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제78호 와 제83호-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migiroo 2010. 10. 1. 00:25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10)


▶국보 제78호 와 제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삼국시대(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여정~

 

 

 

9월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분을 찾은 날은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도착 했을 때는 비는 더 세차게 내렸다.
마치 여름 장맛비처럼 그렇게 비는 세차게 내렸다.
나는 곧 바로 그분(국보83호)이 있는 전시관 3층으로 올라갔다.


그분은 무슨 죄(?)를 지으셨는지 깜깜한 독방에 갇혀(?) 있었다.
아니 독방 안에 또 작은 독방(유리관)에 한 치의 공간도 없이
밀폐되어 있었다.

 

  ▲국보 83호


캄캄한 방 안은 츱츱한 침묵과 정지 된 시간들로 가득 차 이었다.
다만 몇 줄기 인위적인 불빛이 희미하게 그분을 비추고 있었는데
그것은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한 조명 불빛 이었다.
단 한 사람, 어떤 중년의 여인이 그분 앞에 서서 두 손을 합장하고

유리관 속의 그분을 들여다 보고 있었다. 

 
그분(83호)은 추호도 동요 없이 손에 턱을 고이고 깊고도 깊은 사유에 들어 계셨다.

내가 들어가 인기척을 내도 그분은 들은 척도 안 하고 오직 침묵의 유희(遊戱)를

즐기고 계시는 듯 했다.


아래 사진은 그 날 찍은 것이다.
그 분의 옆에 희미하게 보이는 영상은 유리관에 비친 그분의 또 다른 모습이다.

 

   ▲국보 83호

 

이름이‘금동미륵반가사유상’이다.
그러나 이 길고 어려운 이름 보다는 국보 78호, 83호라는 번호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한분(83호)은 중앙박물관에 상시 전시 되어 있는데 또한 분(78호)는 어디 있는지 행방을 알 수 없다.
박물관 지하 수장고에 꼭꼭 숨겨 놓고 있다는 말도 있고, 해외 전시 나들이를 나가 셨다는 말도 있다.
너무 유명한 분이라 특별 전시회 같은 때만 나타나시니 보고 싶어도 불 수 없는 분이다.

 

 

                 ▲국보 78호                                                  ▲국보 83호

 

두 분이 사이좋게 나란히 있는 위의 사진은 어느 해인가 미륵반가사유상 특별전시회 때

용케 찍어 둔 것이다. 이런 행운은 몇 년 만에 열리는 특별 전시회 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아마도 현재의 새로 지은 용산 박물관으로 이사 오기전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렸던 특별전 때가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 두 불상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불상이고,.
한국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히는 불상이다.
그러나 가장 고독한 불상이다.
그래서 불쌍한 불상이다.


유리관 속에 갇혀 있는 국보급 문화재이고 미술품 일뿐
불자들의 예배 대상으로서는 이미 오래전에 상실한 불상이다.
언젠 가는 법당에 모셔서 많은 불자로부터 공경을 받을 수 있을까?
상상해 보지만 그러나 그런 희망은 결코 없을 것이라 보여진다.
미술품이나 문화재로서는 최상이지만....

본래의 불상으로 서의 기능은 절망이다.


나는 오늘 이 불상들을 이분, 그분, 저분이라는 용어를 쓰려한다.
더 이상 이분들을 물리적인 문화재로만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고,
내 감성에 의한 영적 존재로 보고 싶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 분들은 무엇을 그렇게 깊이 사유하고 계시는 것일까?

당신 자신만 사유하는 것이 아니고 나까지 사유에 빠지게 하니 참으로 알 수 없다.

 

 

  ▲국보 83호

 

지금 나는 이분(83호) 앞에 서있다.
그리고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을 느끼고 있다.
어둠속 유리관에 갇혀 계시는 저분이 괴로운 것이 아니고,
저분을 바라보고 있는 내 자신이 더 고통스러운 것은 왜 일까?


저분을 두고 무슨 생각이 있을 것이며,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사유(思惟)는 커녕 고통만 잔뜩 안고 쓰디쓴 눈물만 삼키고 있다.
차라리 보지 않았으면 괴롭지나 않을 것을...

저분을 바라봄으로서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을 느끼게 됨은 어인 일일까?

저분을 통하여 '인생은 고해'임을 깨닫기 때문일까?

 

 

▶무엇 때문에 이런 불상을 만들었나...?

 

 

 

  ▲국보 78호

 

나는 이분을 걸작의 미술품이나 국보급 문화재로 바라보지 못한다.
살아 숨 쉬고 있는 부처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분만 생각하면 의문에 의문 속에 빠져 버리곤 한다.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만들었는가?
어느 법당에 안치하여 불자들의 존엄한 예배대상으로 삼으려고 했는가?
아니면 솜씨 좋은 장인이 단순한 미술조각품으로 만든 것일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불상을 조성한 목적은 법당에 모시기 위함이라는 것....

