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문화재 단상

28.황룡사지 상념

migiroo 2011. 4. 26. 18:41

▷2011.4.23(토)


●경주 황룡사지(黃龍寺址) 상념

 

 

 

4월의 강한 봄바람에 벚꽃이 꽃비처럼 날린다.
화사하게 피었다가 미련 없이 낙화하는 벚꽃을 보면
화려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허무함과 절망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구차하게 삶에 매달려 사는 인간들에 대비되어
벚꽃의 낙화 모습은 경이로움마저 자아내게 한다. 


 

 

 

경주의 황룡사지와 분황사 주변을 돌아본다.
벚꽃이 지니 그 빈자리에 키 작은 노란 유채꽃이 장관을 이룬다.
유채꽃 밭이 바람에 흔들려 파도처럼 출렁인다.
황룡사지 들판은 온통 유체꽃밭의 노랑색 일색이다.
그냥 노란 것이 아니라 강열하고 정열적인 노랑이다.


 

봄바람에 처녀 가슴이 울렁거린다는 했는데...
울렁울렁 거림이 어찌 처녀 가슴뿐이랴.
그 황홀한 유채꽃 물결을 바라보고 있으니 이제는 사랑이 바닥난
늙은 나의 가슴도 주체할 수 없이 울렁거린다.


 

 

 

신라시대의 최대 사찰이었던 황룡사,
그리고 동양에서 가장 높았던 9층 목탑이 있던 황룡사...
몽골의 침입으로 1238년 한 순간에 불타버린 황룡사와 거대한 9층 목탑....
지금 그 한 많은 황량한 옛 절터에도 봄은 찾아 왔다.
겨우내 잠자고 있던 잔디들이 새싹을 틔우기 시작했고, 절터 여기저기
이름 모를 들꽃들이 피어 훈풍에 하늘거리고 있다.


금당터에 남아 있는 거대한 불대좌(佛臺座)와 9층목탑을 지탱했던
심초석(心礎石)만이 여기가 황룡사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을 뿐이다.
황룡사지는 정말 황량한 벌판이라는 표현밖에 할 말이 없다.
그 너른 벌판에 수많은 건물이 서 있던 주춧돌만이 선명히 남아
거찰 황룡사의 규모가 얼마나 컷는 지를 어름짐작 할 수가 있게 해 준다. 


지상 80m의 거대한 9층목탑...
높이 1장6척(약5m)의 금동장육존상....
무게 50만근 황룡사 대종(大鐘)...
크기 182cm의 거대한 황룡사 치미(鴟尾)...
몽골군의 기마군단(騎馬軍團)의 말발굽 소리....
불타는 황룡사 그리고 9층목탑....
진흥왕, 진평왕 그리고 선덕여왕....
자장율사 그리고 백제 장인 아비지...


황량한 황룡사지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런 것들과 역사적 관련
인물들이 면면히 폐사지에 오버렙 되어 떠오른다.
오늘 나는 황룡사지에 와서 황룡사에 대한 역사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그저 저 황량한 폐사지를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을 말하고자 함이다.

 


금당의 장육존상(丈六尊像) 은 어디로 갔는가?

 

 

금당터를 둘러본다.
장육존상을 비롯한 삼존불상이 있던 불대좌(佛臺座)에는 수학여행 온
초등학생들이 걸터앉아 제잘 거리고 있다.

 


높이 약 5m, 황룡사지의 그 거대한 장육존상은 어디로 갔는가?
그리고 장육존상 좌, 우에 있던 협시불상 또한 어디로 갔는가?
황룡사가 불탈 때 그 화염에 녹아 없어 졌는가?
그 엄청난 크기의 장육상이 만약 불에 녹았다면 발굴 조사 때 녹은 쇳덩어리라도
땅 속에 묻혔을 법한데 어찌 그 흔적마저 없단 말인가?


