비·두께를 일정하게 통일시킨 점 등은 8세기 통일신라 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다보탑에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겼던 설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1925년경에 일본인들이 탑을 완전히 해체, 보수하였는데, 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또한 탑 속에 두었을 사리와 사리장치, 그 밖의 유물들이 이 과정에서 모두 사라져버려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기단의 돌계단 위에 놓여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가운데 보존상태가 가장 좋았을 듯한 3마리가 일제에 의해 약탈되어, 이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오래전부터 있었으나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한국(韓國)의 석탑 중에는 일반형을 따르지 않고 특이한 모양을 지닌 것이 몇 기(基) 있는데, 이 탑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이만큼 기발한 의장(意匠)으로 이루어진 탑은 없다. 불국사(佛國寺) 대웅전(大雄殿) 앞에 서쪽 석가탑(釋迦塔)과 대조를 이루어 동쪽에 자리한 탑으로, 감은사(感恩寺) 다음가는 전형적인 쌍탑가람(雙塔伽藍)의 배치를 보여준다. 기단부는 4방에 보계(寶階)를 마련하였는데, 보계에는 난간을 설치했던 돌기둥이 남아 있다. 그 위는 네 모서리와 중앙에 4각형 돌기둥을 세우고 교차되는 받침을 얹어 갑석(甲石)을 받치고 있다. 이 기단에는 원래 네 모서리에 석사자(石獅子)를 배치하였으나 지금은 1구(軀)만 남아 있다. 갑석 위에는 4각형 난간 속에 8각 신부(身部)를 두었으며, 다시 8각 갑석을 덮고 8각 난간을 돌린 다음, 그 안에 8개의 죽절형(竹節形) 돌기둥을 돌려 팔각연화석(八角蓮華石)을 받치고 있다.


연화석(蓮華石) 위에는 8개의 기둥머리 모양의 받침이 있어 8각 옥개석(屋蓋石)을 받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는 8각의 노반(路盤)·복발(覆鉢)·앙화(仰花)·보륜(寶輪)·보개(寶蓋)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다. 이 탑의 구조는 완전히 의표(意表)에서 벗어난 참신한 착상으로 이루어져서 전무후무한 걸작을 남겼고, 조법(彫法)에 있어서도 마치 목조건축을 보는 듯 우려하며, 복잡한 아래위의 가교(架橋)가 중심에 통일되어 한 점의 문란함도 없다. 이 탑을 다보탑(多寶塔)이라고 하는 것은, 다보여래(多寶如來)가 석가여래(釋迦如來)와 나란히 앉아 석가의 설법을 증명하는 상으로 해석되는데, 동양의 불교국가에서 석조(石造)로서는 가장 뛰어나고 오랜 작품이다. 이 탑은 서쪽의 삼층석탑(三層石塔)과 함께 불국사가 창건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925년에 수리를 한 바 있다.(*자료출처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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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다보탑 일러스트 그림과 기타 사진 일부는 인터넷에서 공개된 사진을 옮겨온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