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내가본國寶문화재

▶국보 제287호.백제금동대향로

migiroo 2012. 1. 26. 14:33

 

■ 내가 보고 느낀 국보급 문화재(30)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


 

 


 

불국사, 석굴암은 경주의 대명사라면, 백제의 대명사는 ‘백제금동대향로’이다.
1993년, 높이 1m도 체 안 되는 64cm 정도의 이 향로가 출현 하므로 서
작은 지방도시 부여는 일약 세계적인 문화도시로 업그레이드 됐다.


그  '금동대향로'가 있는 부여로 간다. 부여는 백제의 세 번째로 옮긴 수도이다.
bc 18년, 시조 온조왕이 위례성(서울)을 수도로 삼아 개국하니 이를 한성백제시대라 하고,

그 후 고구려의 남하정택으로 22대 문주왕(477) 때 웅진(공주)으로 수도를 옮기니 이를 웅진시대라 한다.

그리고 26대 성왕(523) 때에 이르러 지금의 부여 즉, 사비성으로 천도(538)하니 이를 사비시대라 일컫는다.


660년 백제가 나당 군에 의하여 멸망하자 신라는 철저하게 700년 백제의 흔적을 지워 버린다.

이리하여 오늘 날에 전해 오는 백제의 유물 유적은 고구려, 신라에 비하여 너무나 빈약한 편이다.

 

 

 

 

그래서 그런가, 지금 부여에는 ‘백제역사문화단지’ 라는 곳이 생겼다.
사비궁을 비롯한 능사(陵寺)등 사비시대의 백제 건축물을 새로 재현(再現) 놓은 것이다.
물론, 국보 287호,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곳이기도 하다.


‘백제금동대향로’는 지금 부여박물관에 전시 되어있다.
이를 보기 전에 먼저 새로 재현해 놓은 ‘백제역사문화단지’를 돌아보았다.
놀랄 만치 거대한 백제시대의 건축물들이 이 시대 사람들의 감탄스러움을 압도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단지를 돌아본 소회는 별로 나의 문화재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냥 관광지의 볼거리 정도로 본다면 모를까 역사적인 문화유적지로 보기엔 왠지 가슴에 와 닿지 않았다.


왜 그럴까?


바로 장구한 시간의 흔적들을 재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건물의 기왓장 하나, 기둥 하나에도 고증을 거쳐 만들었겠지만

그것들에 배여 있어야할 과거의 찐득한 시간들이 묻어 있지 않으니 그저 현대에 지은 전통 건축물로 보일뿐이다.
황량한 폐사지에 홀로 서 있는 석탑 같은 유적지에서 느끼는 진한 감동 같은 것이 백제문화단지에서는 일어나지 않음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여를 답사 할 때는 꼭 백제의 한과 눈물이 짙게 서려 있는 ‘정림사지오층석탑’을 꼭 돌아보

아야 ‘백제문화단지’에서 느낀 아쉬운 감정을 조금은 달랠 수 있을 것이다.


나의 국립부여박물관은 두 번째 방문이다.
찬란한 ‘백제금동대향로’를 만나 보기 위하여 어려운 발걸음을 한다.

 

 

‘백제금동대향로’ 찬란한 그를 만나다~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형상 같기도 하고,
온갖 삼라만상이 새겨진 만다라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또 불교의 세계관을 극적으로 표현한 삼천대천세계 수미산 같기도 하고,
봉황과 용, 그리고 온갖 짐승들을 거느리고 살고 있는 신선들의 세계를
형상화 한 것 같기도 하다.
 

 


향을 피우지 않아도 향로에서 솔솔 향내가 나는 것 같고,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타고 나온 비천(飛天)들이 나타 날 것 같기도 하고,
용과 봉황의 노래 소리가 어디선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다.
어느 나라의 화려하게 성장한 여황제의 모습 같기도 하고,
진흙탕 속에서 피어오른 한 떨기 연꽃 같기도 하다.


이렇듯 이 세상의 어떤 찬사를 갖다 붙여도 모자랄 것 같은 ‘백제금동대향로’...
부여는 이것이 있어 행복하고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를 것 같다.
그래서 새로 지은 백제문화단지 같은 것이 없어도 충분히 사람들을 불러 모을 것 같다.