황룡사의 대대적인 발굴 조사는 1976년부터 8년 여간 이루어져 금당지를 비롯한
수많은 건물지가 드러났고, 크고 작은 출토 유물만도 무려 4만 여 점이나 나왔다 한다.
그런데 장육존상의 실체는 물론, 무게가  3~5톤은 족히 나갔을 장육존상의
불에 녹은 흔적조차 출토 되지 않았다는 것은 이해되질 않는다.
의문의 꼬리는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아마도 불에 타 녹아 없어진 것이 아니라 그 후에 사라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다. 

 

 

다만 상상으로만 장육존상을 가늠해 볼 뿐이다.
아마도 위 사진의 불상과 비슷한 거불(巨佛)이 아니었겠나 상상해 본다.
5m 나 되는 금동불상이 현재 남아 있는 대좌에 서 있었을 것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린다.

 


*장육상(丈六像), 반장육상(半丈六像), 등신상(等身像), 걸수반불상(傑手半佛像), 대불(大佛) 등이라 부르는데,

장육은 보통 사람의 키를 기준으로 16척 크기의 불상을 의미하며, 걸수반불이란 한 뼘 만한 길이의 불상을

말한다.(*1 척은 30.3cm)

 

 

●불타버린 9층 목탑

 


 

9층목탑을 지탱하고 있던 심초석 위에도 아이들이 올라가 놀고 있다.
아이들이 불대좌가 뭔지, 심초석이 뭔지 알겠는가.
부처님도 아이들을 좋아하시니 심초석 위에나 당신이 앉아 있던 대좌에
아이들이 올라가 노는 것을 어찌 불경스럽다고 꾸짖을 것인가.


그냥 보면 한낱 바위에 불과하지만 그 위에 거대한 목탑이 세워져 있었다고
상상해보면 천 수백 년 역사의  흔적이 면면히 돌 안에 깃들어 있음이 보인다.


 

▲다음 화면 켑쳐 사진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불에 탔을까?
아마도 황룡사가 불에 탔을 때 온 서라벌이 대낮처럼 훤했을 것이다.
몇날 며칠 동안 불에 탔을 것이다.
불타는 9층탑을 바라보며 고려 왕실도, 승려들도 서라벌 사람들도...
하늘에 있는 선덕여왕도 애통해 하며 가슴을 쳤을 것이다.


한국 고대 건축의 최고봉으로 알려진 황룡사 9층 목탑에 대한 복원 문제가
끊임없이 대두 되고 있다. 심지어는 특정 종교의 건축물을 왜 국민 세금으로
복원하느냐 하면서 타 종단의 비판 소리도 높은 게 현실이다. 


"복원하자, 복원하면 안 된다."


이렇게 복원 문제는 결코 여의치가 않다.
막대한 재원도 문제이지만 무엇보다도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 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 당국, 학자, 종교단체의 찬반 양분은 쉽게 화해되지 않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그저 불심의 원력을 가진 불자들이나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일부 사람들의
꿈같은 소원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막강한 정권을 쥔 자가 누구인가에 따라서 문화재를 보는 관점이 다른 것 같다.

복원 문제도 권력의 향방에 따라 달라 질 수 있는 것 같다.

억만년 흐르는 강마저도 물길을 바꾸는 권력이 있는 가하면  

제대로 힘 한번 못 쓰는 권력도 있다.

 

몇 년전 경주남산에서 발견된 마애대불을 금방 일으켜 복원 하겠다고 당국이나 불교계에서

호들갑을 떨었었는데... 권력이 바뀌자 꿀먹은 벙어리가 됐지 않은가.
황룡사 9층목탑의 복원은 권력의 의지에 달린 것이지 결코 돈이나 기술력 때문에

복원 못하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황룡사가 꼭 복원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9층목탑의 심초석

 

9층탑지에 쓸쓸히 앉아 있는 심초석...
지금은 비록 아이들의 놀이터(?) 역할도 마다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심초석으로서의 제구실을 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간절해 바랄 뿐이다.

 


●황룡사 대종은 또 어디로 갔는가?