그런데 어떻게 법당을 벗어나 여기에 오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은 어디서 출토됐으며, 어느 나라(삼국)에서 만든 것인지 밝혀진바가 없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평생을 한치의 유리관 속에 갇혀 지내야하는
이분들의 처지가 너무 안쓰럽고 가엾다.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한 가닥 희망을 기대하기 때문에 지금의 절망을 참고 이겨낸다.

이분들도(78호,83호) 언젠가는 법당으로 돌아가 수많은 불자들의 사랑 속에 존경 받으며

지낼 수 있다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보지만 결코 그런 희망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분들을 보는 내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깊은 사유가 무엇이며, 반가(半跏)가 무엇인가?
신라불이다, 아니 백제불이다.
신라도 백제도 아닌 고구려불이다 하며 끝없이 공방을 벌리고 있는
학자들의 시시비비가 무엇인지.... 나는 알려 하지 않는다.
불상의 형식이 어떻고, 옷 주름이 어떻고, 보관(모자)이 어떻고....
만든 시기가 몇 세기쯤이다 하는 학문적 언급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일본 고류사(廣隆寺) 목조미륵

반가사유상(일본 국보1호)은?
원래 우리 것이다.
아니다, 하고

논쟁을 벌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모두가 이분들을
불상으로 여기지

않고 미술품이나 문화재로만 바라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논쟁이고 시시비비

일 것이다.
 

이분들에게는 국보라는 높은 작위(?)라는

칭호 보다는 원래의 불상으로 봐 주기

바랄 것이다.

그리고 수많은 불자들이나 대중들이

이분들을 보면서 마음 속에 깊은 사유심을 

유발 케 한다면 얼마나 좋겠나?

 

그러나 인간들이 어찌하던 이분들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으신다.
밀폐된 진공 속에
갇혀 계시면서도

한 점 미동조차 없이 앉아 있다.

▲일본 국보 1호 목제 반가 사유상

 

 

                        ▲국보 78호                                                      ▲국보 83호

 

 

▶반가사유란 무슨 뜻인가?

 

 

 

                    ▲국보 78호                                                     ▲국보 78호

 

반가사유의 뜻은 가부좌를 튼, 반가부좌 자세를 취했다 하여 '반가'라하고,
손으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긴 모습이니 '반가사유상'이다. 
싯다르타가 부처되기 전 생로병사의 중생들이 겪는 고통을 목도하고


‘왜 인간은 고통 속에 살아가는가?’


생노병사를 고민을 하는 모습이라는 해석도 있고,
부처 사후 돌아올 미륵불이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는 모습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학자들의 주장일뿐 나는 믿고 싶지가 않다.

이 불상이 주는 진정한 메세지는 그게 아니고 그가 아닌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불상이 주체가 아니라 이 사유상을 바라보고 있는 내 자신이 주체라는 것이다. 

즉, 이 불상을 바라봄으로서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사유심을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이런 반가사유상은 간다라(지금의 아프가니스탄)에서 처음 시작되어,
중국을 거쳐 6세기 경에 한국에 전해졌다한다.  상반신을 앞으로 숙인 채 깊은 생각에 빠진 사유의

모습을 보고 당시 사람들은 매혹 당했다 한다.(지금도 매혹 당하고 있지만...)
인도나 중국의 반가사유상은 출가 전 싯다르타의 모습으로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은 미륵보살의 형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미륵신앙은 6세기 이후 신라, 백제, 고구려에서 모두 성행했다.
아마도 이 시기에 만들어진 반가사유상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불상을 어떤 시각으로 볼 것인가? 

 

                          ▲국보 78호                                                       ▲국보 78호

 

당신은 불상을 어떤 존재로 보는가?
단순히 예술적인 미술품이나 문화재로만 보는가?
아니면 살아 있는 신앙적, 정신적 영적 존재로 보는가?


이런 물음 자체가 어리석고 엉뚱한 물음일지 모른다.
그러나 불상을 보는 사람의 시각(영혼과 정신)에 따라서 단순한 물질적인 미술품이나

문화재로 보는 시각도 있고, 자신의 정신과 영혼을 지배하는 영적인 존재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꼭 신앙적 대상으로 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불상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바르게 보는 시각일까?

학자나 박물관 사람들은 그저 귀중한 문화재라는 물리적 시각으로 보겠지만...
나는 단연코 불상은 영적 존재라는 본다.
그것이 박물관에 있는 불상이던, 절에 있는 불상이던 모두 영적 존재로 보인다.

 

 

다시 말해서 불상을 신앙적 대상으로 보든,

예술품(문화재)으로 보든...
불상을 박물관에서 보든,
법당에서 보든 간에

보는 사람의 감성을 자극시켜 감정을 유발

시키고 감동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은 이미

물리적이 아닌 영적 행위이다.