 

대향로에 조각된 갖가지 상들은 그야 말로 다양하다.
산과 강은 물론이고, 수많은 선인과 주악상 같은 인물상과 봉황, 용 같은
상상의 동물들과 호랑이, 멧돼지, 사슴, 코끼리, 원숭이 같은 실존 동물들이 무수히
많이 조각되어 있어 그야말로 신선의 세계, 이상의 세계를 함축적으로 조각해 놓았다.

 

 


이러한 유물이 출토당시 하마터면 포클레인의 육중한 이빨에 찍혀 산산조각이 날 뻔 했던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도 있었고, 그 극적인 순간을 놓쳤다면 금동대향로는 영원히 발견 되지 못하고 진흙 속에 묻혀 버렸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니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 진다. 이렇게 극적으로 출토되어 1400년 만에 세상에 나타난 유물 자체도 감격스럽지만

발굴 당시의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그 또한 감격스럽다.

 

 

이 한 장의 사진만 봐도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고 극적인가.
저런 자세로 천 수백 년 동안 묻혀 있었다니 정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말끔히 복원하여 박물관에 전시된 모습 보다 이렇게 진흙탕 속에 묻혀 있었던 모습이 더 실감나고 감격스럽다.
그러나 정말 다행스러운 것은 밀폐된 진흙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한 곳도 손상이 없이 발견 될 수 있었다니

이 또한 행운이고 하늘의 배려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백제금동대향로는 1993년 능산리 절터 발굴 조사 중에 450여점의 다른 유물과 함께 발견 됐는데 전해 오는

출토 당시 이야기 또한 대향로만큼이나 극적이었다 하니 어찌 그 이야기를 빼 먹을 수가 있겠는가,

....하여 아래에 옮겨 싣는다.


아무튼 부여 가면 ‘백제문화단지’는 안 보더라도 '정림사지 오층석탑' 과 ‘백제금동대향로’는 꼭 보았으면 한다.
나는 두 번 봤는데 그 마지막이 이 글을 쓰도록 동기를 준 작년 10월 쯤 이었다.


*위 사진 중 일부는 부여박물관과 문화재청 자료 사진은 인용한 것임을 밝혀 둔다.


>미지로의 생각

 

 

 백제금동대향로 발굴 이야기

 

아래 이야기는 중앙박물관 웹진 30호 박물관 타임캡슐에 실린 내용을 간추린 것이다. 1천 4백여 년 전 백제인 들의 삶과 내세관을 그대로 담아 만든 백제 문화의 정수이자 유럽보다도 천년을 앞서 한반도에 드러난 바로크 예술의 산 증거로 평가받는 <백제 금동대향로>. 1993년 늦가을, 부여 능산리의 차가운 어둠 속에서 끈질긴 정열과 남다른 정성으로 일구어낸 금동향로의 발굴현장을 찾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예감
 
1993년 12월12일, 충청남도 부여 능산리. 날이 점점 어두워지면서, 발굴을 계속할 것인지, 다음날로 미룰 것인지를 둘러싸고 발굴단내에선 한동안 의견이 분분하였다. 발굴 작업 중이던 논바닥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유물처럼 보이는 물체가 출현했다는 보고가 들어 온 것은 저녁 놀이 지기 시작한 초저녁 무렵. 그렇게 해서 발굴 작업은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둠 속에서 계속 야간 발굴 작업을 진행하다 혹시라도 유물에 손상이 갈까, 오늘 작업을 마무리하기를 바라는 우려의 의견이 제기되기도 하였지만, 결국 당시 발굴단의 지휘봉을 잡은 신광섭 국립부여박물관장은 "밤을 지새우더라도 절대 발굴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독려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의 발굴 작업을 감행하였다. 하지만 발굴단의 꼼꼼함과 진지한 탐구적 자세가 논바닥에 묻혀 영원히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우리의 귀중한 유물을 되찾아낸 발굴 작업이자 발굴단의 끈질긴 열정과 정성이 이룩해낸 개가였다.

