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27.天官女

migiroo 2011. 4. 25. 00:56

▷2011.4.23


천관녀(天官女)

 


나는 김유신에게서 버림 받은 천관녀를 좋아한다.
그녀의 천년 한을 좋아하고,

그녀의 비극적 삶을 좋아 한다.
그리고 그녀의 한 맺힌 죽음까지도 사랑한다.


 

 ▲경주 천관사지의 주춧돌과 석탑재들...


오늘 비련의 여인 그녀의 원혼이 묻혀 있는 천관사지를 오랜만에 다시 찾는다.
4월의 꽃내음으로 가득찬 경주의 봄은 싱그럽고 젊다.
그러나 황량한 천관사지에는 찬바람이 휑하니 불고 있다.
어디선가 그녀의 흐느낌이 들려오는 듯 하고,
유신의 장칼에 목이 잘린 애마의 비명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천관녀가 누구인가?
화랑 김유신의 연인이 아니였든가.
그러나 그녀는 유신으로부터 사랑을 배반당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련의 여인이 돼 버렸다.


 

▲화랑 김유신이가 천관녀 집 앞에서 애마의 목을 칼로 쳐 죽이는 모습(천관사지 안내문 그림에서 발췌)

 

 

그녀에 대한 사나이의 약속과 사랑은 모두 거짓이었나?
청년 유신은 가문의 명예와 입신양명 출세를 위하여
그녀 사랑과 그의 애마를 단칼에 베어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천관사지에는 그녀가 살았던 집터에 세워진 천관사의 주춧돌과
석탑 재들이 쓸쓸히 나뒹굴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천관녀의 한 서린 눈물처럼 뚝뚝 떨어져
지워도 지워도 지워지지 않고 선혈처럼 남아 있다.


 

 

▲현재의 재매정(김유신이 살던 집으로 우물터와 비각 안의 태대각간 김유신이라는 비신이 있다)

 

천관녀의 집에서 북쪽으로 불과 3~400미터 남천 너머에
김유신의 집(현재의 재매정)이 보인다.
천관녀는 날마다 유신의 집을 바라보며 유신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사랑의 원혼이 되어 구천을 맴돌고 있다.


 

▲천관사지에 남아 있는 건물부재와 석탑재들....

 

“천관녀는 기녀(妓女)였었다.”
“아니다 하늘에 제사를 주관하는 천관의 딸이었다.”


이렇게 학자들 간에 천관녀의 신분에 대하여 이렇쿵 저렇쿵
천년이 지난 지금도 양분되어 논란을 벌리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기녀였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김유신의 신분으로 본다던가. 당시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으로 볼 때는 천관녀는 기녀가 아니라 천관(天官)의 딸이었다는
것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김유신 장군이 나중에 태대각간이라는 최고의 벼슬에
올라 비로소 전관녀의 집을 찾아 그녀의 넋을 기리기 위하여
전관사(天官寺)라는 절을 진 것이 아닌가 싶다.
한낱 미천한 기생의 신분과 화랑 김유신이가 연애를 했을 리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관사지의 석탑재와 팔각대좌


우리는 김유신과 천관녀의 사랑이야기를 곧잘 미화하면서
왜 천관녀의 신분을 기녀(기생)로 깎아 내리는지 모른다.
어떤 역사적 사실이 불명확 한 것이라면 왜 긍정적으로 보지 않고
부정적으로 결론 지어 보는지 모른다.
천년이 지난 지금도 김유신은 신라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위대한
장군으로서 추앙받고 있지만...
그를 사랑하다 죽은 천관녀는 한낱 기생으로 전락해 버렸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황폐화된 지금의 천관사를 다시 복원할 수는 없다하더라도
최소한도 무너져 나뒹구는 석탑이라도 복원했으면 싶다.
그래야지만 천관녀의 슬픈 사랑의 원혼을 달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천관사지에 남아 있는 기와 조각들..... 
 
황량한 천관사지....
잡초만이 무성하고 그녀의 집터는 마을이 들어서고 논밭으로 변해 있다.
폐사지 여기저기 와편(瓦片)들과 주춧돌이 아직도 남아 있으니 그녀의
애달픈 흔적 같아 더욱더 가슴을 아프게 한다.
이제 겨우 당국에서 폐사지의 논밭을 사들여 유적지로서 정비하려고
준비 중이라니 그나마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계절은 피할 수 없는지 노랑 유채꽃과 이름 모를
들꽃들이 천관사지에 피어 봄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는가.
아니 김유신은 정말 천관녀를 사랑했었나?
한번 장군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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