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思索의 窓門/태화강 이야기~

엄흥도 찾아가기~

migiroo 2011. 10. 4. 22:21

 

 >2011.10.4

 

엄흥도 찾아가기~ 

 충의 엄흥도는 단종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 때 영월호장(戶長)이었다. 엄호장은 세조가 단종을 죽여 그 시신을 유배지 영월 청령포 서강에 버리자 죽음을 각오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둬 산에 묻고 피신했다. 200년 후 단종이 복위되자 엄흥도의 공적도 인정이 되어 왕으로부터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받고 공조참판에 추증되어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 되었다. 아래 글은 이런 이야기를 역사적 사실에 두고 여러 자료와 정보를 인용 일부 내용을 픽션 형식으로 쓴 글임을 밝혀둔다.)

 

 

 

<1> 청령포의 눈물, 떠도는 영혼~

 


10월 중순, 계절은 절기로 보아 아직 가을이라 하지만 사방천지 산간과 동강, 서강으로 둘러싸인 영월 땅은 겨울이 유난히 빨리 찾아온다. 그래서 청령포의 물은 밤이 되면 서서히 살얼음이 얼기 시작하고 기온도 뚝 떨어진다. 홍위의 시신은 아직도 청령포를 차마 떠나지 못하고 벌써 사흘째나 강물에서 빙빙 돌고만 있다. 홍위(弘暐)는 조선의 6대왕 단종의 노산군 시절 이름이다.


1457년 10월 24일, 세조는 드디어 단종을 죽였다. 단종을 죽이면서 세조는 고민에 빠졌다.
엄연한 정통 왕 이였고 자신의 친 조카에게 사약을 내리게 되면 왕족인 친족을 죽음에 이르게 한 왕으로서 후대 대대로 원망을 듣게 될까를 걱정한 나머지 단종을 죽이되 아주 서인으로 강등시켜 이씨 왕가의 족보에서 노산군을 빼 버리는 수법으로 평민 홍위에게 사약을 내려 죽게 했던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단종의 시신을 청령포 강물에 버리라하고는 “누구든지 시신(단종)을 거두는 자는 3족을 멸할 것이다.” 라고 왕명으로 엄명했다.
왕위를 찬탈한 것도 모자라 왕이었던 조카를 죽여 시신마저 거두지 못하게  했으니 세상 역사에 이런 천인공노할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땅을 치고 통곡할 일이다.


영월 호장(戶長) 엄흥도는 벌써 며칠째 강물에 둥둥 떠다니는 어린 왕의 시신을 몰래 바라보며 통한의 눈물을 지으며 가슴을 쳤다. 그러나 어쩌랴, 일개 작은 지방의 호장에 불과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그저 어린 임금의 시신을 바라보며 울분을 삼키고 이제는 왕이 된 수양대군을 향하여 속으로 욕만 퍼 부을 뿐이었다.


사흘 째 대든 날 드디어 엄흥도는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어 단호한 결심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선 부인에게 간단히 짐을 챙겨 집을 떠날 준비를 하라고 이른 후, 아들 광순을 불렀다.


“애 광순아, 이제 우리 부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힘든 일을 해야 될듯하구나.“


엄흥도의 아들 엄광순은 이미 아비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네, 아버지, 아버지 뜻대로 따르겠나이다.”


아들 엄광순은 이 말을 남기고 삽과 고깽이를 들고 선산이 있는 동을지산으로 향했다.
그리고 미리 눈여겨 봐둔 으슥한 곳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
시신을 묻을 무덤이었다. 
판 구덩이를 나무 가지로 보이지 않게 덮어 두었다.
이미 해는 지고 날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엄광순은 서둘러 아버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뛰어 갔다.
집에 오니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느 사이 짐을 꾸려 놓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오냐 알았다. 밤이 깊어 질 때까지 잠시 기다리자꾸나.”


엄흥도의 부인이 간단한 술상을 부자 앞에 내 놨다.
아비가 술을 따라 아들에게 건네자, 아들이 무릎을 끊고 앉아 두 손으로 공손히 술을 따라 아비에게 권한다.

