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4.7
경주남산 창림사지가 확 변했다.
오랜만에 경주남산 창림사지에 오른다. 옛 말에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는데 오늘 와본 창림사지가 바로 그랬다. 삼층석탑은 물론이고 절터 주변 전망이 시원스럽게 확 터져 있기 때문이다. 너무 오랫동안 울창한 숲 속에 묻혀 탑은 물론이고 절터의 흔적조차 가늠하기 힘들었는데
어인 일인지 주변의 아름드리 소나무를 비롯하여 울창한 숲을 모두 제거 해버리고
먼 도로에서도 탑을 조망하게 됐으니 정말 잘한 조치라 여겨진다.
울창하게 둘러싸였던 숲을 모두 정리하고 탑의 동서남북 사방이 확 트였으니 이제는 탑도 숨통이 터인 듯 싶다. 도대체 얼마만인가? 아마도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은 숲속에 묻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문화재 당국에서 절터를 재 발굴 조사하기 위하여 절터 주변 나무를 모두 제거 해 버린 것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주변이 확 트이지 참으로 종전의 갑갑함이 사라지고 시원해 좋다.
창림사지는 서남산 첫머리 탑동 마을 옆, 논두렁길 건너 야트막한 야산에 있다.
비틀린 송림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직도 정 자국이 선명한 절의 주춧돌이 여기저기 보이고,
또 다른 탑재들이 논두렁 여기저기에 처박혀 있으니 어디서 어디까지가 창림사의 사역이었는지 알 길이 없다.
창림사지에 남아 있는 것은 그나마 복원된 삼층석탑이고, 민가의 무덤 앞에 엎드려 있는 쌍 귀부(돌거북)이다.
창림사는 신라 최초의 왕궁지 이었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왕(문성왕)이 직접 절을 지어 절의 규모가 큰 것은 물론, 화려하고 장엄하였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이제는 황폐한 절터 위에 주춧돌 몇 개와 탑하나만 달랑 남아 있을 뿐이다.
보통 탑 자리는 전망이 좋은 곳에 세우는데 창림사 삼층석탑은 이제까지 답답하리만치 울창한 송림에 둘러싸여 있었다.
처음 탑을 새울 때는 아마도 앞이 확 트여 전망이 좋았을 것인데 탑 주변의 나무들이 너무 많아서 숲이 탑을 완전히 포위한 꼴이 됐다.
이런 현상은 남산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탑들이 모두 그렇다.
경주남산에는 그동안 산림녹화 정책으로 나무가 너무 많아져 버렸다. 그래서 산불도 자주 나지만 좁은 면적에 나무가 너무 조밀하게 자라므로 서 숲의 생태에도 좋지 않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산에는 문화유적지가 산재해 있는 노천 박물관이나 다름없는데 문화유적들이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으니
적당히 나무를 정리하는 것도 좋을 듯 한데 아마도 문화재당국과 국립공원관리공단과의 원활한 소통이 잘 이루어 지지 않고 있는 듯하다.
관료들의 사고방식은 늘 닫혀 있으니 어찌 부처 간의 사이좋은 소통을 바라겠는가.
숲과 탑이 서로 조화를 이루게 하여야 한다. 남산은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관리한다. 그러나 공단은 절대로 나무를 자르지 않는다.
문화재보다 나무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남산에는 나무가 너무 많다. 무엇이든지 과(過)하면 좋지 않다. 적당히 조화를 이루어야한다. 산불의 원인 중에는 나무가 너무 많은 탓도 있다는 것도 알아야한다.
