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제13호-강진 무위사 극락보전

migiroo 2010. 10. 29. 22:17

 

 

■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13) 
 
▶국보 제13호
 
●강진 무위사 극락보전(無爲寺 極樂寶殿)


  -무위사 창건 : 신라시대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元曉)가 창건.
  -극락전 : 조선시대(세종 12년(1430)

 

 

                                                                               (*아래 글은 이미 본인의 블로그와 관련 카페에 올린

                                                                            무위사 답사기  내용 중 극락보전 내용만 간추린 것임) 

 

 

 

 

“無爲”란 무엇일까?

 

無爲의 사전적 의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 이다.
사전적 해석은 언제나 아무런 감정도 없는 글자의 해석일 뿐이다.
그러나 철학적으로 해석한다면 보다 깊은 의미로 해석 된다.

불교사전을 찾아보니 이렇게 쓰여 있다.


“현상을 초월하여 상주불변(常住不變), 즉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존재를 이르는 말”


궁극적으로 無爲의 진정한 의미는 열반(涅槃)의 길임을 암시하고 있다.

너무 어렵고 난해하다. 좀 더 철학적 해석이 요구되지만....
나로선 알 수가 없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아마도 무위사에 가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사찰의 전각 중에는 국보로 지정된 보물이 여럿 있다.
무위사 극락보전 역시 국보로 지정되어 대접을 받고 있다.
하지만 겉보기엔 초라하기 그지없는 작은 법당 건물이다.
그러나 그 초라함 속에 배여 있는 국보로서의 무게는 무겁고도 깊다.


무위사(無爲寺)는 강진 월출산에 있는 고찰이다.

처음 절 이름은 관음사로서 617년(신라 진평왕 39)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전한다.

그 후 1556년(조선 명종11) 태감(太甘) 스님이 중창하고,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고찰답게 무위사에는 국보급, 보물급 문화재가 즐비한 사찰이다.

 


●극락보전으로 오르는 해탈의 돌계단 

 

 

해탈문을 지나 사천왕을 만나고 천상의 극락보전으로 가는 돌계단을 오른다.
돌계단은 극락보전 수미단으로 오르는 길이다.

극락보전의 건물은 정말 너무도 초라한 모습이다.

여기서 초라함이란 남루하고 보잘것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때 묻지 않은 촌 아낙처럼 수줍고 맑다는 의미이다.
가지러한 돌계단을 한단한단 올라서면 점점 극락보전이 가까이 다가온다.

이윽고 계단을 다 오르면 빗자루 자국이 선명한 법당 마당에 이르는데그 법당 누런 흙 마당이

마치 불계의 황금빛 연못처럼 누워 있다.

그리고 그 연못 한 가운데에 연꽃 한 송이가 떠 있으니 바로 연화문 배례석(拜禮石)이다. 

 

 

 

어느 사찰에 가보아도 법당 마당에 연화문배례석이 있는 곳을 보지를 못했다.

굳이 예를 든다면 불국사 대웅전 앞 석등 앞에 사각의 배례석이 있긴 하다.

그러나 불국사 배례석은 석등을 밝히고 참배를 하기위한 배례석일 것인데무위사

극락보전 배례석은 석등도 없이 그저 홀로 떠 있다.

마치 연못 위에 유유히 떠 있는 배 같기도 하고, 한 송이 아름다운 연꽃 같기도 하다.


 

●무위사 극락보전


무위사에 와서 극락보전 하나만 보고 가도 서운할 것이 없다.

왜냐 하면 무위사 극락보전은 바로 건물이 국보이면서 건물 안에도 국보급 보물(문화재)이 가득 하기 때문이다.

 

 

 

무위사의 극락보전이 왜 국보가 됐는지 그 이유를 금방 깨닫지 못한다.

그냥 건물을 아래위로, 좌우로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으로 느끼게 된다.

초라하기 그지없는 건물 한 체가 무엇이 좋다고 딱히 말할 수는 없는데 하루 종일 바라 봐도

지루하지 않을 그런 느낌을 들게 하는 건물이다.

슬픔과 그리움 같은 것을 느끼게 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서 바라만
봐도 좋은 것처럼 그런 느낌을 들게 한다.
무위사의 늙은 극락보전을 바라보고 있으면 비로소 無爲 라는
의미를 조금은 이해 할 듯도 하다.