 

 

 

황룡사 대종(大鐘), 구리 49만 7,581근.
성덕대왕신종(12만근, 18.9 톤)보다도 무려 4배가 큰 그야말로 큰 종이다.
그런 대종도 장육존상처럼 행방이 묘연하다.
절이 불탈 때 함께 녹아 버렸는지....,
아니면 전해 내려오는 구전처럼 침략군(몽골군)이 가져가려고 하다
동해구 대종천에 빠트리고 말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보다 작은 에밀레종도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어찌하여 없어졌는지
참으로 아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십 수 년 전에 사라진 대종을 찾는다고 문무대왕 수중릉이 있는 감포 동해구
대종천 앞바다를 해군과 불교계가 나서서 바다 밑을 샅샅이 뒤졌으나
결국 대종의 흔적도 찾지 못하고만 일도 있었다.

 

 
●황룡사의 치미(鴟?)는 황룡사를 말해 주고 있다.

 


황룡사지 발굴 조사 때 금당의 치미를  발견했다.
지금 경주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는데 얼마나 큰지 치미만 봐도
황룡사의 건축물의 규모가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치미(鴟尾)란 새(솔개, 수리부엉이, 올뺌이 등 맹조류)의 꼬리 부분를 말한다.
머리 부분은 치수(鴟獸)라고 부른다.
취두(鷲頭) ·치미(尾), 치수(獸)라고도 하며 龍머리 형태도 있다.
치미는 기와의 일종으로 흔히 망새라고도 하여 궁궐이나 사찰의 전각(殿閣),
문루(門樓) 따위의 용마루나 지붕골의 끝에 얹는다.
그 의미는 건물의 위엄을 나타내고 화재와 같은 재난을 방지하기 위한 상징적 조형물이다.

 


▲경주박물관에 전시 되어 있는 황룡사지 출토 치미(실제)

 

참으로 용케도 이 치미가 땅속에서 발견되니 그 크기를 기준으로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게 됐다.
치미 이외에도 크고 작은 출토 유물이 나왔으니 황룡사지를 답사 후에
꼭 경주박물관에 들려 황룡사지 출토 유물을 보아야 할 것이다.

 


●황룡사지에도 봄은 찾아오고...


 

 

 

너른 폐사지엔 수많은 건물들이 자리했던 건물터와 주춧돌 등이 남아 있다.
금당지를 비롯한 강당지, 중문지, 종루지, 목탑지, 경구지 등등....
모두다 불타버렸지만 석재로 된 주춧돌은 건물터에 가지런히 박혀 있다.


 

 

빈터 여기저기에 제비꽃, 민들레 등 이름모를 들꽃들이 피어 있다.
천 년 전 그 왕성했던 그 시절에도 봄꽃은 피고 지었을 것이다.
황룡사지를 나온다.
문득 석존의 가르침 중 한 문구가 떠오름은 어인 일인가?

 

“生住異滅(생주이멸)”

 

황홀한 유채꽃밭도 그 꽃밭에서 사진을 찍는 젊은 사람들도... 
방황하는 나 자신도...
이름 모를 들꽃들도...
모두 이세상에 생(生)기여 잠시 머물다  변화하여 소멸(消滅) 한다.
황룡사지처럼....
 
 
>미지로

 

 

 

●후기 : 황룡사의 복원 계획 소식 (2012.3.10)


자료출처 : 법보신문 기사 (발행호수 : 1136 호 / 발행일 : 2012-03-07)


경주 황룡사 9층 목탑 2027년까지 복원
스님 거주공간·명상센터 등 시설도 건립
복원 후 불교적 색채 배제 주장도 제기

 

              ▲경주시와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월28·29일 경주 드림센터에서 개최한 황룡사 복원연구 포럼. 

 

 

불교계의 오랜 숙원 사업인 경주 황룡사 9층 목탑과 장육존상(丈六尊像)이 2027년까지 복원된다. 복원된 황룡사에는 스님들의 거주시설을 비롯해 템플스테이, 사찰음식체험실, 명상센터, 불교미술공예관이 들어서며, 성대한 불교문화축제를 비롯해 불교의례, 민속의례 등 전통문화 및 생생한 역사재현 공연장으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할 것으로 보인다.

