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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290호- 통도사대웅전 및 금강계단 (제2편)

migiroo 2010. 9. 29. 14:53

 

▷제2편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9)


▶국보 제290호

 

●통도사대웅전 및 금강계단 (通度寺大雄殿및金剛戒壇)


 

▶금강계단 적명보궁 대사리단 석조미술의 극치.

 

 

 

전에는 통도사 금강계단이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 보려면 대웅전 담장
너머로 발을 고추 세워 고개를 내밀어 간신히 보아야했다.
그나마 전체를 보지 못하고 겨우 금강계단 한쪽 귀퉁이만 보곤 했다.
그런데 요즈음은 새로 오신 주지 스님 덕분에 금강계단 안까지 들어가서
참배는 물론, 찬란한 석조미술의 각종 문양들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게 됐다.
이 얼마나 영광이고 행운인가.


그러나 함부로 불쑥불쑥 들어가 그 신성한 곳을 더럽혀서는 안 될 것이다.
최소한 옷깃을 잘 여미고 정갈한 마음으로 예를 갖추어 들어가야 한다.
더욱이나 관광하는 곳이 아니고 구경하는 곳이 아니다.
불자든 불자가 아니든 손을 합장하고 아주 천천히 경건한 마음으로
사리단을 한 바퀴 돌아 조용히 나와야 할 것이다.

 

 

 

금강계단이 뭣인가?
여기에 굳이 그 의미를 옮기지 않는다.
이미 웬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승려들의 수계(受戒) 의식을 행하는 계단(戒壇)이 남아 있는 곳은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비롯하여 금산사의 방등계단(方等戒壇,보물26호),
달성 용연사의 석조계단(보물 539호) 등이 현존하는 유일한 계단이다.


계단은 네모난 2층 석단의 형태를 기본 구조로 한다.
물론 인도에서 유래되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전해졌고,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때에 자장율사가 당나라 종남산 운제사(雲際寺)에서
불경과 불사리를 모시고 와 통도사에 금강계단을 만든 것이 그 시초가 됐다.

 

 

 

통도사의 금강계단의 금강이란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얻은 이름이고,
수계를 받은 승려들이 한번 계를 받으면 영원히 잃지 않고 금강석처럼
깨뜨릴 수 없다는 의미로 금강계단이라 한 것이다.
또한 삼학(三學)의 계(戒), 정(定), 혜(慧) 중에 계율이 가장 으뜸이라는
뜻에서 금강계다이라고 한다.


특히 대웅전 건물의 동, 서, 남, 북 네 방향에 네 개의 각기 다른
현판이 달린 것도 금강계단과 연관성이 있다.
즉,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계시니 적멸보궁이고,
부처님의 사리탑을 봉안 하였으니 금강계단이다.
법신불이 상주하는 대화엄의 근본 도량이니 대방광전이고,
석가모니불을 모신 곳이니 대웅전이다.
이제 왜, 한 건물에 현판(편액)이 네 개아 걸려 있는지 알게 됐다.
삼위일체(三位一體)가 아니라 사문일체(四門一體)이다.
문은 네개 이지만 하나라는 뜻이다.

 

 

 

대사리단(금강계단)의 남쪽에는 2구의 여래좌상을,
서, 북, 동쪽에 각 1구씩의 여래좌상을 마애불로 조각해 놨다.
그리고 여래상의 사이사이에는 천인상을, 그 위 상단에는 비천상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하늘을 날고 있다.
또한 계단의 맨 외측 네 귀퉁이에는 사리탑을 호위하는 사천왕상이 있다.

 

 


계단의 기단은 상하 2층으로 대석, 면석,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고,
석단 중앙에는 불사리를 봉안한 석종형 부도 사리탑이 있다.
학자들은 사리탑 모양을 석종형(종모양)이라 부르지만...
나는 사리탑(부도) 모양을 연꽃봉우리 모양으로 보고 싶다.

사리탑에는 아홉 개의 용머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석존이 탄생할 때
9마리의 용이 물을 뿜어 목욕을 시켰다는 설화를 상징화 한 것이라 한다.

 

 

▶금강계단으로 들어가는 석문(石門)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된 석문은 대사리탑으로 들어가는 문을 상징적으로
극대화 시킨 것이고, 아치형 문기둥에는 두 마리의 용이 구름을 휘감고
여의주를 물고 있다.
그리고 들어가는 문짝에는 금강역사가 서서 문을 지키고 있다.
금강역사의 입 모양은 역시 "아. 흠" 이다.

 

 

▶네 방향을 지키고 있는 사천왕상


대사리단 네 귀퉁이에는 아주 깊은 돋을새김의 사천왕상이 새겨져 있다.
이 사천왕상은 불사리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한다.

 

 

 

금강계단 석물에는 이외도 석등을 비롯하여 수많은 문양의 불교 조각들이
새겨져 있는데 솔직히 말해서 석문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조각술이
거칠고 정교하지 못하고 어떤 것은 해학적이기 조차하다.
그러나 그 거칠고 섬세하지 못함에서 통도사 대사리단의 석조미술의 진가를
발견 할 수가 있다.