 

 

 

국보 13호, 무위사 극락보전 건물은 맞배지붕에 주심포 양식의 건물로 단아하고
기품이 있는 건물이다. 건물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알몸인데도 부끄러움이나
수줍음조차 들지 않는다. 순수 그 자체 같기 때문이다.
화려함의 극치가 아니라 초라함의 극치다.

사물로서 바라봄이 아니라 내면의 감성으로 봐야하는 그런 건물이다.
       

 

 

 

극락보전의 좌, 우 측면이다.공포와 가구가 다 드러나 있다.

속된 말로 알몸 그 자체이다. 맞배지붕에 2고주 5고량이니, 1고주 7고량이니 하는 건축 가구(架構)
용어를 들먹일 필요도 없다.평방, 창방, 사래, 부연 등등 하며 전통 건축가들이 즐겨 사용하는
복잡한 한옥 용어를 대고 구차스럽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런 것 하나도 몰라도 그냥 바라보면 안다. 

뭐라고 말로 표현 할 수 있는 재주는 없지만 그냥 느낄 수 있다.초라하지만 위엄이 서려있고,

허전하지만 꽉 차있음을 본다.아무것도 없는 허연 벽이지만 그 안에 진리의 무언(無言)이 있음을 안다.

화려하지 않지만 궁색해 보이지 않고, 간결하면서 균형미가 있다.여유와 여백이 보이고 치우치지 않는

중용(中庸) 같은 것이 보인다.

부처님을 모신 전각은 극락정토를 상징하여 화려한 단청으로 꾸미는 것이 정통인데

반드시 화려하지 않아도 화려함은 느끼게 하는 곳이 바로 이런 법당이 아닌가 싶다. 
 

 

 

극락보전 법당 앞 문살이다.이런 문양을 소슬빗살문이라고 한다는데 맞는지 모르겠다.

여기에 꽃이 조각되어 있으면 솟을꽃빗살문이 된다.

왼쪽 것은 밖에서 본 문양이고, 오른편 것은 법당 안쪽에서 본 햇살 든 문양이다.

화려한 꽃문양이 없어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단순하고 간결하고 꾸미지 않은 소박함에서도 미(美)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사람도 이와 같지 않을까?

화려한 옷에 값 비싼 보석으로 치장하고 명품 핸드백을 든 여인 보다는소박하지만

잔잔한 미소에 기품이 있는 부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사물도 그렇지 않은가 싶다. 

 

 

 

 

 

천상의 세계 극락보전 법당 안


 

 

드디어 법당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옷깃을 여미고 서툰 몸짓으로 삼존불에 절을 올린다음
지극히 두려운 마음으로 이리저리 법당 안을 살펴본다.

천정도 살펴보고, 사면 벽도 살펴본다.

본존불 후면의 벽화도 살펴보고,

사면 벽화도 살펴본다.역시 초라하다.

 

 


퇴색된 단청과 벗겨지고 빛바랜 벽화도 초라하다. 

법당 안은 쾌쾌한 냄새마저 풍기고 있다.

그러나 그 쾌쾌한 냄새에서 초라함에서 세월의 흔적을 읽을 수 있고,

감히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서려있음을 느낀다.
천정의 보개(寶蓋)형 닫집에서는 수많은 꽃비가 내리고,

두 마리의 늙은 용이 용트림을 치며 천상을 지키고 있다.

 

                                               ▲극락보전 주불 목조아미타삼존불상

 


법당 안에는 온통 보물급 문화재로 가득하다.

우선 불단의 목조아미타삼존불상은 보물1312호)이고,

주불 뒤에 있는 아미타삼존벽화는 국보313호이다.

그리고 주불 뒷면 벽화는 유명한 백의관음도로 보물 1314호이다.

 
그리고 일괄 보물1315호로 지정된 법당의 사면 벽에는 아미타래영도를 비롯한 삼존불화,

오불도, 관음보살도, 지장보살도, 주악비천도등 총28점이 가득 그려져 있다.

건물이 국보이니 그 국보 안에 찬란한 보물이 가득히 채워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많은 보물들 중 주불인 아미타삼존불상과 백의관음도를 제외하곤 모두 진품이 아닌

가짜 복제품 이라는 사실에 경악한다.