경주시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2월28~29일 경주보문단지 내 드림센터에서 그 동안의 기초연구 성과를 공개하고 향후 추진계획과 정비활용 계획을 모색하는 황룡사 복원연구포럼을 개최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김덕문 학예연구관이 이날 발표한 ‘황룡사 복원정비 종합계획안’에 따르면 지난 2005년부터 실시한 황룡사 복원 마스터플랜 수집을 끝내고 올해부터 2017년까지 ‘복원설계 및 정비사업’에 착수한다. 이 단계에선 황룡사 건축물 복원에 앞서 담장·중문의 설계 및 복원이 이뤄지고, 목탑 설계, 연구센터 건립, 사지 내 관람환경정비도 실시된다.

 

이어 2027년까지 진행되는 ‘황룡사 건축물 복원’ 단계에선 경주시의 랜드마크로 기능하게 될 황룡사 9층 목탑과 금당이 복원된다. 황룡사 9층탑은 아파트 30층에 해당하는 80m 높이로 신라 왕경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역할을 하게 된다. 또 황룡사 목탑과 더불어 신라의 3대 보물 중 하나로 5m70cm 크기의 장육존상과 그 불상을 봉안하게 될 금당도 이 때 복원된다. 전체 3284억여원의 예산 중 목탑 복원에 1354억, 장육존상 및 금당복원에 434억의 예산이 배정됐다는 점에서도 목탑과 장육존상이 이번 황룡사 복원의 핵심 사업임이 여실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2035년까지 진행되는 마지막 ‘역사·문화환경정비’ 단계에서는 동강당, 서강당, 중문, 동승방, 서승방, 남회랑 등 부속건물을 비롯해 주변 역사·문화환경 정비를 모두 마무리한다는 계획이다. 특히 황룡사 동쪽 일대의 왕경유적지에는 스님들의 거주시설과 템플스테이, 명상센터, 불교미술공예관 등 시설이 들어서며, 황룡사 진입로를 중심으로 공연 및 전시를 할 수 있는 공간, 쇼핑거리, 숙박·음식을 판매하는 신라촌 등 다양한 편의시설이 조성될 예정이다.

김덕문 학예연구관은 “황룡사 복원은 최소한 20년 이상 소요되는 장기간에 걸친 실행 연구와 설계, 공사가 진행된다”며 “공사를 중심으로 하는 복원 행위 역시 옛 역사정신에 입각해서 재현되고 공연관람으로 이뤄짐으로써 전통문화에 대한 재생 부흥을 위한 무대이며 장소가 될 수 있도록 종합계획에 포함했다”고 말했다. 

                                                 ▲경주 황룡사 9층목탑 복원 조감도. 

 

 

(재)한얼문화유산연구 양윤식 원장은 복원 이후 황룡사의 활용 방안에 대해 발표했다. 양 원장은 황룡사를 전시, 관람, 체험, 교육, 연구 등 활용자원으로 이용하되 황룡사라는 문화재 특성상 종교적 경건함을 훼손할 수 있는 활용방안의 구상은 배제돼야 함을 강조했다. 복원된 황룡사 경역 내부 공간의 활용은 최대한 황룡사 본래의 기능인 종교시설로서의 활용에 한정돼야 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이다. 장육존상을 안치한 금당도 본래적 기능을 부여해 예불의 기능을 부여하며, 강당은 복원 후 불교계와의 협의에 따라 공식 종교행사나 고증·복원되는 불교의례의 재현 공간으로 사용이 가능할 것이라는 게 그의 분명한 입장이다.

 

양 원장은 “황룡사 복원이 완료되면 경주시뿐 아니라 국내에서 손꼽히는 문화․관광자원으로 부상할 것으로 기대되는 만큼 그에 걸맞는 문화․관광 프로그램이 개발돼야 한다”며 “황룡사의 특성을 살려 매년 부처님오신날에 공식 종단 행사나 ‘불교문화축제’와 같은 축제 및 행사 개최를 기획해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각에선 황룡사 복원문제를 종교적 차원이 아닌 역사적 차원으로 접근해야 하며 종교적 색채를 배제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나오기도 했다. 따라서 경주 황룡사가 종교적 기능이 상실된 청주 흥덕사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불교계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경주=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 자료(꼭 읽어 보자)


1.황룡사지 문화재청 정보
2.고려의 대몽항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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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적6호. 황룡사지皇龍寺址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黃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문화재청 자료)

 

 

2.고려의 대몽항쟁사


1231년(고종 18)부터 1259년(고종 46)까지 계속된 몽골의 고려 침입.