두 부자 사이에 몇 순의 술잔이 말없이 오고 갔다. 그들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부인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떨어 졌다.
부인은 이제 몇 시간 후면 두 부자가 저지를 엄청난 일이 너무도 불안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부인 또한 단호한 마음을 먹고 말없이 두 부자간의 일을 도와주리라 마음을 굳혔다.  

 

 

<2>이제야 눈을 감다.

 

 


이윽고 시간은 깊은 밤 자시(子時, 밤 11-1시 사이)가 되었다.
엄흥도는 아들 엄광순을 데리로 청령포 외진 곳으로 들어갔다.
커다란 보자기를 강가에 감추고 사방을 돌아 봤다.
다행히 주변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잔잔했지만 기온은 꽤나 쌀쌀했다.
엄흥도가 눈짓을 하자 아들 엄광순이가 먼저 강물 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엄흥도가 들어갔다.
차디찬 강물이 두툼하게 입은 옷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술기운이 조금은 냉기를 식혀 주는 듯 했다.
이렇게 두 부자는 소리를 최대한 죽여 가며 왕의 시신을 찾아 헤엄쳐 갔다.
낮에 시신이 머물고 있는 지점을 미리 봐 뒀기 때문에 시신을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아들이 시신의 머리 부분을 감싸 안고 앞으로 나가고, 아비는 다리 쪽을 붙들고 시신을 밀며 나갔다.
잠시 후 강가로 시신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미리 감춰 둔 보자기로 잽싸게 시신을 싸맸다.

아들이 불끈 힘을 주며 시신을 어깨에 들쳐 업고 산 속으로 뛰기 시작했다.
엄흥도는 그런 아들이 너무도 듬직해 보였지만 잘 못하여 들키기라도 한다면 자신은 물론

하나 뿐인 자식마저 죽게 할 것이라 생각하니 몸에 피가 말라들어 가는 것 같았다.
 
 
왕의 시신을 업고 뛰면서 엄광순은 생각했다.


“왜 이리도 왕의 시신이 가볍지...?”


얼마나 굶주렸으면 17살 왕의 시신이 이렇게나 가벼울 수가 있을까,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펑펑 쏟아 졌다.

뛰면서 엄광순은 마음속으로 울부짖었다.


“으~ 죽일 놈, 수양대군 이 놈,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이미 육순이 된 아비 엄흥도는 아들의 뒤를 힘겹게 따라 붙어 뛰었다.

 

<3>떠도는 엄흥도 일가


말이 없어도 두 부자는 척척 할 일을 해 나갔다.
왕의 시신을 일사천리로 미리 파둔 무덤에 묻고는 봉분은 아주 작게 만들었다. 그래도 불안하여 남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봉분 위에 나뭇가지를 수북이 쌓아 올려놨다. 그리고 자신들만 장소를 알아 볼 수 있도록 무덤 주변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눈여겨보아 두었다.


(이리하여 엄흥도 부자에 의하여 단종의 시신이 수습되어 땅에 묻히니 목숨을 건 그들의 충절에 어찌 감읍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종의 무덤은 그 사후 60년 만에 어명으로(중종11년,1516)찾게 되고, 중종36년(1541)에 이르러 영월군수 박충원에 의해 노산군의 묘로 정식으로 봉축되어 제사를 지내게 된다.)


엄흥도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미리 대기 하고 있던 부인을 데리고 아들과 함께 남쪽 길을 따라 밤길을 걷기 시작했다. 야반도주였다. 군인의 신분인 호장이 야반도주를 한 것이니 무단 탈영인 셈이다. 만약 붙들리면 삼족이 아니라 구족까지 죽임을 당할 일이었다. 최대한 빨리, 최대한 멀리 도망가는 것만이 그들이 사는 방법일터였다. 날이 새면 왕의 시신과 함께 사라진 엄흥도 가족의 행방을 알아차리면 영월 관아는 그야말로 발칵 뒤집어 질 것이 뻔했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줄행랑을 쳐야했다.


(이상의 글은 당시의 절박한 상황을 상상해 보며 필자가 꾸며 본 글임을 밝혀둔다.)