이제는 국도변에서도 보이고 오후의 석양빛을 받은 하얀 화강암의 석탑이 마치 사막의 신기루처럼 신비롭게 보인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을 자르는 아픔도 있었지만 잘려 나간 소나무의 희생이 있었기에 석탑이 더 빛날 수 있게 됐으니 소나무들의 살신성인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싶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뿌리 체 뽑혀 있다. 그러나 원래는 창림사의 건물이 있었던 곳이니 주인에게 땅을 되 돌려준 것이리라. 희생된 소나무와 멀리 보이는 탑의 원경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불교조각 미술의 진수는 아무래도 석탑일 것이다. 시대의 변천을 말해 주듯 3층, 5층, 7층.... 특히 신라의 석탑은 기가 막힌 황금비율로 이루어져 있어 석탑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평온해 지고 심리적 안정감을 느낀다.
장구한 세월을 담고 당당하게 서 있는 천년 석탑... 그 앞에 서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고 마음이 겸허해 진다.
녹슬어 낡아 버린 석탑의 보호 철책이 자꾸만 눈에 거스린다. 철책의 높이가 작은 사람의 키만하다. 차라리 없으면 얼마나 멋이 있을까 상상해 본다. 부득이 설치를 하려면 아주 자그마하게 영역 표시 정도였으면 좋았을 것을.... 이런 것 하나 만들려 해도 열려 있는 사고가 필요하다. 탑과 사람과 주변 환경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말이다.
아뿔싸, 또 이건 뭔가? 떨어져 나간 기단하대 갑석이다. 원래 것이 아니고 복원할 때 새로 끼워 넣은 새 석재이다. 신라인들이 세운 석탑은 천 수백 년을 버텨오고 있는데 현대인들이 보수해 놓은 곳은 고작 수십 년도 견디지 못하는 그 장인의 기술이 하늘, 땅만큼이나 차이가 있다. 작품에 대한 정성과 정신 그리고 장인의 혼이 있고 없는 차이 일 것이다.
●석탑의 팔부신중상
탑은 무너져 있었던 것을 1979년에 복원한 것이다. 현재 탑의 기단부 면석에 볼 수 있는 팔부신중은 남면(南面)에 아수라(阿修羅), 북면(北面)에 가루라(迦樓羅), 서면(西面)에 천(天), 건달바(乾달婆)의 이며,
나머지 4기는 떨어져 나가고 없어 조각 없는 새 부재로 복원한 것이다. 팔부신중은 불법을 수호하는 불타팔부중(佛陀八部衆)과 사천왕(四天王)의 부장(副將)인 사천왕팔부중(四天王八部衆)으로 나눌 수 있는데,
보통 팔부신중이라고 할 때는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든 불타팔부중(佛陀八部衆)을 말하며 우리나라에서 대개 형상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화유적지 안의 무덤들...
삼층탑 기단부 바로 밑에 정말 얌체 같은 무덤 하나가 누어있다. 탑은 곧 부처님 이라했는데....
이런 몰염치한 행위를 하고도 명당자리 효험을 얻을 수 있을까?
오히려 무덤을 쓰지 말고 탑을 잘 보존하고 관리 해 주면 저절로 복을 받고 가문이 잘 될 것이라 믿는다. 창림사지에는 지금도 10여기의 무덤들이 탑 주변에 몰려 있어 마치 작은 공동묘지처럼 보인다.
옛 절터가 곧 명당자리라는 잘못된 고정관념에 박힌 무덤 주인들은 당국의 이장 권유에도 아랑곳 하지 않는다.
경주 남산에는 이런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절터, 석탑지 마다 무덤을 안 쓴 곳이 별로 없으니 무덤이 있는 곳이 바로 절터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 이다.
그러나 절터에 제 조상묘 쓴 사람치고 명당 자리 덕본 사람 없다고 들었다. 사람의 이기심은 부처님도 없는 모양이다. 부처님은 이타심을 가르쳤는데 오로지 자신만 잘 되길 바라는 이기심만 낳았으니 잘 될리 있겠는가.
