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제112호-감은사지삼층석탑

migiroo 2010. 10. 15. 23:04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12)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통일신라(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소재)

 

 

 

▸들어가는 길
 
마음이 왜 이리 우울하고 답답한가?
아마도 쓸데없는 잡념들 때문일 것이다.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욕망에 대한 집착들....
이루어 질 수 없는 허망한 꿈들....
이깐 것들 모두 비워버린다면 얼마나 홀가분할까?


그래, 감은사지에 가자!
천년 석탑도 보고, 문무대왕 수중릉 대왕암에도 가보자.
거기가서 답답한 내 마음을 몽땅 비우고 오자.

 

 

바람을 가르며 7번 국도를 달린다.
감포 앞 동해 바닷물에 나를 던져버리던지....
감은사지 석탑에 나를 부숴 버리고 싶다.
차는 강동해변을 지나 곧 바로 감포 앞바다에 이른다.
바람과 파도가 유희하고 있는 바다를 바라본다.
대왕암에는 갈매기 떼들의 군무가 한창 펼쳐지고 있다.


 

●문무대왕 수중릉 대왕암

 


 

 

대왕의 용울음 소리는 들리지 않고 동해바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만파식적(萬波息笛) 소리가 들려 오는 듯 싶다.
한번 불면 나라의 근심 걱정이 모두 풀린다 했으니 그 피리소리가 천년의 시간을 뛰어 넘어 오늘에 이르면 얼마나 좋을까.

 

 

오늘 날 학자들은 대왕암이 문무대왕의 해중릉이 맞다, 아니 틀리다. 하고 끓임 없이 논쟁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같은 주장들은 모두 물리적인 현상으로만 보려하기 때문이다.
해중릉 이었다고 해도 어찌 천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그 흔적이 남아 있길 바라는 것인가.
눈으로 보려하지 말고 정신으로 보면 다 보일 것이다.
아마도 학자들만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이제 그렇다, 아니다 하는 논쟁을 멈추고 그분의 호국정신을 오늘에 이어 배우도록 하여야한다.
대왕암 같은 유적지를 잘 정비하여 문화유적의 보존은 물론, 호국정신을 일깨우는

국민의 교육 축제 장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이다.


지금의 감포 봉길리 해수욕장 대왕암 주변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좁디좁은 주차장에는 관광버스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차들로 북새통이고,
해변엔 즐비한 횟집 과 노점상들이 호객행위에 열을 올리고 있고,
관광객들은 생선회 먹으랴 노래하랴 정신이 없다.  
동해의 호국용이 된 문무대왕이 이를 보면 가슴을 치며 통탄을 할 것이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수학여행 온 어린 학생들의 눈빛에서 그 희망을 읽는다.
문무대왕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 선생님의 말씀을 열심히 듣고,
메모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우리의 희망이 보인다.

 

 

●감은사지

 

 

발길을 돌려 대왕암을 나와 지척에 있는 감은사지로 향한다.
이제는 황량한 벌판에 석탑 두기만 우뚝 서 있는 옛 절터...
검게 퇴색된 천년의 시간들만 절터 여기저기에 내려 앉아 있다. 
그러나 하늘을 향하여 힘 있게 솟아 있는 석탑의 천년 찰주를
보는 순간 가슴에서 뜨거운 피가 역류하는 전율을 느낀다.

 

 

“아니, 어떻게 저 가느다란 쇠꼬챙이(찰주)가 녹슬어 없어지지 않고 저렇게 당당히

 천 수 백년을 견뎌 남아 있을 수 있는가?“


최첨단 주물 기술로 만든 현대의 강철이 아무리
단단하다 할지라도 녹슬지 않고

백년을 견디겠는가, 천년을 견뎌 내겠는가?
도대체 신라 장인들은 쇳물을 어떻게 다루었기에
녹슬지 않고 천년 이상을 견디게 했는지 모르겠다.
감은사지에 와서 가장 먼저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느껴야할 것은 장중한 석탑이 아니라

탑 꼭대기에 꽂혀 있는 뾰쪽한 찰주에 있다. 

 

원래 이 철봉의 용도는 석탑 상륜부에 있는 9개의 구성물을 꽂아 두기 위한 일종의 철심이다.

그런데 구성물은 모두 없어지고 철심만 남은 것이다.

