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2.26
경주
황룡골의 은둔지, 황룡사지를 가다~
<1>
암곡동 덕동호 둘레 길을 한 바퀴 돌아 황룡골로 간다.
황룡사지 폐탑지를 돌아보기 위해서다.
절친 두 사람과 동행한 갑작스러운 답사 길이다,
계곡 길로 들어서니 갑자기 검은 구름이 일더니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우수가 지나 이제 봄의 문턱에 올라 와 있는데 눈이라니...
봄의 시샘인가, 길한 징조인가, 하늘의 이변인가?
아님 낮선 길손의 무단 침입을 경계함인지 모르겠다.
옆의 두 절친 들이 멋있다고 환호성를 질러댄다.
그녀들의 마음속에는 아직도 소녀시절 감성이 생생히 남아 있는 듯싶은데...
늙은 나는 그런 소년적 감성마저 빛바래 버렸으니 남은 것은 허망함 뿐이다 .
토함산 정상과 산허리에 금세 짙은 안개구름이 내려 앉아 있다.
경주에는 ‘황룡사’ 라는 같은 이름의 옛 절터가 두 곳이 있다.
하나는 국립경주박물관 인근에 있는 절터로서 선덕여왕이 세운 거대한 9층 목탑이 서
있었던 저 유명한 호국사찰 ‘황룡사지’를 말함 이고, 또 한 곳은 토함산 자락 황룡골
깊은 산 속에 은둔자처럼 숨어있는 작은 ‘황룡사지‘를 말한다.
황룡골 황룡사의 창건 시기 또한 선덕여왕 때 지었다는데 대찰 황룡사가 1235년 뭉골군의 침략으로
불타 소실 된 후 그 또한 폐사 됐다가 다시 조선 임난 때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재건 했다고 하니
두 황룡사는 모두 호국사찰 이었음이 분명하다. 두 사찰이 다른 점이 있었다면 하나는 몽골군을
물리치기 위해 지은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왜군을 물리치기 위해 진 것이었다니
그 역사가 참으로 기구하다.
그러나 지금은 별로 찾는 이 없는 쓸쓸하고 황량 한 곳....
그 애절한 아픔이 스며있는 절터를 찾아 가는 여정에 하늘도 아심인가,
때 아닌 눈발을 내리시니 폐사지를 찾는 아련한 아픔이 마음을 숙연케 한다.
황룡골 황룡사지는 오늘로서 3번 째 방문이다.
그러나 올 때마다 길이 넓혀지고 계곡 주변의 마을 집들이
옛 것을 버리고 새 집으로 변모해 가고 있는 모습을 보면 세월의 무상함과
옛 것의 그리움이 교차되어 다가 오기도 한다.
황룡계곡 꼬불꼬불한 콘크리트 포장길을 따라 2km쯤 올라가니 작은 암자
하나가 앉아 있다. 암자 이름이 ‘황룡사’라 쓰여 있다.
필시 옛 ‘황룡사’ 이름을 모방한 듯하여 고유의 유적지 이름을 함부로
도용(?) 해서는 안 된다는 문화재 보호법이라도 있어야 할 듯 싶다.
너른 암자 앞마당에는 별의별 요상한 석물들이 가득 늘어 서 있어
고즈넉한 암자 분위기가 아닌 좀 어수선해 보인다.
<2>
암자 마당을 지나 계곡을 건느니 황룡사지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물에 젖어 질퍽한 흙길 위에 대나무 숲 터널이 보인다.
마치 열반으로 들어가는 문 인양 길은 적막에 쌓여 있다.
길바닥엔 옛 황룡사의 와편(瓦片)들이 수없이 널려 있다.
카메라를 가지고 오지 않았으니 아쉬운데로 폰카(휴대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요즘 휴대폰에 딸려있는 폰카도 그 성능이 개선되어 왠만한 똑딱이 디카(작은 디카)와 맞먹는다.
휴대폰인지 카메라인지 주객이 바뀌였다.
좁고 음습한 길을 따라 한단 높은 언덕으로 올라서니 그 자리가 바로 절터이다.
너른 절터에는 두 무더기 석탑의 잔해들이 오랜 상처와 시간을 잔뜩 머금고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다.
동, 서 두 기의 삼층석탑....,
깨지고 부서진 석탑의 처참한 모습을 보면 분명 인위적 파괴였음을 알 수 있다.
석탑을 만들 때의 그 간절했던 인간들의 마음은 어디로 가고, 가장 잔혹한 마음으로
변심하여 석탑을 파괴 했는지 인간들의 마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선과 악의 두 얼굴을 가진 인간들...
오늘 날에도 항상 두 얼굴의 무리들이 상존하고 있다.
<3>
파괴된 석탑의 그 잔해를 보는 순간 억습 해 오는 어떤 아픔과 고통...
그리고 미안함, 송구함 같은 것이 밀려온다.