진품 벽화는 모두 떼어내 견고한 유리관에 넣어 무위사 성보박물관에 전시해 놓았다.
 

여기서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좋은 불상이나 벽화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제자리에 있지 않고 박물관으로 옮겨졌다면

그것들은 이미 신성을 상실한 한낱 전시품으로 미술품이나 문화재일 뿐이다.


불상은 불단 위에 있을 때, 불화는 법당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신성의 생명을 얻어 불자들의

예배 대상으로 숭앙 받게 되는 것이 아니가?

화재 예방이나 보안이 철저히 보장된 국립박물관 같은 곳이며 몰라도 동일 사찰 경내에서는

법당 안이나 성보관이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정 그렇다면 유리관에 넣은 상태로 원래의 법당 자리로 갖다 놓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불국사 석굴암 본존불이 보안상 불안 하다면 국립경주박물관이나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야 한다.

그러나 절대 옮겨 갈 수가 없을 것이다.

석굴암 본존불은 문화재이기 보다는 우리들의 정신적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 그 자체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원래 것은 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복제품을 금당에 모셔두고 사람들에게 예배케 하는 행위는 속임수의

일종인 기만이 아닌가? 진품이 도난이나 화재로 소실 됐거나, 국립박물관 같은 곳에서 가져가 진품이

사찰에 없다면 몰라도 사찰 스스로 진품을 전시용으로 둔갑시키고, 가장 신성시하는 금당 안에는

복제품을 모셔 예배케 하다니 말이 되는가?
이런 현상은 비단 무위사뿐이 아니고 전국 사찰이 대부분 저지르고 있는 잘 못된 현상이니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극락보전 과 삼층석탑

 

 

 


천년 고찰 무위사에 극락보전과 삼층석탑이 없었다면 무위사가 아닐 것이다.

삼층석탑은 경주에 있는 전형적인 신라의 삼층석탑과는 그 뉘앙스가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학자들은 신라 석탑이 아니고 고려 초기 석탑으로 추정한다고 하니 아무래도 석탑은 후기로

(고려, 조선)들면서 점점 간결해 지고 볼품이 전만(신라) 못한 탑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그러고 보니 경주의 신라 탑에 비하여 날렵하지 못하고 둔탁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탑과 극락보전 건물이 어우러져 주변 자연경관과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바로 배치의 미학이고 여백의 철학이다.

 


>미지로 생각

 


 

●무위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삼존벽화(無爲寺 極樂殿 阿彌陀如來三尊壁畵) 
  -국보 313호

 

 

 

 

이 삼존불 후불벽화에서 눈동자가 미완성인 우협시 관세음보살상에는 아래와 같은 유명한 전설이 전해온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짓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 한 노인이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릴 것이니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 안을 들여다보는 이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를 허락한 주지스님은 약속대로 기다렸으나, 도대체 저 속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궁금증을 참을 길이 없었다. 마지막 49일째 되는 날, 주지스님은 ‘설마 작은 구멍으로 살짝 보는 것은 괜찮겠지’라고 생각하며 손가락으로 창호지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몰래 들여다보고 말았다.


그런데 법당 안에는 있어야 할 노인은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날아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화들짝 놀란 주지스님이 법당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지막으로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파랑새는 입에 붓을 문 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지금도 극락보전의 벽화 속 관음보살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무위사극락전백의관음도(無爲寺極樂殿白衣觀音圖)

  -보물 제1314호

 

 

 

극락보전 후불벽화인 아미타후불벽화(보물 제1313호)의 뒷면 그림으로, 떠가는 듯 일렁이는 파도 위에 연잎을 타고 서 있는 백의관음보살이 그려진 벽화이다.
하얀옷을 입고 있는 백의관음보살은 당당한 체구에 흰 옷자락을 휘날리며, 오른쪽으로 몸을 약간 돌린 채 두손을 앞에 모아 서로 교차하여 오른손으로는 버들가지를 들고 왼손으로는 정병을 들고 서 있다.
간략화된 옷주름과 더불어 팔찌와 가슴장식 역시 간소화되어 있긴 하나, 힘있고 빠른 필치로 바람에 심하게 흩날리는 듯한 옷자락과 넘실대는 듯한 파도를 표현함으로써 강한 인상을 보여주고 있다. 관음보살의 뒤쪽으로는 해 모양의 붉은색 원이 그려져 있고, 앞쪽 위에는 먹으로 5언율시가 씌어져 있다. 그리고 앞쪽 아래 구석쪽으로는 둔덕이 마련되어 있고, 관음보살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벌려 손뼉을 치고 있는 듯한 자세의 비구(比丘)가 자리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비구 어깨 위에 머리를 뒤로 돌려 관음보살을 쳐다보고 있는 새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인데, 백의관음보살에 비하여 비교적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조선 성종 7년(1476) 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은 앞면의 아미타후불벽화와 더불어 고려식 조선 초기 불화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다. 불상뒤편에 있으며 극락전 안으로 들어가야 볼수 있다. 조명이 없다면 보지 못할 수도 있다. 벽화에 오언율시가 적혀 있다.


