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암자 운흥사...
●암자 운흥사, 그 심연의 소슬빗살문~
폐사지를 나오니 길가에 “雲興寺”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올라 올 때는 못 봤는데 가려고 하니 보인다.
못 본 것이 아니라 미처 보지 못했음이리라.
“어? 운흥사...???”
“폐사지 운흥사와 같은 이름이네...”
조금은 늦은 시간이지만 암자로 들어 가 본다.
암자로 드는 길은 작고 예쁜 길이다.
그 길 끝에 더 작은 문이 보인다.
못 생긴 자연석을 이리저리 자연스럽게 싸 올린 계단 옆에
큰 바위 하나가 암자의 금강역사처럼 서서 잡인을 막고 있다.
암자의 문(門)은 문인데 문이 아니다.
대문이 없으니 늘 열려있는 문이고,
누구든지 들어와도 좋다는 문인 듯싶다.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문 위에 넝쿨나무 한 그루가 올라가
이제 막 연두색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문이 열려 있으니 허락도 받지 않고 문 안으로 들어가 본다.
그런데 기품 있어 보이는 어느 중년의 여인 한분이 뜨락에 서서
의아한 눈으로 나를 처다 본다.
이럴 땐 먼저 인사부터 하는 것이 멋쩍음을 피하는 방법이겠거니 하고
“안녕하세요? 저기 절터에 갔다가 물을 좀 마시려고 들어 왔습니다.”
물론 물 마시려 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그제야 여인이 목례를 하면서 대답한다.
“아 네, 물 여기 있어요. 마음껏 드세요.”
플라스틱 바가지로 물을 떠서 한 모금 마신다.
물맛은 아주 담백하고 달다.
그러데 플라스틱 바가지 보다 쪽박이나 나무바가지가
훨씬 운치가 있을 것 같은데 아쉽다.
절에 있는 샘물은 그냥 물이 아니고 감로수(甘露水)이다.
관세음보살님이 늘 정병에 감로수를 가득 담아 들고
목마른 중생들의 갈증과 고통을 풀어 주신다는 그 감로수다.
보통 절간의 수조(水槽)는 흔히 석조(石槽)인데
이곳 암자의 수조는 석조가 아니라 목수조(木水槽)이다.
석조보다 운치가 더 있어 보인다.
암자의 풍경은 그야말로 목가적이고 정갈하다.
어쩐지 낯설지가 않고 그냥 머무르고 싶은 그런 암자이다.
건물은 절집 형태가 아닌 전혀 다른 모습이고,
암자 마당은 온통 꽃과 채소밭으로 가꾸져 있다.
“雲興寺“라는 현판을 단 법당 건물이 내 마음에 쏙 들어온다.
암적색의 소슬빗살문 창호의 초라하고 작은 건물 한체...
그러나 정갈하고 소박한 그 건물이 왠지 마음에 쏙 든다.
벽면의 흰색과 창호의 암적색 소슬 빗살문이 대비되어
묘한 영감(靈感)을 일으키게 한다.
마치 정절을 지키다 죽은 어느 젊은 여인의 하얀 혼백 같은 모습 같기도 하고.
아무 치장도 없고 화장기 하나도 없는 젊은 비구니의 청순한 얼굴 같기도 하다.
그리고 왠지 한없이 측은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끌리는 그런 건물이다.
국보13호 무위사의 극락전, 국보18호 부석사의 무량수전에서 느꼈던
그 아련한 감정을 여기 운흥사라는 초라한 암자에서도 느끼게 되다니
놀라운 일이다.
암적색 소슬 빗살문을 하고 있는 법당 문의 창호...
그 단순하고 소박함이 창백함 같은 묘한 여운을 느끼게 한다.
마침 하얀 저녁 햇살이 문살에 내려앉아 더욱 창백해 보인다.
법당 옆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본다.
그런데 또 놀라운 사실.....
불단 위에 정말 아주 작은 불상이 홀로 모셔져 있다.
그것도 여래가 아닌 관세음보살님이시다.
사람들이 늘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며
입버릇처럼 연호하는 그 관세음보살님....
불안(佛眼)에 비해 조금은 크다 할 정도의 화려한 보관(寶冠)을
보니 얼마나 무거우실까? 하는 엉뚱한 걱정을 한다
보관에 아미타여래의 화불(化佛)을, 손에는 연꽃가지를 들고 계시니
분명한 관세음보살이고 때로는 연꽃 대신 정병을 들고 계시기도 한다.
아직 불자는 못 되었지만 불단에 절하고 작은 소원하나 빌어본다.
“부처님, 돈 마니 벌게 해 주소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은 끝이 없는가?
여기까지 와서 속세의 더러운 욕망을 씻지 못하니
참으로 나 자신이 불쌍하고 부끄럽기 한이 없다.
나이도 먹을 대로 먹었는데....
아직도 부질없고 허무맹랑한 욕망과 집착에 매달려 사니
그저 불쌍한 중생의 존재를 벗어 날 수 없다.
암자 뜰 앞에 전망 좋은 누마루가 저녁 햇살을 가득 안고 앉아 있다.
하루 종일 누마루에 앉아서 천년사지 운흥사 터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겨 봤으면 싶다.
그러나 아직은 그럴 만한 여유(마음)가 내겐 없으니
그저 그림에 떡일 뿐이다.
법당 건물 저 편, 예쁜 대나무 쪽문이 빠끔히 열려있다.
그 쪽문 안에 초록빛 잔디가 깔린 마당에 그림 같은 집한 체가
머리를 내밀고 앉아 있다.
저 집은 누가 사는 집일까?
아마도 주지스님의 거처인 듯 싶은데...
이쪽은 부처님 세계이고, 저 쪽은 피안의 세계인 듯
두 세계가 대나무 쪽문 하나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어떤 스님이 계시는지 담에 꼭 다시 방문하여 인사드리라 마음먹고
다시 들어 왔던 그 돌계단을 딛고 문 아닌 문으로 나간다.
문을 나서니 속계로 나가는 길이 울퉁불퉁 길게 누워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 갈 길만 남았다.
들어 올 때 10여 키로의 미로 같은 길을 걸어 왔으니
돌아 갈 때 다시 그 먼 길을 걸어가려니 걱정이 태산 같다.
아마도 캄캄한 밤이 돼서야 속세에 당도 할 듯하다.
●돌아가는 길~
어느 듯 해는 서산을 넘어가고 폐사지에는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는다.
운흥동천의 계곡 물소리는 해가 지든 말든 아랑곳 하지 않고
아무 걸림 없는 무애(無碍)를 즐기며 흘러 흘러가고 있다.
물은 왜 아래로만 흐르는가?바람은 또 왜 허공을 맴돌고 있는가?
그리고 시간은 가는 것인가, 오는 것인가?
늦은 오후 천년사지를 나오면서
나 또한 물과 바람에 묻어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운흥사지를 처음 찾는 분들을 위하여 오늘 나 같이 길을
찾지 못해 헤매지 말라고 여기에 운흥사지 찾아 가는 길을 놓고 간다.
*답사기 끝.
보잘 것 없는 글을 올려서 죄송합니다.
>未知路
✔운흥사지 찾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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