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전국문화재 斷想

10.보림사 삼층석탑 상륜부

migiroo 2009. 9. 19. 11:16

 

●보림사 삼층석탑의 상륜부는 왜 온전히 남아 있을까?

 

 -전남 장흥/ 국보 제44호


보림사가 어떤 사찰이던가.
통일신라 구산선문 가운데 가지산문의 종찰이다.
대찰인데도 가람이 비교적 단출하다.
대웅보전과 대적광전을 비롯한 몇 안 되는 건물에 비하여
높은 담장을 두른 스님들이 기거하는 요사체 건물이 더 많았다.

 

 




경내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대적광전 앞에 서 있는
상륜부가 온전한 동, 서 삼층석탑과 그 가운데에 서있는 석등이었다.
조금 전 운주사에서 보고 온 키다리 9층, 7층 석탑을 보고 온
뒤라서 그런지 체감율이 잘 맞는 보림사 삼층석탑을 보니
탑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어떻게 상륜부까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혹시 새 석재로 복원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수수께끼는 바로 찰주에 있었다.
찰주는 보통 쇄 막대기로 되어 있어
상륜부의 여러 구성재를 찰주에 끼워 세우게 된다.
그러나 쇠로 된 찰주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부식되고 삭아 없어져
상륜부의 구성재들이 자연적으로 떨어져 나가 버린다.

 

 




그런데 보림사 삼층석탑의 찰주는 쇠가 아니고 돌로 되어 있어
상륜부 구성재가 온전히 남아 있게 된 것이란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의 찰주는 그대로 있는데
상륜부 구성재들은 어디 갔단 말이지...?
아마도 찰주 보다 상륜부 구성재들이 먼저 마멸되어
없어졌을 것이다.)

 

보림사의 동, 서 두 탑의 상륜부를 가만히 보니 서 탑의 상륜부가 동탑보다 짧다.
노반, 복발, 앙화, 보륜, 수연, 용차, 보주, 찰주 중 동탑에는 보륜이 5개 인 반면,
서탑에는 3개뿐이었기 때문에 동, 서 탑의 상륜부의 높이가
조금 차이가 난 것임을 알았다.

 

탑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지금 그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들을 일으키고 있을까?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없으니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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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림사 삼층석탑과 석등 문화재 정보

 

 ●보림사삼층석탑(寶林寺三層石塔)

 


국보 제44호
전남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 남쪽 기슭에 있는 보림사는
통일신라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體澄)이 터를 잡아 헌안왕 4년(860)에 창건하였다.
그 뒤 계속 번창하여 20여 동의 부속 건물을 갖추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졌다.
절 앞뜰에는 2기의 석탑과 1기의 석등이 나란히 놓여 있다.  

 

남북으로 세워진 두 탑은 구조와 크기가 같으며,
2단으로 쌓은 기단(基壇)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놓고 머리장식을 얹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다.


기단은 위층이 큰데 비해 아래층은 작으며,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매우 얇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어

쌓았으며, 각 층 몸돌에 모서리기둥을 새겼는데,
2·3층은 희미하게 나타난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계단형으로 5단씩이고, 처마는 기단의 맨윗돌과

같이 얇고 평평하며, 네 귀퉁이는 심하게 들려있어

윗면의 경사가 급해 보인다.
탑의 꼭대기에는 여러 개의 머리장식들을 차례대로

가지런히 올려 놓았다.

 

 

 

 

 


●보림사석등(寶林寺石燈)

 

 

 

 

 

보림사 석등은 신라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네모꼴의 바닥돌 위에 연꽃무늬를 새긴 8각의

아래받침돌을 얹고, 그 위에 가늘고 긴 기둥을 세운 후,
다시 윗받침돌을 얹어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을 받쳐주도록 하였다.
화사석은 8각으로 4면에만 창을 뚫어 놓았고, 그 위로 넓은 지붕돌을 얹었는데
각 모서리 끝부분에 꽃장식을 하였다. 석등의 지붕 위에는 여러 장식들 놓여 있다.


이들 석탑과 석등은 모두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으며,
특히 탑의 머리장식은 온전하게 남아 있는 예가 드물어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기록에 의해 석탑은 통일신라 경문왕 10년(870) 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밝혀졌고,
석탑과 더불어 석등도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문화재청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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