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제38호-고선사지 삼층석탑

migiroo 2010. 11. 4. 00:37

 

■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14)


▶국보 제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高仙寺址三層石塔)
      -국립경주박물관(통일신라초기)

 


●고선사지 삼층석탑, 그 千年의 默言

 

경주박물관은 한 달에 두서너 번씩 간다.
갈 때마다 마주치는 탑이 바로 국보 38호 고선사지 삼층석탑이다.
너무 자주 봐서 그런가?
한 번도 깊은 애정으로 본 적이 없으니 참으로 야박하다.
오늘은 만사 제쳐 놓고 해질녘 석탑을 바라보면서 사색의 나래를 편다.
탑은 왜 새우는 것일까?
그리고 저 탑은 얼마나 더 오래 동안 남아 있을까? 
인간세의 역사가 아무리 많이 바뀌고 변한다 해도 탑은 말이 없다.
그러나 무언의 메시지를 인간들에게 전하고 있다.
 

 

 
탑을 만든 인간들은 모두 소멸되고 없지만
탑에 깃든 정신은 아직도 탑 안에 면면히 흐르고 있다.
장구한 세월 풍화에 마멸되고 때론 인위적으로 부서졌지만
탑은 여전히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고 있다.
탑의 장중함과 거장 함을 말해서 무엇 하랴...
그저 그 앞에 서면 할 말을 잃는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고선사지 삼층석탑은 엉뚱하게도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
몸이 토막토막 해체되어 본래의 자리에서 박물관으로 옮겨져 다시 쌓아 복원한 것이다.

탑의 원래 있던 자리는 지금의 경주 덕동댐이 있는 자리가 고선사 절터다.
그러나 덕동 댐이 생기는 바람에 천년 절터는 물속에 수장되고,
절터에 남아 있던 탑과 건물의 주춧돌 등을 모아 경주박물관 뒷마당에 옮겨 놓았다.
탑은 목탑 양식을 계승한 통일신라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초기 목탑에서 석탑양식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탑이다.
우리나라의 석탑은 고선사 탑과 함께 감은사지삼층석탑으로 시작하여 불국사삼층석탑으로

이어져 탑의 절정기를 이룬다.

 

 

1975년 경주시민의 식수원을 해결하기 위하여 무장산 아래 암곡동 신평천을 막아 댐을 만들면서 고선사지도

그 종막을 맞게 된다.  불행하게도 그 당시만 해도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깊지 않아 면밀한 발굴조사 없이

대충 석탑과 눈에 보이는 석재들만 모아 박물관으로 옮기고 절터는 물속에 잠기고 마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고선사(高仙寺)

 

 

고선사는 신라 신문왕 대에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던 절로 유명하다.
절의 창건연대와 폐사에 관한 기록은 아직 전해 지지 않고 있다.
지금 남아 있는 문화재는 삼층석탑 1기와 원효의 치적을 적은 서당화상비와
그 비좌(귀부) 그리고 석등대석 등이 남아 있다. 

수몰 전 고선사지에는 서쪽에는 삼층석탑이, 東쪽에는 목탑이 자리한 것으로
조사 됐다는데 만일 그렇다면 고선사지는 석탑과 목탑이 나란히 서 있는
유일한 사찰이었을 것인데 안타깝게도 이제는 그 흔적조사 물속에 잠겼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원효대사의 서당화상비(誓幢和尙碑)

 

 

 

이 비(碑)는 신라 애장왕 대의 원효대사의 손자이자, 설총(薛聰)의 아들인 설중업(薛仲業)이 원효대사를 추모하기 위하여 건립한 비(碑)이다. 서당(誓幢)은 원효의 어릴 적 이름이고 비문(碑文)을 지은 사람과 글씨를 쓴 사람은 전하지 않고, 비에 글을 새긴 사람만 표기 되어 있다.