그러니 불상이 박물관에 있더라도 우리는

영적감정으로 불상을 대하는 것이

올바른 시각이고 정신이 아닌가 싶다.

 

물론 이 같은 시각은 보편적인 것이 아닌

불상을 보는 사람들마다 다를 것이다.

학자나 박물관 사람들은 문화재로만 볼 것이고,

예술가들은 미술품으로만 볼 것이고,

불자들은 예배대상(부처님)으로 볼 것이지만...

이 세 부류 모두 불상을 보고 느끼는 감정은 

모두 영적 감정일 것이니 결국 불상은

영적 존재인 것이다.  (이것은 순전히 필자의

  ▲국보 83호                                            생각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책‘달마’에서 목불을 태웠다는 혜림사의 단하천연(丹霞天然,736∼824) 스님의 이야기가

생각나 여기에 옮겨 적는다. 그 내용을 깊이 통찰 해 볼 일이다.

 

 

 

단하선사가 혜림사에 갔는데 그날은 몹시 추운 날이었다.
땔감도 없고 쌓인 눈 때문에 나무를 해올 수도 없어 단하 스님은
법당에 있는 목불상을 갔다 도끼로 쪼개 아궁이에 넣고 불을 일으켰다.
이를 본 주지스님이 어이가 없어 단하스님을 몹시 나무랐다.


“아니, 스님 불상을 태우다니요. 정신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단하스님이 주지스님을 보고 태연히 대답했다.


"나는 불상을 태워 사리를 얻으려 하였네."


주지스님은 단하스님을 비웃으며 밖으로 내 쫓으면서 말했다.


"나무 불상에 어찌 사리가 있겠는가?"


대문 밖으로 쫓겨나면서 단하스님이  말했다.


 "그대는 이해하지 못하는구나. 이 모든 것은 단지 우리의 상상에 달린 일일 뿐이다.

만약 그대가 이 목불을 보고 부처로 상상하면 그것은 부처가 된다. 알았는가?

이미 그대는 부처 그 자체이다.“  <중략...>“
(*오쇼 라즈니쉬 강의, 류시화 옮김의 '달마'에서...)

 

 

                          ▲국보 83호                                                  ▲국보 78호


여기에서 단하스님은 불상을 태운 것이 아니라 나무를 태웠을 뿐이다.
불상에 있는 부처님은 이미 우리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니 박물관의 불상을 불성으로 바라본다면 비록 문화재로 관리하고 있어도 영적인 존재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두 기 모두 금동제이니 단하스님이라도 불에 태울 수가 없을 것이다.(하하하~)
 

현존하는 국보급 유물 미록 반가사유상은 두 기가 있다.
하나는 국보 78호 반가상이고, 또 하나는 국보 83호이다.

이 외에도 출도 된 반가사유상 불상은 여럿있다.

그러나 78,83호에 비하여 그 예술성이 미치지 못한다.

 

 

이 두기의 불상은 세계 최고의 기념비적 미술품이자 소중히 간직해야 될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영적인 존재이다. 현대에서 누구도 이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없을 것이다.
현대에 첨단기계로 제작된 모든 반가사유상은 원래의 것을 보고 제작한 복제품에 불과하다.


강우방 교수님은 그의 저서(한국불교 조각의 흐름)에서 사유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실존적 운명을 자각하고 깊은 사유에 몰입해 있는 인간적인  모습인 사유상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은 종교는 불교뿐이다.“

 

 

 


그렇다 바로 이것이 반가사유상(불)을 만든 고대 사람들의 정신일 것이다.
깊은 사유에 몰입해 있는 불상을 보면서 자기 자신도 반가사유불이 되어 고뇌의 인생을 자각하고

반성하여 생로병사의 번뇌에서 벗어나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러고도 불상을 한낱 물리적인 미술품이나 문화재로만 바라볼 수 있겠는가?
깊은 사유의 정신으로 법당의 불상이든, 박물관의 불상이든 경외심의 마음으로 대해야 된다고 본다.

 

 

 

또 내 이야기가 길어졌다. 조금 아는 척 하려다 또 욕심이 발동했다.
여러 가지로 말이 많은 학자들은 그들의 밥줄이 거기에 매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이해하지만

난 그래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그래도 그분(학자)들이 없다면 어찌 좋은 글을 대할 수가 있겠으며

학문적 정보를 얻을 수 있겠는가.


사실 저 두기의 미륵반가사유상은 어떤 불상이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박물관에 가서 실물을 보던지 그런 여유도 없다면 사진만이라도 열심히 들여다보자.

보고 또 보면 언젠가는....
박물관에 전시된 불상일지라도 단순한 문화재가 아닌 진정한 영적 존재로 인식 되어

자신의 가슴속으로 들어 올 것이라고 본다. 