●개요


몽골은 13세기 초엽에 칭기즈 칸이 출현하면서 분열된 부족의 통일을 이루어 광대한 대제국을 건설했는데, 유라시아 구대륙의 대부분을 정복하는 전쟁과정에서 1231~59년 고려에 대한 침략을 진행했다. 약 30년 동안 계속된 침략은 대략 6차례나 되었다. 최초의 침략은 1231년이었고, 이후 1232년에 2차, 1235~39년에 3차, 1247년에 4차, 1253년에 5차, 1254~59년에 6차의 침입이 있었다.


●30년간의 대몽전쟁

 

1231년 살리타이(徹禮塔)에 의해 지휘된 몽골군은 6년 전에 있었던 몽골 사신의 피살사건을 구실로 침략을 시작했다. 몽골군은 귀주·자주 등지에서 고려군의 치열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그 일부가 개경을 거쳐 충주까지 도달했다. 이에 궁지에 처한 고려정부는 침략군과 화의를 맺고 일단 몽골군을 철수시키는 데 성공했다. 몽골군이 철수하자 집정자 최우는 1232년 7월 정권유지와 장기항전을 위해서 수도를 강화도로 옮겼다. 강화도 천도 직후 몽골군은 고려정부의 개경환도를 요구하며 2차침략을 개시했다. 몽골군은 강화도를 직접 공략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경상도까지 진출하여 대구 부인사에 보관되어 있던 고려초조대장경을 불태웠다. 그러나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골 주력부대는 광주를 공격하다가 패배하고, 경기도 용인군의 처인성에서 승려 김윤후가 지휘하는 고려농민군의 화살에 맞아 살리타이가 사살되는 등 패배를 거듭했다. 그리하여 몽골군은 서둘러 철수했는데, 이는 광주나 처인성의 백성들의 용감한 항쟁에 의한 것이었다.


1235년 탕구(唐古)에 의해 인솔된 몽골군은 3차침략을 해왔는데, 이번에는 5년간이나 걸린 오랜 싸움이었다. 도합 3회의 침략으로 이루어져 1235년에 경상도지역, 1236년에 전라도지역, 그리고 1237~38년에는 다시 경상도의 경주까지 침입하여 신라시대에 건립되었던 황룡사를 불태웠다. 이에 고려에서는 군민이 합세하여 대항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온수군(溫水郡 : 지금의 온양)의 백성들이 과감하게 싸워 포위한 적을 물리쳤으며, 죽주(竹州 : 지금의 죽산)에서는 15일간에 걸친 몽골군의 맹렬한 공격을 막았다. 한편 강도(강화도)정부에서는 광주와 남경의 주민을 강화도로 오게 하여 강화도 연해에 둑을 더 쌓아 도읍의 방어를 한층 강화했다. 육지에는 야별초를 파견하기도 하고, 각지의 산성에 방호별감을 보내 백성들의 항전을 독려하는 등 침략군의 격퇴에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군사적인 열세가 너무 심하여 최우를 비롯한 지도층은 부처의 가호로 적군을 물리치기 위해 새로운 대장경의 조판에 착수했는데, 이는 적절한 대책이 되지 못했다. 전쟁이 장기화되어 피해가 심해지자 강도정부는 마침내 1238년 12월에 장군 김보정과 어사 송언기를 몽골에 파견하여 철군을 호소했다. 이때 몽골도 고려의 끈질긴 저항에 지쳐 있었으므로 이듬해 4월에 국왕의 친조를 요구하면서 군대를 철수했다. 그러나 고려는 국왕을 대신해서 왕족인 신안공 전(新安公佺 : 현종의 8대손)을 몽골로 보내었다. 그러자 몽골은 해도에 들어가 있는 민호를 내륙으로 옮길 것, 그 민호의 수를 점검하여 보고할 것, 뚤루게(禿魯花 : 인질)를 보낼 것, 반몽골 행위를 한 고려의 관원을 체포하여 보낼 것들을 요구하며 이어서 국왕의 친조를 촉구했다. 이에 고려는 3번째 조건에만 응하여 왕족인 영녕공 준(永寧公綧)과 귀족의 자제 10명을 뚤루게로 보냄으로써 일단 분쟁을 마무리했다. 그뒤 몽골에서는 태종이 죽어 정치가 복잡해졌으므로 한동안 침략은 없었다.