비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원효의 탄생과 학문태도,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의 성격과 원효대사의 신이(神異)한 행적 그리고 원효의 명성이 일본에까지 알려졌다는 내용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비는 원효대사의 일대기에 관한 가장 오래된 사료이다. 발견된 비는 상단부와 하단부가 깨어져서 따로따로 발견되었다.

 


●귀부 비좌

 

 

 

 

서당화상비의 비신(碑身)은 깨어진 채로 발견 됐지만,
그 비석의 받침돌인 돌거북(귀부(龜趺)은 수몰 전 고선사터에
남이 있다가 현재는 경주박물관에 있다. 

비록 목이 잘려 나갔지만 돌거북은 아직도 살아서 꿈틀 거리는 듯하다.


탑은 이렇게 수 많은 사연을 간직한 체 제 고향을 떠나 말없이 서 있다.

탑 앞에 서서 탑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 본다.
나는 고작 육십여년을 살았는데....
탑은 지금까지 천년을 살고, 앞으로도 천년을 더 살 것이라 생각하니

탑 앞에 서있는 내 자신이 너무 초라해 진다.

그리고 탑이 더 거장해 보인다.
 

>미지로 생각

 

 

 

■ 문화재 설명(*문화재청)

 

●고선사지 삼층석탑 [高仙寺址三層石塔]


원효대사가 주지로 있었던 고선사의 옛 터에 세워져 있던 탑으로, 덕동댐 건설로 인해 절터가 물에 잠기게 되자 1975년에 지금의 자리인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세워 놓았다.
탑은 2층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쌓아놓은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의 전형적인 형태이다. 기단은 여러 개의 돌로 구성하였으며, 각 면에는 기둥모양을 새겨 놓았다. 탑신도 여러 개의 돌을 조립식으로 짜 맞추었으나, 3층 몸돌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사리장치를 넣어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한 배려로, 석탑을 해체하여 복원하면서 밝혀졌다. 지붕돌은 윗면에 완만한 경사가 흐르는데 아래로 미끄러지는 네 귀퉁이에서 또렷이 들려있어 경쾌함을 더해주고 있다. 밑면에는 계단모양을 한 5단씩의 받침을 새겨 놓았다. 통일신라시대 전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전형적인 석탑양식으로 옮겨지는 초기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이러한 양식은 이 탑과 함께 감은사지삼층석탑(국보 제112호)에서 시작되어 이후 불국사삼층 석탑(국보 제21호)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탑의 구조및 형식

 

이 석탑은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우리나라 석탑의 전형을 이루게 된다. 그 전형적인 모습은 이  석탑과 감은사탑에서 만들어져, 불국사 석가탑에서 그 절정을 보게 된다. 그러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시점에 조성된 이 탑은 석가탑에서조차 볼 수 없는 생동감과 긴장감이 있다.

기단부의 짜임새를 보면, 하층의 基壇은 지대와 면석이 같은 석재로 모두 12매로 조성되었고, 각 면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가 3개씩 조각되었다.

탑신부의 1층 몸돌은 네 귀퉁이에 우주석(隅柱石)을 하나씩 세워서 양 우주로 삼고, 그 사이에 면석 1개씩을 끼워 모두 8매의 돌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각 면에는 門 모양을 조각하였다. 2층 몸돌은 각 면 1매씩 4매로 구성하고 각 면에 양 우주를 조각하였다.

삼층만은 하나의 몸돌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은 사리장치와 찰주(擦柱)를 세우기 위한 배려이었다. 그리고 양 쪽에 隅柱를 조각하였다.  지붕돌 층급받침은 5段씩이고, 상면에는 각 2段의 괴임을 높직하게 조각하여 그 위층에 탑재를 받치고 있다. 상륜부(상륜부)에는 노반(노반)과 복발(복발), 앙화석(앙화석) 등이 차례로 놓여 있고, 찰주(찰주)는 없다. 탑 전체의 높이는 9m이다.
(*자료춮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