석탑의 상륜부는 불계, 우주계를 함축적으로 표시한 상징물이다.
즉, 노반, 복발, 앙화, 보륜, 보개, 수연, 용차, 보주, 찰주로 이루어 졌는데 이 중에 8개의 구성물을

찰주라는 철심이 탑 위에 지탱해 주고 있다. 이제는 그 8개의 구성물이 다 없어지고 그 가느다란

찰주만 남아 천년을 세월을 뛰어 넘어 지금 우리 눈 앞에 있으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새운 동, 서 쌍 탑이다.

감은사는 문무대왕의 아들 신문왕이 호국의 용이 되신 아버지의 위업을 기리고 

부처님의 힘(불력)으로 나라의 안위를 더욱 든든히 하기 위하여 새운 절이다.

그래서 절 안에까지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도 만들었다.

지금도 그 용혈과 금당 아래에 용이 머물다간 흔적이 남아 있다.  

대왕암과 감은사와의 이러한 밀접한 관계를 모르면 감은사지 석탑을 온전히 알지 못할 것이다.

 

감은사지 삼층석탑은을 가장 위대한 석탑, 가장 아름다운 석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부르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탑을 표현할 때 ‘가장’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탑엔 아무런 장식도 없다. 아무런 조각도 없다.
그저 여러 조각의 석재를 다듬어 퍼즐 맞추듯이 쌓아 올린 삼층의 탑일 뿐이다.
그런데 어떤 조화를 부렸기에 저 같은 명작을 만들 수 있었는가?
그 조화는 탑에 서린 내면의 정신적 세계에서도 나타나지만....
그냥 단순히 물리적으로 바라보아도 탑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니
그 기막힌 조화를 어찌 설명할지 난감할 뿐이다.


이 탑에 대한 찬사는 이미 수많은 작가, 시인, 미술평론가, 사학자들이
다 쏟아 낸 바 있으니 내가 아무리 미사어구와 형용사를 다 동원한다 해도
어찌 이 탑에 대한 찬사를 만족하리만큼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는 오늘 감은사지 와서 탑의 내력이나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
문무대왕, 신문왕, 만파식적, 감은사 창건 내력, 탑의 규모와 형식 등등...
이런 학술적인 설명문은 어디든지 다 나와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그저 한 사람으로서 탑을 바라보며 가슴에 와 닿는 느낌만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나는 감은사지 석탑 앞에만 서면 왜 이리 작고 초라 해 지는지 모른다.
그 거장하고, 장중함에 그저 기가 죽는다.
그리고 탑 앞에 인간이 얼마나 초라한 존재 인가를 실감한다.

왜?

탑이 커서 그런가?

아니다.  탑이 커서도, 장중해서도 아니다.

천년의 나이를 먹은 탑이 내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두렵기 때문이다.  

 

 

감은사지 탑은 언제 와 봐도 새로운 모습으로 내게 다가온다. 
하루 중 어느 시간대에 와 봐도 탑은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기상 변화에 따라 탑은 또 다른 신비함을 보여준다.
안개 낀 날의 탑의 모습, 비 내리는 날의 탑의 모습...,
석양에 비친 탑의 모습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그 중에서도 달빛에 비친 탑의 모습은 환상의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인위적인 야간 조명 불빛 때문에 달빛에 비친 탑의 환상적인 모습이 많이 상실 되고 말았다.
왜 여기까지 와서 탑에 조명 불빛을 비추는가?
인위적인 조명은 시각적으로 잠시 탑을 잘 보이게 할지는 몰라도 탑의 진정한 모습을 가리는 행위와 같다. 

그냥 하늘 아래에 놔 두면 될 것을....

왜 인위적인 조명시설을 설치하는가.

한강 다리에도 조명시설을 하고, 안압지에도, 첨성대에도 조명시설을 했다.

그래서 얼마나 보기에 좋은가?

안압지 물위에 뜬 달 그림자가 없어지고, 달빛에 비친 첨성대 그림자도 조명 불빛에 없어졌다. 
   

 

감은사지 탑은 그동안 수차례 해체 보수를 한바 있다.
대기 오염과 풍화작용으로 부식이 너무 진행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체과정에서 동, 서 탑 모두에게서 귀중한 유물이 출토된바 있다.
사리장엄구의 외함과 내함 그리고 사리병 등이다.
이들은 지금 자신의 자리인 탑을 떠나 한 낱 문화재로 신분이 바뀌어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물로 전락하고 말았다.
사리를 모신 사리장엄구는 탑의 핵심이고,
탑은 그 장엄구를 봉안한 집과 같다.