그뒤 1246년에 구유구(貴有 : 뒤의 정종)가 즉위하고, 1247년 앞서 요구했던 개경환도와 국왕친조가 되지 않은 것을 구실로 아무간(阿母侃)이 이끄는 몽골군이 4차침략을 시작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을 노략질했으나, 이듬해에 정종이 갑자기 죽자 몽골군은 곧 철수했다.


1251년 몽케(蒙哥)가 즉위하여 헌종이 되고나서 고려에 대해 국왕의 친조와 출륙을 요구했다. 그러나 고려가 응하지 않자 1253년 여름에 또다시 출병하여 5차침략을 단행했다. 예꾸(也窟) 휘하의 몽골군은 군사공략을 전개하는 한편 강화도에 사자를 보내 국왕의 출륙을 촉구하며 공격했다. 고려정부는 몽골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충실도감을 두고 각 영의 군력을 보충하여 수전을 연습시키고, 대륙의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옮기도록 조처했다. 그리하여 실제로 별초군이 몽골군과 교전을 전개하고, 특히 김윤후가 지휘한 충주민들의 영웅적 항전으로 빛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각지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과 피해는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으므로 고려에서는 결국 개전 이래 처음으로 국왕이 강화도의 새 궁궐에 나와 예꾸가 보낸 사자를 접견했다. 이어서 안경공 창(安慶公淐)이 몽골로 입조의 길을 떠남에 따라 1254년 정월에 몽골군도 철수했다.


그러나 출륙할 때 시중 최항을 비롯한 고려의 대신들이 나오지 않았고 몽골에 항복한 관리들을 처형한 사실을 비판하며 자랄타이(車羅大)가 이끄는 몽골군이 다시 쳐들어와 6차침략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1254~59년 6년간이나 도합 4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몽골군은 내륙지역을 철저히 유린하여 강화도 고려정부의 굴복을 받아내고자 했다. 강도정부는 경상·전라의 별초군을 뽑아 올려 도읍의 경비를 강화했고, 각지에서도 백성들과 별초군이 몽골군에 대항하여 용전했다. 이때 몽골군도 피해를 입었지만 고려의 피해는 더욱 커서 몽골군에게 포로로 잡힌 사람만 20만이고, 죽은 자는 헤아릴 수가 없었다. 1255년 일단 몽골군은 북상하여 철수했다가 다시 침공하여 해도공격을 시도했으나, 강도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책과 입보민(入保民)의 분전으로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이듬해 9월에 철군했다. 그후에도 고려가 출륙환도와 국왕의 친조에 전혀 응할 기세를 보이지 않자, 1257년 6월에 다시 와서 국왕의 친조 대신에 태자가 입조하여도 좋다고 밝혔다. 고려도 이 조건에 응하여 몽골군은 철수했으나, 약속과 달리 태자의 동생인 안경공 창을 보냈다. 그런데 이듬해 3월 유경(柳璥)·김준(金俊) 등이 집권자 최의(崔竩)를 제거하고 최씨정권을 종식시킨 무오정변이 일어났다. 이때 자랄타이가 다시 침입을 감행해와서 고려가 약속을 어긴 사실을 추궁하고 국왕의 출륙과 태자의 입조를 거듭 촉구하며, 강화 대안에 군사를 집결시켜 강화도를 위협하는 한편 각지를 노략케 하는 사태가 있었다. 이에 고려는 화의가 불가피하여 1258년 12월에 박희실(朴希實)을 보내어 출륙환도와 태자입조를 약속했고, 이듬해 태자가 몽골로 출발함으로써 양국의 무력충돌은 끝났다.