 

 

 

 

 

 

 

 

 

 

 

두 기의 반가사유상에 대한 여러 분야의 정보는 각자 찾아보기 바란다.
보살의 보관 형식에서부터,
손 모양, 다리모양, 옷(천의) 모양 등등...
그리고 두 기(78호,83호)와
일본 교토 고류지의 사유상 (일본 국보 1호)과 어떤 연관성,

어떤 사유가 있는지 상세하게 알아보고 관련된 책도 읽어  보기 바란다.


여기에서는 나의 생각만을 적었을 뿐이다.
이 글은 사유상을 대하는 나의 생각일 뿐
여러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 아니다.

 

늦은 오후 박물관을 나왔다.

그러나 비는 여전히 퍼붓고 있었다.

늦은 밤 집(딸네집)에 도착했다.

결국 때 아닌 폭우로 서울의 저지대 동네가

물바다가 됐다는 소식이다.

 

모두가 자연을 거스른 인간들의 업보이다.


>미지로 생각. 
 

 

■ 문화재 설명(*문화재청)


●국보 제78호-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삼국시대(중앙박물관 소장)

 

의자 위에 앉아 오른발을 왼쪽다리 위에 올려 놓고, 오른쪽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린 채 손가락을 뺨에 댄 모습의 보살상으로 높이는 80㎝이다.
1912년에 일본인이 입수하여 조선총독부에 기증했던 것을 1916년 총독부박물관으로 옮겨 놓았고,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머리에는 화려한 관(冠)을 쓰고 있으며, 여기에서 나온 2가닥의 장식은 좌우로 어깨까지 늘어져 있다.
네모꼴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한 느낌을 주며, 광대뼈를 나오게 하고 입가를 들어가게 하여 미소 띤 얼굴을 만들었다.


상체는 당당하면서도 곧고 늘씬한 모습이며, 하체에서는 우아한 곡선미를 느낄 수 있다. 늘씬한 팔이나 체구에 비해서 손이나 발은 상대적으로 큼직한 편이다. 전체적으로 탄력이 있고 매끄러우며 부드럽고 율동적이어서 보살상의 우아한 모습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목 뒤로 돌아 양 어깨를 감싼 천의(天衣)는 새의 깃털처럼 치켜 올라갔다가 다시 가슴 쪽으로 흘려내려 왼쪽 다리에서 교차한 다음, 양 무릎을 지나 두 팔을 감아 내렸다.
하체에 입은 치마는 다소 두툼해 보이는데 U자형 주름이 능숙하게 새겨져 있다.
왼발을 올려놓은 타원형의 대좌(臺座)에는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 흔적만 있을 뿐 광배(光背)는 없어진 상태이다.


1963년 방사선 투과법으로 촬영한 결과 내부의 결함이나 고친 흔적이 없으며, 재질이나 만든 기법이 매우 특이함이 밝혀졌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자세, 아름다운 옷주름, 명상에 잠긴 듯한 오묘한 얼굴 등으로 보아 한국적 보살상을 성공적으로 완성시킨 6세기 중엽이나 그 직후의 작품으로 생각된다.

 

 

●국보 제83호-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金銅彌勒菩薩半跏思惟像) 
   -삼국시대(중앙박물관 소장)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국보 제78호)과 함께 국내에서는 가장 큰 금동반가사유상으로 높이가 93.5㎝이다. 1920년대에 경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나 근거가 없으며, 머리에 3면이 둥근 산 모양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삼산반가사유상(三山半跏思惟像)’으로도 불린다.


얼굴은 거의 원형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고 눈두덩과 입가에서 미소를 풍기고 있다. 상체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고, 목에 2줄의 목걸이가 있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다. 왼발은 내려서 작은 연꽃무늬 대좌(臺座)를 밟고 있고, 오른발은 왼쪽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왼손으로는 오른 발목을 잡고 오른손은 팔꿈치를 무릎에 얹었으며, 손가락으로 턱을 살며시 괴고 있다. 하반신을 덮은 치맛자락은 매우 얇게 표현하여 신체 굴곡이 잘 드러나며, 연꽃무늬 대좌를 덮은 옷자락은 깊고 자연스럽게 조각되었다. 왼쪽으로 옥을 꿴 치마의 띠가 내려가고 있으며, 머리 뒷부분에는 긴 촉이 달려 있어 광배(光背)를 꽂았음을 알 수 있다.


단순하면서도 균형 잡힌 신체 표현과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체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분명하게 조각된 눈·코·입의 표현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조각품으로서의 완벽한 주조 기술을 보여준다. 잔잔한 미소에서 느껴지는 반가상의 자비로움은 우수한 종교 조각으로서의 숭고미를 더해준다. 국보 제78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상보다 연대가 내려와 삼국시대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