 
끈질긴 열정과 정성이 찾아낸 우리 문화  


늦가을 저녁 어둠 속에서 불 밝혀가며 차가운 논바닥 진흙탕 속에 엎드려, 커피 마시던 1회용 종이컵으로 조심조심 물을 퍼내가며 이뤄진 <백제 금동대향로> 발굴 작업. 힘들게 이뤄졌던 발굴 작업이었던 만큼 일궈낸 성과 역시 남달랐던 발굴 작업이었다. 무엇보다도 무령왕릉 발굴 이후 백제 고고학이 거둔 최대의 성과로 손꼽히는 이 발굴 작업은 자칫 부주의했으면 무심코 지나쳐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년을 하루 같이 살다 환생하다


그렇게 백제 금동대향로는 천사백여년의 망각의 세월을 땅에 묻고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백제 금동대향로>는 도교사상과 불교사상이 가미돼 당시 백제인들의 삶과 종교 그리고 문화를 여실하게 부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다. 여의주를 물고 마치 승천하려는 듯 꼬리를 높이 치솟으며 다리 하나를 치켜 들고 서 있는 봉황 모습의 몸통. 다리와 꼬리가 뒤엉켜 향로를 떠받치고 있는 용의 머리 등 전체 높이 64cm, 12cm 높이의 뚜껑과 뚜껑 옆 부분에 새겨진 말은 탄 기마상, 책을 보고 있는 사람, 코끼리를 타고 가는 인간,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들 등 다채로운 백제인들의 형상. 꿈틀거림의 선율이 뒤엉켜 역동감을 자아내는 백제 금동대향로는 한마디로 유럽의 바로크 악곡을 압도하고도 남는 우리 문화의 시각적 교향곡 그 자체라 할 것이다.

 
웹진 바로 가기 http://muzine.go.kr/culture/30th/culture01_01.jsp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상세한 정보


국보 제 287호 백제금동대향로는 불전에 향을 피울 때 쓰는 향로로써 부여 능산리 백제시대 절터에서 출토되었다. 이 향로는 크게 보면 앞발을 치켜든 용 한 마리가 막 피어날 듯한 연꽃 봉오리를 물고 있는 듯한 형상인데 연꽃 봉오리의 중앙이 아래위로 분리되어 향로의 몸체와 뚜껑을 이룬다.

 
용 한마리가 연꽃 봉오리를 물다

 

 

                                  

 

 

 


향로의 뚜껑은 중첩된 형태의 산악으로 묘사되어있고, 그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마리의 봉황이 보주 위에 서 있다. 봉황 바로 아래 즉 뚜껑의 제일 위쪽에는 5명의 악사가 각각 금, 완함, 동고, 종적, 소 등의 5가지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데, 소발로 깎은 머리는 오른쪽으로 묶여져 있으며 통견의 도포자락과 악기마다의 독특한 자세를 취한 채, 연주하는 모습이 실감나게 표현되어있다(아래 사진 참조). 이 사이에 표현된 5 봉우리에는 그 상단마다 1마리씩 5마리의 새가 얼굴을 들어 정상부에 있는 봉황을 올려 보고 있다. 그 아래 향로의 뚜껑에 장식된 박산은 중국의 동쪽바다 가운데에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고 하는 삼신산(봉래 방장 영주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신선을 상징하는 듯한 각종 인물, 동물 산수 등이 다양하게 묘사되어있는데 동물들은 실존 동물 이외에도 상상의 동물도 많이 등장한다. 뚜껑의 문양을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전면에 걸쳐 삼산형의 산봉우리 24개가 배치되어있는데 산봉우리 가장자리에는 집선문 문양대를 배치하여 산림이 가득한 산을 연출하였다. 이 산봉우리와 계곡 사이에는 각종의 진금기수가 드라마틱하게 고부조로 묘사되어있는데, 6군데의 나무와 12군데의 바위, 폭포 그리고 산 사이를 흐르는 시냇물을 비롯하여 잔잔한 물결이 있는 물가의 풍경도 보인다.

 
뚫려있던 배연구는 모두 원형 배연구인데 사용해본 결과 향연이 원활하기 나오지 않자 부정형 배연구를 추가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향로의 뚜껑 내면은 외면의 돌출부분에 대응하여 돌출시켰기 때문에 전체 향로의 두께는 0.5-0.6cm 정도로 균일한 편이다. 하부는 반구형으로 생긴 몸체와 용트림하는 형상의 받침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부분의 연결도 관을 매개로 하여 접합하였다.

 
이들 곳곳에는 상상의 동물뿐 아니라 호랑이, 멧돼지, 사슴, 코끼리, 원숭이 등의 실존 동물, 그리고 산중을 거닐거나 나무 밑에서 참선하는 인물, 기마수렵인, 낚시를 하는 듯한 형상의 인물상 등 도합 16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쪽 즉 뚜껑의 구연부에는 1단의 유려한 당초문 문양대를 배치하였는데, 몸체의 구연부에도 같은 형태의 당초문 문양대를 배치하여 뚜껑을 닫았을 때 두 문양대가 서로 맞닿도록 배치하였다.
불로장생의 신선들이 살고 있다는 삼신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향로의 뚜껑 장식. 5명의 악사, 5마리의 새, 24개의 산봉우리, 6군데의 나무와 12군데의 바위, 폭포, 시냇물이 세밀하게 배치되어 화려함을 뽐낸다.  
 