海岸孤絶處 中有洛迦峰
大聖住不住 普門逢不逢
明珠非我欲 靑鳥是人逢
但願蒼波上 親添滿月容


바닷가 외딴 곳 한 가운데 낙가봉이 있더라.  
석가모니불 계시든 안 계시든 아미타불 만나든 못 만나든 
빛나는 구슬 내 바라는 바 아니고 우리가 찾는 건 파랑새뿐    
단지 바라는 것은 푸른 물결 위 보름달 같은 얼굴 보기를.      

 

 

■ 문화재 설명(*문화재청)


●강진 무위사(康津 無爲寺)

 

 


《사지(寺誌)》에 의하면 617년(신라 진평왕 39)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관음사(觀音寺)라 하였는데, 875년(신라 헌강왕 1) 도선(道詵)이 중건하여 갈옥사(葛屋寺)라 개칭하였다. 946년(고려 정종 1)에는 선각(先覺) 형미(逈微)가 3창하여 모옥사(茅玉寺)라 하였다가, 1550년(명종 5) 태감(太甘)이 4창하고 무위사라 개칭하였다. 그러나 경내에 있는 보물 507호인 선각대사편광탑비(先覺大師遍光塔碑)의 비명(碑銘)에 의하면 신라시대에도 이미 무위갑사(無爲岬寺)로 불렸으므로 《사지》에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때의 당우(堂宇)는 본절이 23동, 암자가 35개로서 모두 58동에 이르는 대사찰이었는데, 그 후 화재 등으로 축소되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남아 있는 당우는 극락전과 명부전 및 요사(寮舍)뿐이었는데, 1974년 벽화보존각(壁畵保存閣) ·해탈문(解脫門) ·분향각(焚香閣) ·천불전(千佛殿) ·미륵전(彌勒殿) 등을 중건하면서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이 중 국보 제13호 극락전은 벽에 29점의 벽화가 있었으나, 지금은 본존불(本尊佛) 뒤의 탱화(幀畵)만 남아 있고, 28점은 보존각에 소장되어 있다. 이 벽화들은 법당이 완성된 뒤 찾아온 어떤 노거사(老居士)가 49일 동안 이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그렸다는 전설이 있다.(*자료출처:지식백과)

 

●무위사 극락보전(無爲寺 極樂寶殿)
 -국보 제13호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인 극락전은 세종 12년(1430)에 지었으며, 앞면 3칸·옆면 3칸 크기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인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으며 간결하면서도 아름다운 조각이 매우 세련된 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극락전 안에는 아미타삼존불과 29점의 벽화가 있었지만, 지금은 불상 뒤에 큰 그림 하나만 남아 있고 나머지 28점은 보존각에서 보관하고 있다. 이 벽화들에는 전설이 전하는데, 극락전이 완성되고 난 뒤 한 노인이 나타나서는 49일 동안 이 법당 안을 들여보지 말라고 당부한 뒤에 법당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49일째 되는 날, 절의 주지스님이 약속을 어기고 문에 구멍을 뚫고 몰래 들여다보자, 마지막 그림인 관음보살의 눈동자를 그리고 있던 한 마리의 파랑새가 입에 붓을 물고는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그림속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 이 건물은 곡선재료를 많이 쓰던 고려 후기의 건축에 비해, 직선재료를 사용하여 간결하면서 짜임새의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조선 초기의 양식을 뛰어나게 갖추고 있는 건물로 주목 받고 있다.(*자료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