이래서 엄흥도 일가는 영남 일대를 전전 하면서 모진 고통을 견뎌가며 연명해 갔다. 그의 후손 또한 세상에 나가지 못하고 숨어 살기를 수대 째를 이어오다가 엄흥도 5대손이 울산까지 내려와 정착하게 이르렀다. 드디어 그의 사후 200여년 후(1681년 숙종7년)에야 비로소 단종이 복위 되고 노산군의 무덤이 장릉이라 정하게 된다. 
현종 10년(1669)에 당시 우의정 우암 송시열의 건의로 엄흥도의 자손이 관직에 등용되고, 1726년에 영조왕은 엄흥도를 복위시켜 공조참판에 추증하고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리고 영월의 창절사에 배향케 하였다.
엄흥도는 이렇게 죽어서 모든 이로부터 숭앙을 받게 되었음은 물론, 그의 자손만대까지 빛을 보게 하였으니 참으로 존경할 만한 인물이 아닌가 싶다. 


엄흥도 그는 단종과 함께 죽진 않았지만 아마도 숨어 살다가 그 십여 년 후에 그도 죽어 단종 곁으로 갔을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엄흥도는 그 후 신분을 숨기기 위하여 개명을 하고 족보마저 없애 아들과 함께 죽을 때까지 은둔자 생활을 했다 전한다.

 
엄흥도가 언제 태어나서 죽었는지 그 생몰 년대와 가족관계가 문헌상에 나와 있는 곳이 없다고 한다. 다만 영월 엄씨 문중 기록에 따르면 엄흥도는 1404년에 태어나 1474년에 죽은 것으로 기록 되어있고  슬하에 아들이 하나 있는 것으로 되어 있으나 확실하지가 않다. 이에 따르면 단종이 청령포에서 죽은 해가 1457년이니깐 당시 엄흥도의 나이는 육순이 가까운 나이가 되는 셈이고, 그 때 단종의 나이가 17세 이었으니 그의 아들 또한 단종과 비슷한  나이가 아니었을까 하고 유추해 본다.

 

 

<4>엄흥도를 찾아서~

 

 

 


오늘 나는 충신 엄흥도의 후손들이 남긴 그의 흔적을 찾아  울산의 원강서원을 찾아 나섰다.
청명한 가을 날씨, 들녘은 어느 사이 서서히 황금물결로 변해가고 있다.
원강서원이 있는 울산 울주군 삼동면 둔기리 하작마을 앞 들판도 누렇게 익은
벼들이 풍요의 상징처럼 가을 햇볕을 받아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겨우 차 한 대 지나 갈 수 있는 좁은 농로를 따라 하작 마을로 들어가니 
단아한 전통 양식의 원강서원이 마을 뒷 편 가을 하늘 아래 오롯이 앉아 있다.
그런데 오는 날이 장날이라고 솟을 대문에 커다란 잠을 쇠가 굳게 잠겨있었다.
낭패다 싶어 하는 수 없이 발길을 돌리려 생각하다 너무 서운하여
여기까지 와서 그냥 돌아 갈수는 없다고 여겼다.

 

 

                                                                                          원강서원


해서, 뜻을 찾으면 길도 열린다는 말처럼 굳게 잠긴 대문을 열 방도를 찾아 나섰다.
서원 주변 마을 이집 저집을 기웃 거리며 엄씨 문중이나 서원 관리인을 찾아 나섰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던가, 길 가에서 우연히 서원 관리인 며느리라는 젊은 여인을 만났다.
엉뚱하게도 관리인은 성이 엄씨가 아니고 신씨라고 하면서 몇 번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서원 열쇠를 내 주면서 빨리 둘러보고 가라고 한다.
이리하여 나는 뜻을 이루고 비로소 엄흥도 자손들의 면면을 만나 볼 수 있었다.

 

 

 

 

                                                                           원강서원 엄흥도 묘정비와 비각


원강서원은 1799년(정조 23년) 울산에 살고 있던 엄흥도의 후손들이 울산 울주군 온산읍 대정리에 원강사(圓岡祠)를 세워 그의 제사를 받들었는데, 1817년(순조 17년)에 사림(士林)의 논의에 따라 이 사당이 원강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 후 1994년 원강서원을 삼동면 둔기리에 다시 복원하여 세운 것이다. 서원에는 엄흥도를 기리는 묘정비(廟庭碑)가 있는데 1820년(순조 20년)에 세운 것이다.


