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단상/경주南山 斷想

창림사지 쌍귀부

migiroo 2012. 12. 27. 18:48

>2012.12.26


경주남산

 

창림사지 쌍귀부


아침 공기가 그야말로 냉장고 입니다.
친구들과 경주남산 둘레길 17km를 걷기로 했습니다.
다행히 해가 높아지면서 추위는 차츰 풀리기 시작했으나
겨울 남산은 그야말로 삭막합니다.
그래도 집에서 웅크리고 있는 것 보다는 
산이나 둘레길 같은 트레킹이 추위를 이기는 길입니다.
둘레길 주변에 있는 창림사지를 찾았습니다. 


창림사지는 경주남산에 있는 신라시대 옛 절터입니다.
그 곳에 있는 쌍귀부(雙龜趺)의 이야기 입니다.
귀부(龜趺)는 거북이를 뜻하고 돌로 만든 거북이를 말합니다.
귀부는 비석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일종의 비좌(碑座)입니다.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거북이 모습의 받침대만 남아 있습니다.

 

 

 


거북이 두 마리는 사이좋게 나란히 앞으로 기어가고 있습니다.
앞발과 뒷발이 서로 어긋나 있고, 머리도 서로 방향이 달라
고개를 좌우로 내 저으며 앞으로 나가고 있는 모습을
생동감 있게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정말 옛 신라 석공의 해학과 미적 감각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쌍귀부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마치 아기 거북이 두 마리가 앞서 가는 어미 거북을
‘엄마~‘ 하고 부르며 따라가는 모습을 연상시키기 때문입니다.

 
비록 깨지고 부서져 상처투성이지만 천 수 백년의 시간이
고스란히 이 귀부에 담겨져 있음을 봅니다.
한낱 돌 조각품이 아닌 천년 시간 그 자체를 보는 듯 합니다. 

 

 


그러면 머리는 왜 없어 졌을까요.
우리나라 전역에 옛 귀부(돌거북)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머리가 잘려 없어진 것이 대부분입니다.
왜 머리가 잘려 나갔을 까요.
그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자연적으로 머리가 잘린 것이 아니라
육중한 둔기로 머리를 내리친 인위적 흔적이 보인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현상은 귀부뿐만 아니라 석불의 머리도 무참히 잘렸습니다.
아마도, 아마도~~~
짐작컨대 숭유억불 시대의 조선시대에 저지른 만행 일겁니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짐작이 아니라 관련 학계의 추정입니다.


쌍귀부의 머리가  온전히 남은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로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숭복사지 쌍귀부’ 입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창림사지쌍귀부의 머리가 오래전에 인근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경주박물관에 보관 되어 있다합니다.
그러나 지하 수장고에 꼭꼭 숨겨 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또 다행스러운 것은 당국에서 최근에 창림사지 주변에 있는
무성한 숲을 모두 정리하고, 절터에 있던 많은 민묘(무덤)들도

다른 곳으로 이장시키고 있다는 것입니다.
1년 전만해도 창림사지쌍귀부 바로 옆에 두기의 무덤이 있었는데
이 무덤 또한 이장해 가고 없어 귀부의 환경이 한결 나아지긴 했지만

삼층석탑 옆에 있는 무덤은 아직도 그대로 있어 안타깝습니다. 
옛 절터에 무덤을 쓰면(명당 자리라 여겨) 자손이 잘 된다는 속설로 인해

무덤이 없는 절터는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는 석탑을 밀어내고 무덤을 쓴 곳도 있습니다.

부처님(탑이나 금당 자리) 밀어내고 자신의 조상 무덤을

그 자리에 쓰면 정말 그 집안이 잘 될까요.

 
창림사는 신라의 최초 대찰이었다고 합니다.
주변에서 이미 오래전 출토된 비로나나불 석불 두기와
삼층석탑의 앙화(석탑 상층부의 일부)도 출토 되어
지금은 경주박물관에 있습니다.
그리고 창림사지는 신라 최초의 왕궁 터 이었다고도 합니다.
지금은 절 건물의 주춧돌과 석재들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고
상륜부가 멸실된 삼층석탑이 절터 뒤편 높은 언덕에
우뚝 서 있습니다.


주변이 다 정리되고 나면 대대적인 재 발굴조사(2013년)가
이루어 질 것이라 하니 어떤 규모의 절터이고
어떤 귀중한 유물들이 출토 될 것인지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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