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다시 찾은 울산 운흥사지

migiroo 2011. 6. 11. 10:24

▷2011.6.10

 

●다시 찾은 울산 운흥사지

 


여름 장마가 오늘부터 시작된다는 기상청 예보이다.
오늘 비는 없지만 아침부터 하늘이 온통 잿빛이다.
어제 친구와의 작은 다툼 때문인지 마음이 무겁고 착잡하다.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다툼의 원인 제공은 옹졸한 나로부터
생긴 듯하여 더 마음이 우울해 진다.


우울한 마음도 달랠겸 폐사지 운흥사지를 다시 찾아 간다.
황량한 옛 폐사지....,
허망함과 텅 빈 과거 시간들만이 가득한 폐사지...

 

 

 


나는 왜 마음이 울적할 때 마다 폐사지를 찾는 것일까.
아마도 폐사지처럼 모든 것을 비우고 싶은 욕구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곳에 내 삿된 욕망과 집착을 털어 버리고 싶은 욕구 같은 것이다.


운흥동천 깊은 산속, 천년 폐사지 운흥사지는 전이나 이제나 황량하기가 그지없다,
다른 폐사지에서 흔히 보이는 상처난 석탑이나 당간지주 같은 것도 없고,
더욱이나 탑비라든가 귀부 같은 석물도 보이지 않는다.


그나마 남아 있던 아주 미미한 작은 흔적들마저 6월의 무성한 잡초에 묻혀버려
너른 절터는 그저 초록빛 일색인 공터 일뿐 속절없는 개망초들만 잔뜩 피어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다.


 

 


폐사지에 웬 벤치인가?
젊은 연인들이 앉아 밀애를 속삭이기에 딱 좋은 그런 벤치들이
폐사지 여기저기에 외롭게 앉아 있다.
아마도 벤치에 앉아 옛 폐사지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성찰해 보라는
깊은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벤치를 설치한
어느 공무원의 사려 깊은 배려에 고마움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폐사지를 한 바퀴 돌아본다.
잡초 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니 돌아 볼 것도 없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현상일 뿐 심안으로
보면 천년사지의 온갖 현상이 다 보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 나 같은 범부의 눈으로 옛 절터의 숨결 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심안을 잠시 빌려 폐사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 본다.


낭낭한 염불소리, 목탁소리...
노스님이 내 지르시는 일갈 소리...
공양(밥) 짓는 소리....
장작 타는 냄새...
닥 나무(종이 만드는 나무) 으께는 소리...
스님들의 한숨소리...
관료들의 다그치는 소리...
(당시 운흥사 스님들은 조정의 종이 만드는 강제 부역으로 몹시 시달림)
조석으로 올리는 예불소리...
마당 빗질 하는 소리...
분주히 오가는 스님들의 옷 스치는 소리...
개 짖는 소리(운흥사에도 누렁이 한 마리 정도는 있을 것이기 때문)
.....
.....


무심코 잡초 더미 속에 까만 와편(기와조각) 하나가 눈에 띈다.
살짝 뒤집어 보니 아뿔싸, 그 손바닥 크기의 공간에 수많은 개미들이 
하얀 알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어 아우성이다.
나야 살짝 건드린 것에 불과 하겠지만 개미들에게는 천지개벽만큼이나
이변을 당한 것이리라....
재빨리 다시 원상대로 해 놓고 개미들에게 말한다.


‘개미들아 미안해....“   


천년 절터는 결코 죽어 있는 폐사지(廢死地)가 아니고
아직도 살아 숨 쉬고 있는 절터라는 것을 실감한다. 


 

 


작은 석조하나가 잡초 속에 몸을 내 보이고 있다.
운흥사지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석조물이다.
석조 옆면에 새겨진 글씨는 이제 더 이상 눈으로는 알아 볼 수가 없다.  


또 다시 운흥사의 스님들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석조에 닥나무를 으깨어 찢고 있는 스님들의 거친 손마디도 보인다.
그 고초가 얼마나 깊고 컸을까 싶어 가슴이 아파온다.
닮고 달은 석조를 어루만져 본다.
아직도 닥나무에 쓸린 스님들의 손길이 묻어나는 듯싶다.


 

 

 
이런 닥나무 껍질을 석조에 넣고 으께 찢어 한지를 만든다고 한다. 
이런 방법은 예나 지금이나 전통한지 제조 방식이다.
조정에서 필요한 한지를 운흥사를 포함하여 전국의 지정된 사찰에서
만들어 조정에 바치게 했다니 그 노역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당시 스님들의 고초가 아직도 폐사지에 묻어 있는 듯 아파온다.