서원 안에는 서원 본체 건물 한 체와 제실이 두체, 그리고 엄흥도의 영정을 모신 사당이 독립체로 서원 뒤편에 있다.

 

 

<5>단종과 엄흥도의 시

 

 

 

나는 하얀 가을 햇살이 내려 앉아 있는 서원 뜰 악에 앉아
잠시 엄흥도를 생각했다.


爲善被禍 吾所甘心
(위선피화 오소감심)


엄흥도가 지은 여덟 성어이다.
청령포 차디찬 강물 위에 떠 있는 단종의 주검을 바라보면서 엄흥도는 이 여덟 성어를
가슴으로 토해 내며 드디어 3족의 멸함을 감수하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기로 결심했다.


“옳은 일을 하다 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나는 달게 받겠다” 


이 얼마나 가슴 뭉클한 말인가.
불의를 외면하고 정의가 혼탁해진 오늘의 사회 지도층들이 새겨들어야 할 금언이 아닌가 싶다.

영월 엄씨 문중들은 이 여덟자 성어를 오늘 날에도 가훈으로 삼아 집에 걸어 두고 있다니

엄씨 가문이 아니더라도 족자에 넣어 거실에 걸어 두고 싶은 글이다.

 
엄흥도의 ‘차운시(次韻詩)’ 라는 것이 있다.
또한 단종의 ‘자규시(子規詩)’도 전해 온다.
단종의 자규시는 유명하지만, 엄흥도의 차운시는 잘 알지 못한다.
이 두 편의 시를 읽으면 그야말로 그 당시 영월 땅의 애틋함이 절절히 가슴에 와 닿는다.
아마도 단종이 영월 땅에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엄흥도가 자주 찾아가 말동무를 했다했는데 이 때 단종이 ‘자규시’을 짓고,

그 화답으로 엄흥도가 차운시를 지어 어린 임금에게 바쳤다고 전해 오는데 분명한 역사기록은 없다.


암튼 이 두 편의 시를 읽으면 가슴이 찡하리만치 격해 온다.
그 때의 상황이 고스란히 현재의 내 가슴에 전이 되는 듯 싶다.
자! 단종의 ‘자규시’ 와 엄흥도의 애틋한 ‘차운시’를 가슴으로 읽어 보자.
한문자는 생략하고 한글로 풀이한 것만 여기에 옮겨 싣는다.


단종의 ‘자규시(子規詩)’


원통한 새가 되어 궁궐을 나온 후로         
외로운 그림자 산중에 홀로 섰네             
밤이 가고 밤이 와도 잠 못 이루고          
해가 가고 해가와도 한은 끝이 없어라  

   
두견새 소리 그치고 조각달은 밝은데        
피눈물 흘러서 지는 꽃이 붉고 붉구나            
하늘도 저 하소연 듣지 못하는데            
어찌 시름 젖은 내게만 들리는고... 

    
이 시에서는 제왕의 자리에서 쫓겨난 어린 임금의 애처로움과 비통함이 절절히 묘사돼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숙연케 한다. 17세의 어린 나이의 성숙한 시재(詩才)에 놀라울 뿐이다.


엄흥도의 ‘차운시(次韻詩)’


한번 영월 땅에 오시더니 환궁하지 못하시 옵나니
마침내 신 흥도로 하여금 두려움 속에 돌보게 하였나이다.
육순의 작은 벼슬아치 충성을 다하고자 하거늘
왕께선 열일곱에 운이 어찌 그리고 궁하시온지...


높고 높은 하늘에 밤마다 마음별이 붉고
위태로운 이 땅엔 해마다 눈물비가 붉나이다.
힘 없는 벼슬아치 의를 붙잡고 일어서서
홀로 능히 이 일을 왕께 들려 드리옵니다.


좀 더 서원에 머물면서 엄흥도를 생각하고 싶었는데
관리인의 독촉에 서원 문을 나섰다.
야박한 사람, 그 신씨라는 관리인은 나보다 훨씬 늙어 보였다.

 

 

<6>엄흥도의 진묘는?