 

 

그런 의미로 볼 때 탑 안에 봉안한 사리장엄구가 없어져 버렸으니
탑은 그저 빈 집일 뿐이다.
그러한 사리장엄구가 어쩜 영원히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니
탑은 그저 빈껍데인 체 한 평생을 홀로 살아야 할 것이다.
차라리 발견되지 않았다면 탑과 함께 문무왕의 불력이 지금도
유효할 것이니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 기의 사리함은 모두 청동제로 정교한 세공 기술로 만들어졌다.
외함의 사천왕상이나 내함의 신장상, 공양상 등 사리병의 금알갱이
장식에서 신라 장인들의 뛰어난 금속세공기술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이들 모두 지금은 중앙박물관에 가면 볼 수가 있다.

 

 


늦은 오후 감은사지를 나온다.
절터 앞에 마을 할매들이 몸에 좋다는 솔잎 가루을 팔고 있다.
할매들의 검게 탄 주름진 얼굴과 쭈굴쭈굴한 손등에
천년 석탑의 흔적들이 묻어있다.
 

>미지로의 생각

 

 

■ 문화재 설명(*문화재청)

  -국보  제112호 

 

●감은사지삼층석탑(感恩寺址三層石塔)  
  -통일신라(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소재)


▷감은사지(感恩寺址)


신문왕이 부왕인 문무왕의 뜻을 이어 창건하였으며, 절터 부근인 동해 바다에는 문무왕의 해중릉인 대왕암이 있다. 문무왕은 해변에 절을 세워 불력(佛力)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절의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 하였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승려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를 지킬 것"을 유언하고 죽자, 이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안장하였으며, 신문왕이 부왕의 뜻을 받들어 절을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그때 금당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용으로 화한(化龍)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 682년 5월 신문왕은 동해의 호국룡이 된 문무왕과 33천의 아들로 태어난 김유신으로부터 나라를 지킬 보물인 신비스러운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당시 해관(海官)의 보고에 의하면 작은 산이 부왕부래(浮王浮來)하는데 낮에는 둘로 밤에는 하나로 합쳐진다고 하였다. 이는 문무왕릉인 수중릉을 의미하는 것으로 파도치는 바다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착시현상으로 그러하며, 남북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가운데는 동서로 물이 넘나드는 수로(水路)로 형성된 대왕암은 낮에는 정확하게 보이는 까닭에 둘로, 밤에는 어두우니 전체인 하나로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뒤 이 절은 황룡사(黃龍寺)·사천왕사(四天王寺) 등과 함께 호국의 사찰로서 명맥을 이어 왔으나, 언제 폐사가 되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문헌을 살펴보면 대체로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동서삼층석탑 2기가 남아 있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의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서 가장 큰 것이다.


절터는 1960년과 1979년∼1980년에 걸친 발굴조사를 통해 유물이 수습되었고 전모가 확인되었다. 감은사는 일당쌍탑식(一堂雙塔式) 가람으로써 남북의 길이보다 동서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성된 점과 금당을 중심으로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翼廊)을 둔 점이 특이하다. 절터의 남쪽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문지가 있고, 이 중문 좌우로 후면의 강당지에 이르기까지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중문 북쪽으로 금당 앞과 좌우에는 같은 형태의 삼층석탑 2기가 있으며, 두 탑의 중앙부 후면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지가 있다. 정연하게 쌓아올린 2층 기단의 4면 중앙에는 돌계단이 각각 배치되었고, 가공된 갑석과 지대석이 보인다. 금당의 바닥구조는 H자형의 받침석과 보를 돌다리처럼 만들고, 그 위에 장방형의 석재 유구를 동서방향으로 깔아서 마치 돌마루를 얹어 놓은 것 같이 되어 있다. 그 위에 주초(柱礎)를 배열하고 건물을 세웠던 특이한 구조로서, 금당의 저면에서부터 일정한 높이의 공간을 형성하여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을 감은사의 금당에 들어오게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부합하고 있다. 금당 북쪽의 강당지는 원래 정면 8칸, 측면 4칸이었던 것을, 후대에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고쳐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東, 西 삼층석탑