●일반백성들의 대몽항쟁


강도정부와 떨어져 있는 내륙에서는 몽골군 침입에 대하여 정면적 저항보다는 주로 소규모의 유격전을 펼쳤다. 또한 산성에 들어가 피하고 있던 농민들이 저항하여 산성을 중심으로 한 공방전이 주로 벌어지게 되었다. 몽골군은 성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대포와 같은 각종 무기들을 동원하기도 하고 성 밑으로 굴을 파들어가거나 성을 불지르는 화공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의 공성전은 광주(1232)·죽주(1236)·충주(1253)·춘천(1253)·장성(1256) 등 여러 지역에서 벌어졌는데 각지에서의 전투는 기록상으로 대략 60건 정도가 확인되고 있다.


당시의 집권층인 무인정권은 쉽게 굴복하지 않았으나, 강화도에 있었기 때문에 내륙전투에 대한 상당한 한계점을 보였다. 따라서 일부지휘관의 선전분투만으로 몽골의 대군을 물리치는 데 한계가 있었으므로 각 지방에서 스스로의 생존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농민들의 자위적인 전투가 벌어졌다. 이들은 민병들로서 정부의 별다른 지원 없이 스스로 임시편성의 방어군을 조직하여 침략군과 대결했다. 귀주나 광주에서는 민병이 정부군과 협력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용인·충주·상주·진천 등지에서는 순수하게 농민군만으로 몽골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심지어 용인 처인성에서 침략사령관이 고려 농민에게 사살당하기까지 했다. 고려정부가 30년 가까운 기간 동안 몽골과 대적하여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화도의 좋은 지리적 조건과 수전에 약한 몽골군의 약점도 있었지만, 일반백성들의 끈질긴 항몽투쟁에 의지한 바도 크다고 할 수 있다.

 


●대몽강화와 개경환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고려 농민들의 생활여건이 극히 악화되었고, 강화도의 고려정부도 재정적으로 타격이 심화되어 무인정권의 지도력이 약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고려정부는 몽골과 타협책을 점차적으로 모색하게 되었고, 그결과 고려태자의 몽골 입조가 이루어진 것이었으며 몽골도 고려의 반응에 따라 군사침략을 중지하고 사태추이를 관망하게 됨으로써 더이상의 무력침략은 재개되지 않았다. 그러나 1259년에 전쟁이 중단되고도 개경환도가 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1259년에 고종이 죽고 새로이 즉위한 원종은 김준 등 무인정권의 반대에 부딪혀 출륙환도를 못하고 있었다. 1268년에는 김준이 같은 무장인 임연(林衍)에게 죽음을 당하고 새로운 집권자인 임연은 강화를 더욱 노골적으로 반대하여 원종을 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몽골의 압력으로 원종이 복위되고, 그러한 상황에서 임연이 등창으로 죽었다. 그의 아들인 임유무(林惟武)가 뒤를 이었는데, 원종에게 제거당함으로써 무인정권은 완전히 몰락했다. 항몽책을 견지하던 무인정권이 붕괴되자 강화 10년 만인 1270년에 원종이 몽골의 군사적 뒷받침을 받아 개경으로 환도했다. 당시 강화도에 있던 주전(主戰)세력은 정부의 조치에 반발하여 삼별초군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고, 진도·제주도 등을 거점으로 항전을 지속했고, 남방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상당히 세력을 떨치기도 했다. 그러나 1273년에 삼별초 항쟁이 진압된 뒤 고려는 1274년과 1281년에 원의 일본정벌에 동원되었으며, 1세기 가까운 기간 동안 원의 정치간섭을 받게 되었다. 고려의 왕실은 몽골 황실과 혼인했으며, 또한 고려의 변경지역은 원의 영토로 편입되기도 했다.(*자료 출처 尹龍爀님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