 

 


지난번에 왔을 때는 보지 못한 석조물 하나가 눈에 띈다.
무엇에 쓰인 것이었을까?
가운데가 움푹 파인 것을 보니 무엇을 찧거나 갉은 흔적이 분명하다.
곡식을 찧기에는 너무 작은 것 같고, 아마도 약초 같은 것을 으깨는데
사용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빗방울이 비치기 시작한다.
아무래도 비가 올듯하여 서둘러 폐사지를 나온다.
비 때문이 아니라 더 머물고 싶어도 폐사지의 아픔이 발길을 돌리게 한다.
다른 절터와는 달리 운흥사지에만 오면 유달리 마음이 아픈 이유는 무엇일까.
폐사지를 나와 운흥사지 부도밭으로 향한다.

 

 

 

●해탈의 땅 운흥사지 부도밭


부도밭은 계곡 건너 페사지 건너편 언덕 평지 위에 있다.
운흥사지 부도 밭은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부도와 석물들을 수습하여
울주군에서 운흥사지 부도밭으로 조성한 것이다.


 

 


비는 찔끔찔끔 오다 말다 변덕을 부리고 있다.
부도밭으로 들어가는 길이 그동안 빗물에 망가져 조금은 거친 편이다.
울퉁불퉁한 가파른 길을 조금 올라가면 완만한 오솔길로 접어든다.
부도밭은 그리 멀지 않은 울창한 대나무밭 아래에 위치해 있다.
부도밭은 그야말로 은둔자의 집처럼 깊은 적요에 묻혀있다.


 

 

  
운흥사지 부도는 모두 7기. 그중 4기가 현재의 부도밭에 있고,
나머지 2기는 아랫마을 시적사(관음사) 마당에 있고,
그리고 마지막 1기는 행방이 묘연하다 한다.

 


 

 


어느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일까?
석종형 부도에는 분명히 명문의 흔적이 보이는데 오랜 세월의 풍파에 씻기고 닳아
알아 볼 수가 없으니 어느 스님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무자비한 시간은 돌마저도 닳아 없애고 이윽고 모든 현상을 멸해버린다.
과거 수십 억만 년…….
미래 또 수십 수백 억만 년…….
엄밀히 따지면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는 한 찰나에 과거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고작 100년도 못 사는 인간들이 어찌 억만년 시간의 역사를 가늠조차 할 수 있겠는가?
언젠가는 이 단단한 화강암 부도도, 운흥사지도 모두 한 조각도 남김없이 사라질 것이다.


 

 

 
한참을 벤치에 앉아 부도를 바라본다.
문득 나도 부도가 되어 구차한 인생을 끝장내고 싶어진다.


열심히 일해서 가정을 돌보고,
사회에 봉사하고, 국가에 헌신하면서 젊음을 다 소진했다.


이것이 한 사람의 가장으로서 본연의 책무라면 나는 지금 무엇인가?
그 본연의 책무는 이제 다한 상태인데...
이제는 열정도 식어 없고, 사랑도 늙어 시들었다.


매일 먹고, 잠자고, 친구들 만나는 일 말고는 하는 일이 별로 없다.
삶의 의미가 상실되고, 이런 현상이 당연한 인생의 과정이 아닌가 싶지만...
더 사는 것은 어쩌면 구차한 삶이라고 생각 들기도 한다.
그래서 차라리 부도(浮屠)가 되고 싶은 건지 모른다. 


후드득~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한다.
잡념인지 망상인지 갑자기 죽음의 그림자가 춤을 춘다.
더 오랫동안 벤치에 앉아 부도를 바라보고 싶지만...
망상에서 벗어나고자 해탈의 문을 나선다.

 

 

●머무르고 싶은 암자 운흥사

 


운흥사지 바로 앞에 암자 운흥사가 있다.
작고 초라한 그 암자를 작년에 이어 다시 찾는다.
여기에서 초라하다는 의미는 보잘 것 없다는 말이 아니고
겸손과 겸양의 뜻이 담긴 초라함을 의미하는 말이다.


운흥사은 가장 암자다운 암자이다.
작고 정갈하다.
소박하고 과하지 않다.
화려함을 배제한 초라하지만 궁색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 암자를 3번 다녀 갔지만 한 번도 스님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암자는 오는 사람을 반기고 가는 사람을 말하지 않는다.
오는 사람이 곧 주인이고 가는 사람이 나그네 인듯...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암자이다.

 
큰 길에서 암자까지는 약 100여 미터 정도....
그 길은 작고 좁지만 그야말로 환상적인 길이다.
한 1키로 정도 됐음 싶은데 너무 짧은 것이 불만이다.
마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수미단으로 오르는 길처럼 길은 그렇게 오밀조밀하다.
처음에는 가파른 바위 길이지만 조금 지나면 속진이 모두 씻겨 나갈 것 같은
밝음과 평안함을 느끼게 하는 길로 이어진다.

 

 

 

 

 


암자로 드는 길은 빗질이 아주 잘 되어 있다.
금방 스님이 쓴 것처럼 티끌 하나도 없이 정갈하다.


 

 


무명(無明)을 벗어나려는 스님의 소망처럼 길은 그렇게 밝고 깨끗하다.
너무 깨끗하여 터벅터벅 밟고 지나 가기조차 민망스러울 지경이다.