그래도 봄 꽃은 핀다. 탑의 지대석 밑에 용케도 자리를 잡아 민들레 가족이 둥지를 틀고 꽃을 피웠다. 천년 석탑에 천년에 한번 핀다는 불(佛)꽃 우담바라 같은 꽃을 피우니 석탑이 바로 부처임에 틀립 없다. 발길을 돌려 창림사 절터의 흔적들을 찾아본다. 절터는 탑 아래에 있다. 이제 본격적인 발굴조사가 시작 되면 절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신라 최초의 왕궁 터였었다 하니 절터의 규모가 대단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 강점기 때 1차 발굴 조사결과 또 다른 삼층석탑이 있었다고 하며 그 당시 비로자나불을 비롯한 여러 유물이 발견 되어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
●창림사지 쌍귀부(雙龜趺)
창림사지의 돌거북이다. 무거운 비신은 오간데 없고 머리 없는 귀부 두 마리만 남아 앞으로 기어가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천년을 기어가도 늘 그 자리... 시간이 정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주 남산의 석불들은 모두 머리가 잘려 나갔다. 석불뿐이 아니라 귀부들도 모두 머리가 잘려 나갔다. 그래서 석불이나 귀부들은 머리 없는 중증 지체장애 자가 됐다.
창림사지 쌍귀부(雙龜趺) 또한 머리가 없다. 잘린 머리 부분을 보면 육중한 둔기로 얻어맞아 잘려나간 흔적이 뚜렷이 보인다.
석불이든 귀부든 왜 목을 무참히 잘랐을까?
창림사지 쌍귀부는 비신의 받침대로서는 남산에서 유일한 귀부이다.
귀부는 2기의 민묘 앞에 있다. 거북은 비록 머리는 없지만 금방이라도 앞으로 기어 갈 듯 그 모습이 너무나 생생하다.
무거운 비신은 오간데 없고 살이 통통 오른 쌍 귀부는 앞발이 서로 엇갈려 각기 다른 방향으로 기어가려는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 몸짓이 얼마나 귀여운지 슬며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창림사 비신은 당대의 명필인 "김생(金生)" 이 비신을 써 더 유명하다.
떨어져 달아난 머리 중 하나가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 에 보관되어 있고 나머지는 행방이 묘연하다는데
발견된 것마저도 박물관 수장고에 꼭꼭 숨겨놨는지 볼 수가 없다. 그보다도 괘씸한 것은 귀부 앞에 버젓이 누워있는 쌍 묘이다.
옛 절터를 깔아뭉개고 제 조상 묘를 썼으니 얼마나 출세하여 부귀영화 누리며 잘 사는지 궁금하다.
●석탑의 앙화
창림사지 출토 삼층석탑의 상륜부에 이었던 *앙화(仰花), 이 앙화에는 4구의 여래상과 네 마리의 *극락조(가릉빈가)가 조각되어 있는데 마모가 심해도 조각이 너무 섬세하다.
앙화는 탑 상륜부의 일부분으로 탑의 마지막 층 지붕 위에 *노반을 얹고 그 위에 *복발이 얹히며 그 위에 *보륜을 받드는 꽃송이가 얹히게 되는데
그 꽃송이를 앙화라고 한다.
창림사지에서 출토된 것은 이 앙화 이외도 석등대좌 등 많은 와편(瓦片)이 발견 됐고, 특히 두 쌍의 석조 비로자나불좌상이 발견 되어 지금은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데 특별전 같은 행사 때만 볼 수 있다.
●근년에 도난당한 석탑재들~
안타까운 것은 논두렁에 박혀 있던 탑재들이 감쪽같이 사라(2009.3월)졌다는 것이다. 아마도 도굴꾼들의 소행이 틀림없을 것이다. 현상금을 걸어서라도 당국에서는 전국을 수배하여 도둑맞은 탑재를 찾아야 할 것이나
아직 몇 년 이 지났는데도 찾는지 마는지 아무 소식이 없다. 그까짓 탑재 몇 개 찾겠다고 경찰력을 사용 할 수 없다는 것인지, 아예 찾을 의지가 없는 것인지 한국의 경찰 수사력에
기대를 걸 것도 아니지만 찾을 의지만 있다면 왜 못 겠는가.
>미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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