동서탑은 쌍탑으로 조성되었는데 두 탑은 같은 구조와 규모로 되어 있으며 상하 2층으로 형성된 기단위에 세워진 평면방형의 삼층석탑이다.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면석이 같은 돌로 된 12장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각 면에는 양쪽 우주가 있는 것 외에 탱주가 3주씩 있다. 갑석도 역시 12장의 석재로 짜여져 있으며, 갑석 중앙에는 호형(弧形)과 각형의 2단 굄이 여러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다. 하층기단의 아래쪽 주위에는 외곽지대석이라고 볼 수 있는 유구가 있다. 탑신부의 옥신과 옥개석은 각 부마다 4∼8개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고, 내부에는 적심석으로 메워져 있으나 제3층 옥신만은 석재가 하나인데 이 것은 규격이 작은 원인도 있겠으나 사리장치를 하기 위한 방편으로도 볼 수 있다. 초층 옥신은 네 모서리의 우주와 그 사이의 면석들을 따로 만들어 맞추어 세웠으며, 제2층 옥신은 각각 한쪽에 우주를 하나씩 모각한 판석 4장으로 조립되어 있고, 1장으로 조성된 3층 옥신에는 각 면 양쪽의 우주가 정연하다. 옥개석은 낙수면 부분과 받침부분을 별개의 돌로 조성하되 각각 4장의 돌로 짜여져 있다. 받침은 각 층 5단씩이며, 낙수면 정상에는 2단의 높직한 굄이 있다. 상륜부는 제3층 옥개석 위에 1장으로 만들어진 노반석이 남아 있고 그 위의 부재는 없어졌다. 현재는 시로 된 찰주(擦柱)가 노반석(露盤石)을 관통하여 탑신부에 고정되어 있을 뿐이다. 노반 위에 보이는 찰주의 높이가 3.5m, 그 아래로 제3층 옥개석의 중심에 꽂힌 부분이 약 1.3m이다. 이 찰주의 중간부분에 가공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상륜부는 모두 석재로 구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믿어진다. 석탑은 상하기단과 탑신부의 각면에 우주와 탱주가 모각되어 있고 낙수면이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전각에서 추녀가 위로 들려지는 등 목조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수평을 이루고 있는 추녀 밑 부분과 층단을 이루고 있는 받침 등은 전조탑파양식(塼造塔婆樣式)을 모방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석탑양식은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으로 정립되었다. 통일신라 초기의 석탑에서 주목되는 점은 각 부의 구성이 백제시대 석탑과 같이 많은 석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목조건축에 있어서의 구조성을 잃지않고 있는 증거라고 보여진다. 감은사 동서탑은 이러한 목조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동서탑 중 서탑은 1959년 12월에 해체·보수되었으며, 동탑은 1996년 4월에 해체 및 보수되었다. 당시 제3층 옥신의 상면 사리공에서 사리장엄구가 창건 당시의 상태로 발견되었다. 사리공(舍利孔)은 장경(長徑)을 남북에 두고 중앙보다는 남쪽으로 기울어져 파여 있다. 이 사리공 속에는 청동제사리기를 사각의 감실에 담아 두었을 뿐, 이 밖에 아무런 장엄구도 들어 있지 않았는데, 이들 관계 유물들은 조성연대와 발견장소가 확실한 몇 안되는 유물 중의 하나이다. 서탑 내 출토 유물은 보물 제366호이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동탑은 경주지역에서 마지막으로 속세의 손길이 닿지 않았던 신라시대 유일한 석탑이었으나, 1996년 4월 25일에 해체됨으로서 더 이상 내부가 공개되지 않은 석탑은 남지 않게 되었다. 해체 작업시 역시 서삼층석탑 해체 수리때 발견된 사리장엄구와 거의 유사한 것이 출토되어 주목되고 있다. 발견된 사리장엄구는 금동제 사리 외함(外函), 금동제 전각형사리기(殿閣形舍利器), 수정제 사리병, 금제 사리병 뚜껑 받침, 승상(僧像) 4구, 사천왕상 4구, 용상(龍像) 4마리, 사자상(獅子像) 4마리, 금제 풍탁(風鐸) 5점, 금동 사리기 천개 장식 등과 함께 사리 54顆가 수습되었다. 이들 사리구는 비교적 절대연대가 뚜렷하고 세부적 표현이 매우 뛰어난 당시 금속공예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의 일례로 평가받고 있다.

(자료 출처*문화재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