향로의 몸체와 받침
 

                      

 


반구형의 대접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판을 배치하였는데 각 연판은 그 끝이 살짝 반전되었으며 잎의 끝부분에는 밀집선문을 음각하였다. 연판은 동체의 굴곡과 비례를 이루도록 윗 단의 폭이 가장 넓고 아래로 갈수록 그 폭이 줄어드는 방식을 취하였는데 제일 하단의 연판에는 2줄의 음각선으로 복엽을 묘사하였다. 각각의 연판 안으로 물고기, 신조(神鳥), 신수(神獸)등을 한 마리씩 도드라지게 부조하였으며 제일 상단의 연판과 연판 사이의 몸체 여백면에도 연판의 부조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동물상을 배치하였다. 또한 요고를 연주하오고 있는 모습의 주악상, 동물을 타고 있는 듯한 1구의 인물상이 장식되었다. 따라서 이 몸체에는 두 마리의 새를 중첩 표현한 연판 상단의 여백을 포함하여 도합 24마리의 동물과 2구의 인물상이 묘사되어있다.

 
제일 아래쪽의 받침에 해당하는 용은 승천하는 듯한 격동적인 자세로 굴곡진 몸체의 후미와 그곳에서 뻣어나온 구름모양의 갈기를 투각 장식하여 받침으로 삼았다. 용의 정수리에서 솟아오른 뿔은 두 갈래로 갈라져 목 뒤까지 길게 뻗어있고, 길게 찢어진 입안으로는 날카로운 이빨까지 세밀히 묘사하였다. 용의 입안으로 물려진 짧은 간주(竿柱)위로 몸체의 하부받침을 연결시켰다. 간주는 몸체 안으로 솟아올라 그 바깥쪽으로 몸체와 연결되는 관을 끼워 몸체와 받침을 연결하였다. 그리고 아래쪽 가장자리에는 휘감은 몸체 사이사이에 물결무늬, 연꽃무늬 등을 배치하여, 용이 물결을 박차고 승천하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불교와 도교의 복합적 요소, 백제왕실의 사상을 압축하여 표현해 
 
이 향로는 중국 한대 이후의 박산향로의 전통과 도상을 계승하면서도 오랜 시차를 두고 백제에서 출현하면서 시대적인 변화와 백제적인 요소가 더욱 가미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즉 향로 자체도 전대에 비해 휠씬 대형화 되었지만 뚜껑에 표현된 신선의 세계는 전대에 비해 훨씬 크고 웅장하며 보다 드라마틱한 구성으로 여러 가지가 복합적 요소가 가미되었고, 선인의 형상도 휠씬 인격화된 수행자 또는 도사의 존재로 표현되기에 이르렀다.

 
전면에 베풀어진 세부 도상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이 많지만 천상계인 정상에는 양을 대표하는 봉황을 두고, 그 아래 뚜껑에는 지상의 동물 및 인물상(신선), 그 밑인 몸체에는 연꽃을 중심으로 수중생물이나 물과 관련된 동물, 그리고 제일 아래쪽에는 음을 대표하는 수중동물인 용을 배치한 것으로 음양사상에 기본을 두고 배치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그리고 이 향로의 전체형상이 용의 입에서 나온 기운으로 연꽃봉오리가 만들어지며 이 연꽃봉오리 속에서 모든 도상이 형성되는 것이 불교의 연화화생을 의미하며, 이것을 연화장 세계 또는 수미산으로 보는 견해도 제시된 바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이 불교와 도교의 복합적인 요소로 꾸며진 문양이 시문된 것은 무령왕릉 은제 탁잔, 부여 외리 출토 문양 전에도 보여, 백제적인 문양표현의 중요한 특징이다. 아울러 이 향로가 출토된 절터가 불교의 일반적인 수행사찰이 아니고, 백제 왕릉인 능산리고분군의 원찰인 만큼 이 향로의 용도도 전형적인 불교의식 법구가 아니고, 백제왕실에서 선왕을 제사 지낼 때 사용하기 것이기 때문에 이 향로에는 당시 백제왕실의 사상관을 압축하고 있다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자료출처:중앙박물관 및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