때 마침 날리는 하얀 눈발이 무너진 석탑에 내려앉자마자 빗물로 변하여
주르르 땅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마치 사지는 물론 신체부위가 하나하나 절단되고 찢겨 쌓아 놓은 것 같은 모습이다.
깨진 머리, 잘려 나간 팔, 다리(1층, 2층, 3층 옥개석)...
깨져 넘어져 있는 몸뚱이(탑신과 지대석)....
뻥 뚫려 물이 고여 있는 사리공...
너무 작게 깨져 부위를 알 수 없는 석재들...
상처 난 그것들이 더욱 가슴을 아프게 한다.
남아 있는 석재들을 잘만 추스른다면 충분히 탑을 복원할 수 있을 듯한데....
천년 석탑의 복원 소식은 아직 어디에도 들리지 않는다.
경주 지역에 현존하는 석탑들은 대부분 무너져 파괴 된 것들인데 근세기에 복원한 것들이 많다.
그러나 너무 완벽하게 복원하여 마치 새로 만든 탑처럼 보이는 것도 있으니
복원이 꼭 바람직한 것은 아닌 듯 싶다.
파괴되어 무너져 있는 아픔도 역사이기 때문이다.
다만 석재들이 유실되거나 도난 되지 않도록 관리를 잘해야 할 것이다.
<4>
황룡사에 내려오는 이야기는 불국사고금역대기에 실려 있다.
절의 창건 시기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2년(633)으로 되어 있다.
기록을 보면 장인들이 뜻을 모아 약사여래상을 모시고 처음 황둔사(黃芚寺)하였는데
제39대 소성왕 때에 5년간의 큰 가뭄이 계속되어 전국의 초목이 말랐으나 유독
이곳 골짜기만은 물이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계곡으로 흘러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게 되니 산 이름을 은점산(隱霑山)라 했다 한다.
그 후 조선 16대 인조왕 때 임란 중 왜군에 의해서 절이 불타 없어진 것을
담화(曇華)스님이 절을 재건하고 황룡사(黃龍寺)라 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
그리고 숙종 때 폐사 직전에 겨우 심적암(深寂庵)이라 명맥을 유지 해 왔다가
1715년 이후에 완전히 폐사 됐는데 그 폐사 원인은 알 수 없다한다.
<5>
절터를 나오니 눈발도 멈췄다.
쓰러진 석탑을 뒤로 하니 찡~한 마음속에 따끈한 녹차 한잔이 간절해진다.
암자 옆에 다 헤어진 찻집이 보인다.
대문은 없고 대신 “황룡 무인 다실”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안으로 들어서니 다 쓰러져가는 처마에도 낡은 현판하나가 보인다.
“淸淨心是佛(청정심시불)”
청정한 마음이 곧 부처이다.
이런 의미인 듯 하다.
잔뜩 기대를 하며 방안으로 들어가니 청정은커녕 방안이 아수라장이다.
찻집이 곧 이사를 갈 채비를 한 것인지 가재도구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래도 찻잔은 가지런히 놓여 있었으나 데울 물과 불이 보이지 않는다.
차를 포기하고 아쉬운 마음으로 밖으로 나오다 문득 깨달음 하나가 떠오른다.
물질로 마시는 차가 아니라 마음으로 차를 마시라는 스님의 뜻이었다는 깨달음이다.
그렇게 깨닫고 보니 바로 내가 곧 부처인듯 싶다.
아무튼 황룡골의 황룡사지는 조용하고 사색하기에 좋은 곳이다.
무너져 있는 탑재를 바라보면서 천년 과거로의 긴 시간 여행을 해봄도 좋고,
잘만하면 암자 황룡사에서 녹차한잔 얻어 마시며 잠시 부처가 돼볼 수도 있어 좋다.
또한 보문단지에서 동해 감포로 가는 국도 변의 사시목 마을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절터로 들어가는 왕복 약 2.5km 정도의 길을 터벅터벅 걸으면서 이 마을 기웃 기웃,
저 마을 기웃거리며 걷는 재미도 즐거울 듯 하다.
막 연초록빛으로 물든 이른 봄날 걸으면 더 좋을 것 같고,
단풍이 약간 들기 시작하는 이른 가을날에 걷는 것도 좋을 듯 하다.
그러나 쓸쓸하고 황량한 추운 겨울날에 절터를 걸어 들어가는 것 또한
깊은 의미가 있을 듯하다. 도시락 싸 들고 말이다.
사랑하는 이와 둘이 걷는 것도 좋겠지만...
셋 보다는 둘, 둘 보다는 혼자 걷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자, 나머지 사진도 구경해 보자.
깨지고, 파괴되고, 쓰러져 있는 탑재들...
그것들은 말이 없는 것 같지만...
귀 기울여 들어보면 천년 역사의 소리가 들려 올 것이다.
폰으로 찍은 사진 치고는 꽤 괜찮은 편이다.
PC로 옮겨 살짝 표샵을 하기는 했지만...
>2012.2.27일. 황룡골에서 미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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