 

 

 

 


그렇다면 엄흥도의 묘는 어디 있는가?
영월 장릉의 능역 안에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려각이 있다.
그리고 엄씨 후손들이 만든 것일 테지만 엄흥도의 묘도 아주 훌륭하게 조성해 놓았다.
영월의 엄흥도 묘소는 영월읍 팔괴리 창평산 자락에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엄흥도 묘소가 어찌 영월 땅에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다.
엄흥도는 분명 영월 땅을 떠나 남쪽 경상도 지방 어디가에 숨어 살다 죽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복원되고 난 후 묘소를 운둔지에서 옮겼을 수도 있지만....
문제는 묘소를 영월 땅으로 옮겨 왔다는 문헌상 기록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근년까지만 해도 영월에 있는 엄흥도 묘소가 진묘인지 가묘인지 논란이 분분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어났다. 바로 엄흥도의 진짜 묘가 경북 군위 의흥에서 발견 됐다는 학계의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다.

여기 그 기사를 간추려 아래 별지에 옮겨 싣는다.

 

 

<7>맺는 말


늦은 저녁 하작마을를 나온다.
많은 사람들이 원강서원을 찾아 엄흥도의 충의어린 역사적 행적을 찾았으면 싶다.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통하여 새 것을 얻음이다.
역사는 결코 흘러간 과거 시간이 아니다.
오늘 날 엄흥도의 충의를 배워 정의로운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바로 역사를 알아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만이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엄흥도 또한 위대한 사람임을 알은 날이다.


>미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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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시신 염습한 엄흥도 묘 군위 의흥면 조림산에 있다.
택민국학연구원 발굴 '영월 묘' 주장 뒤집어(기사입력 | 2009-09-18)
 

 

택민국학연구원 학술조사단과 김광순 원장(경북대 명예교수)이 문헌연구를 통해 밝혀낸 군위군 의흥 조림산 신남촌에 있는 묘가 진짜 엄흥도의 묘임이 확인됐다.

 
김광순 택민국학연구원장은 지난 그동안 울산, 청주, 문경, 안동 등 전국의 영월 엄씨 세거지를 답사하고 탐문 조사한 결과, 엄흥도의 묘가 현재 영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군위군 의흥에 있음을 밝혀냈다.
김 원장은 학술조사단, 보건대 강영숙 연구원간사, 배계용 상임연구원 등과 함께 국학연구론총 제3집에 발표한 논문 '충의공 엄흥도(忠毅公 嚴興道)의 삶과 묘소 진위에 관한 고찰'을 통해 단종의 시신을 염습한 엄흥도의 도피생활과 그의 묘소 진위에 대해 이같이 규명했다.


김 원장은 "엄흥도가 은거하여 생을 마치고 묻힌 묘소가 있다고 제시된 곳은 영월과 청주, 경상도 의흥 세 곳 중의 하나로 알려져 왔는데 충의공실기와 영월엄씨파보(寧越嚴氏波譜) 등의 기록을 근거로 엄흥도의 묘소가 의흥에 있다는 결정적인 증거를 찾아냈다"고 밝혔다.
"의흥의 광순문(光舜門)이 수대에 걸쳐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의흥 조림산(鳥林山) 신남촌(身南村)에 있는 엄흥도의 묘소를 잘 보존하고 있는 것은 엄흥도가 은거한 곳이 의흥이고 화본리의 묘소가 진묘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었다"는 김 원장은 "단종 시신을 수습할 때 엄흥도를 은밀하게 도운 아들 엄광순(嚴光舜)의 묘와 엄흥도의 묘가 의흥 신남촌 산등 하나를 사이에 두고 위치하고 있어 부자간의 은둔했던 삶의 궤적을 짐작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택민국학연구원 학술조사단은 이번 엄흥도 묘소의 진위 확인과 더불어 의흥의 영월엄씨 22세손 엄철업(嚴哲業) 등이 장(狀)을 올려 영조 9년(1733) 엄씨 종손에게 군역과 복호(復戶·세금)를 면제하는 완문(完文)이 내려졌음도 이번에 밝혀냈다. 이 완문은 의흥 종손이 약 300년 전부터 내용도 모르고 보관해 온 것으로, 학술조사단 김광순 원장은 의흥 광순문이 엄흥도의 자손임을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귀중한 문서임을 밝혀냈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