어느 동승이 마당을 쓸고 있는 노스님께 묻는다.


‘스님. 왜 자꾸만 마당을 쓰는 것이옵니까?“


노스님이 웃으시면서 동승에 말한다.


“이 놈아 너는 왜 자꾸만 머리를 반들반들하게 깎냐?”


동승이 대답을 한다.


“스님 그야 머리가 자꾸 자라니깐 깎지요.”


노스님이 다시 말씀을 하신다.


“그래 거울에 먼지가 끼면 잘 안 보이는 것처럼 네 머리카락이나
 마당의 티끌은 모두 밝음을 가리는 무명이란다.“
“그래서 네 머리를 자꾸 깎는 것이고 마당을 깨끗이 쓸어야 되는 것이니라...”


동승은 그래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등 대며 노스님께 툭 한마디 던진다.


“그럼 스님, 왜 절에 오는 처사님들이나 보살님들은 머리를 안 깎지요?”
“뭐야 이 눔,  빨랑 가서 물이나 떠와 이 눔~”


두 스님 중에 누가 이긴 것일까?
아마도 노스님이 동자스님한테 한방 얻어맞은 것이 아닌가 싶다.

 
무명(無明)이란 무엇일까.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밝음이 없음을 의미한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온갖 번뇌에 얽혀 있는 어두운 세계를 말함이니,
곧 깨달음이 없는 범부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다.


무명을 자르는 스님들이야 다르지만 속세의 우리들은
결코 이 무명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이다.


나는 오늘 이 암자에서 잠시 그 무명을 벗어날지도 모른다.
암자의 일주문 안으로 들어서니 작은 건물이 보인다.


 

 


역시 초라한 집이다.
그렇지만 그 하얀 벽이 마치 소복단장한 깨끗한 여인의 모습처럼
청결하고 단아해 보인다.
초라하지만 궁색해 보이지 않고, 작지만 좁아 보이지 않는다.


 


 

암자 마당은 여전히 꽃으로 단장(?)되어 있다.
부처님이 계시는 곳이니 단청은 없어도 꽃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예쁜 들꽃들이 절 마당을 한결 부드럽게 해 주고 있다.  


 

 


어떤 보살님이 텃밭은 매고 있다.


“안녕하세요? 보살님, 좀 돌아보고 가겠습니다.”


여전히 샘물에 물이 철철 넘쳐흐르고 있다.
예쁜 표주박으로 물 한 모금 떠서 마시니 그야말로 감로수이다.


 

 


법당은 정말 작지만 정갈하다.
어느 분이 썼는지 ‘운흥사’라는 한문 현판 글씨가 예사롭지가 않다.


 

서예는 잘 모르지만 그래도 내 식견으로 볼 때는 잘 쓴

글씨라고 여겨진다. 그 흔한 단청 옷도 입지 않은 아주

작은 법당건물이지만 대쪽 같은 자존심이 서려 있는 듯

보이고 암적갈색과 백색 그리고 건물 주변의 녹색의

숲들과 조화를 잘 이루어 한 폭의 그림인양 아름답다.
 


법당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께 절을 올린다.
절은 많이 할수록 좋다고 들었으니 한 열 번쯤 올렸나 싶다.
생각 같아서는 108정도는 하고 싶지만....
마음은 있지만 행동이 따라주지 않으니 주객이 전도된 꼴이다.

 

 

 


운흥사의 불상은 여래상이 아니고 관세음보살상이다.
그야 여래면 어떻고 관세음보살이면 어떤가.
우리네야 모두 부처님으로 보이니 불상의 형식이나 수인의 모양이
어떤들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죄 많은 인생이라 차마 똑바로 불상을 처다 볼 수가 없다.
그래도 한참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니 다리가 저려온다.
고작해야 5분이나 됐을까.


빛이 들어온 하얀 문살을 보니 비로소 무영에서 벗어 난 느낌이다.
바로 이런 상태가 무명이 아닌 밝음의 세계이고,
곧 부처의 세계가 아닌가 싶다.


 

 


작년에 이어 오늘 다시 찾은 암자 운흥사....
왜 일까, 나는 암자 운흥사에만 오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며칠 머무르고 싶은 그런 암자이다.
암자마당에서 앞을 바라보면 정족산 정상이 보이고,
그 아픈 폐사지 운흥사지가 한 눈에 보인다.


 

 


스님은 계시는지 출타를 하셨는지 암자는 너무 조용하다.
다만 새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만 들릴 뿐이다.
조용함. 소박함, 정갈함, 편안함.....
이런 감성을 느끼게 하는 암자 운흥사...


그 암자를 다시 나온다.
차는 어느 새 그 찐득찐득한 속세를 향하여 내 달린다.
와이퍼가 차창으로 떨어진 빗방울을 쓸어낸다.
이것도 무명을 쓸어내는 행위일까?


내일은 꼭 어제 다툰 친구에게
먼저 사과를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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