 

 

 

 

 
금강계단의 기단면의 금강역사상 과 석등 상대석과 옥개석에 새겨진 인물상을 보자.
얼마나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운가.
석등의 인물상은 마치 돌하르방같이 뭉떵한 코와 부리부리한 눈망울을 하고 있다.
그런데 성역인 금강계단 석물 장식에 왜 이런 해학적인 인물상들을 거칠고 조악하게
조각 했을까, 하고 의문이 든다.
그것은 아마도 귀족이 아닌 민중을 함께 아우른다는 부처님의 평등정신을
표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면서...


이제 국보 290호 통도사의 대웅전과 금강계단에 대한 나의 소감을 끝내려한다.
처음엔 그저 간단한 소감문만 올리려 했지만 글이 길어지고 말았다.
좋은 말도 길어지면 잔소리가 되어 잘 듣지 않는 것처럼
글 또한 길어지면 잘 읽어 보지 않는다.


모두가 그 놈의 욕심 때문이다. 집착에 대한 과욕이다.
그러나 어찌 통도사의 금강계단을 이야기 하면서 단 몇 줄로
그 깊고도 넓은 부처님 세계를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글은 답사 소감문이지 국보급 문화재에 대한 설명문이 아니다.
그런 것은 아시는 분들이 많고 인터넷 검색을 해 보면 얼마든지 좋은
자료가 나와 있어 찾아보면 되고 굳이 여기에 설명문까지 달 필요가
없다고 여겨 생략했다.
 

그러나 이 같은 내 소감문이 설령 잘못되고 오해나 왜곡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지적하여 주시고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여기에 올려 진 사진 일부 중에는 인터넷에 공개된 것을 인용했음을 밝혀둔다.

 

 

▶마지막으로 ◇사찰(유적) 답사는 이렇게...

 

 

 

통도사 같은 대찰을 제대로 답사하려면 1년 365일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매일 답사를 한다 해도 모두 보지 못 할 것이다.
그런데도 불과 몇 시간 만에 그 넓은 사찰을 모두 보고 오겠다는 것은
지나친 과욕일 뿐만 아니라 수박 겉핥기식 답사가 될 것이 뻔하다.


대찰 같은 곳의 답사 요령은 욕심을 버리는 것이다.
한 번에 다 보려 하지 말고 자기가 보고 싶은 몇 곳만 골라서
집중적으로 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답사 요령이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곳, 남이 잘 보지 않는 곳을 보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전각 창호의 꽃살문은 어떤 꽃인가.
계단 밑에 새겨진 조각은 어떤 문양인가.
법당 안 천정의 단청은 어떤 것인가.
부도 대좌에 새겨진 문양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건물 벽에 그려진 벽화는 전각마다 어떻게 다른가.
등등 이런 것들이다.


전체 보다는 부분을 잘 관찰하는 습관을 길러야 좋은 답사가 된다.
그리고 메모하고 사진 찍고...
집에 와서 차분히 관련 자료를 찾아보고...
이게 답사를 즐기고 좋은 답사를 하는 요령이다.


답사는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느끼고 담아 오는 행위이다.  


그러나 통도사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부처님께 절 한번 올리지 않고
신성한 금강계단에 올라 구경하는 사람들...
경내를 떠들면서 휘젓고 돌아다니는 관광객들....
산에 갔다 내려오면서 들르는 등산객들...


이런 사람들이 너무 많다.
부처님은 많은 사람들을 좋아하시지만
과한 것은 싫어하신다.

 

>미지로 생각

 

 

 

 ■문화재 설명(*문화재청)


●통도사대웅전및금강계단 (通度寺大雄殿및金剛戒壇)
  -국보 제290호


통도사는 우리 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손꼽히는 큰 절로,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율사가 세웠다고 한다.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법당을 가리키지만, 이곳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불상을 따로 모시지 않고 건물 뒷면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여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다.그 때문에 통도사라는 절 이름도 금강계단을 통하여 도를 얻는다는 의미와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극락으로 이끈다는 의미에서 통도(通度)라고 하였다 한다.


지금 건물은 신라 선덕여왕(646) 때 처음 지었고,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조선 인조 23년(1645)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5칸이고, 지붕은 앞면을 향해 T자형을 이룬 특이한 구성을 갖추고 있다.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계 양식으로 꾸몄다.건물 바깥쪽 기단 부분과 돌계단 층계석, 계단 양쪽(소맷돌)부분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금강계단은 금강과 같이 단단하고 보배로운 규범이란 뜻이다.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지금 있는 금강계단은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여러 차례 수리한 것이다.양식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금강계단 형태를 띠고 있는데, 가운데에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1층 기단 안쪽 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바깥쪽 면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의 모습을 조각하였다.지은 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 건축인 대웅전과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담고 있는 금강계단은 각각 건축 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戒壇)이 가지고 있는 그 의미에서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