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4.25
경주남산 칠불암 가는 길에서 비를 만나다. 국보 제312호, 경주남산 칠불암마애불상군
오랜만에 경주남산에 오른다. 남산에서 가장 환상적인 길은 바로 칠불암 가는 길이다. 소나무와 키 작은 나무들이 울창한 숲 속 길은 그야말로 미지의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혼탁한 정신을 맑게 하는 치유의 길이고, 육신을 건강하게 하는 숲길이다. 요즘 말하는 피톤치드(phytoncide), 힐링(healing)의 트레킹 코스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숲 속 길이다.
4월의 남산은 그야말로 생명이 움트는 소리로 가득하다. 사람들의 눈이나 귀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생명의 소리.... 오직 깨여 있는 자와 열린자 만이 느낄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닫혀 있는 자의 귀에는 바람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태종무열왕, 문무대왕, 김유신의 삼국통일 위업을 기리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이 새운 그 통일전에서부터 걷는다. 칠불암까지는 약 3.5km, 그러나 짧다고 깔보면 안 된다. 동남산 아래 마을길은 비교적 완만한 길이지만 마을을 지나 칠불암까지 이어진 산길은 외롭고도 경사도가 제법 가파른 길이기 때문이다.
국보 312호, 칠불암마애석불은 들어오는 자에게 고행을 요구한다. 5월이 코앞인데 등에 땀이 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빗방울이 보이기 시작한다. 길은 아직도 반이나 남았는데……. 우산도 우의도 없는데 비를 만나면 어찌 하겠는가. 고가(?)의 카메라가 걱정이다. 그냥 돌아갈까 망설이다 설마 비가 많이는 안 내리겠지 하고 기왕 왔으니 칠불암까지 강행하기로 한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 다는 속담이 현실화 됐다. 빗방울이 제법 굵어지는 듯싶더니 본격적이 비로 바뀌기 시작한다. 길의 경사도는 점점 가팔라지는데 목적지는 아직 이고……. 정말 이런 경우를 두고 진퇴양난이라 말하는 가 싶다. 그러나 어찌하랴. 비를 비할 길이 없으니 뛰어 달리는 방법밖엔 없는 듯하다. 그러나 뛴다고 해서 비를 피할 수 있는가. 걸어도 뛰어도 비는 맞는다. 헉헉~ 숨이 턱이 차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그냥 걸어도 힘든 길인데 뛰었으니 늙은 심장에 너무 무리를 준 듯 했다. 입고 있던 웃옷을 벗어 카메라를 둘둘 싸서 가방 깊숙이 넣었다.
드디어 칠불암 300m 전방을 알리는 작은 이정표가 보인다. 모자 체양을 타고 빗물이 줄줄 흘러 내렸다. 상의가 흠뻑 젖어 버렸다.
드디어 마지막 칠불암에 오르는 계단이 시야에 들어온다. 길가에 매달아 놓은 ‘부처님오신 날’ 오색 연등이 비에 흠뻑 젖어 바람에 한들거리고 있다. 그러나 그 오색 연등을 보니 힘이 솟는다.
불가에서 연등을 밝히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의 어둠과 고통을 걷어내며, 지혜와 자비가 충만한 새 세상을 기원하는 불교의 종교적 의미가 담겨 있는 상징으로 사용된다. 연등은 주로 사월 초파일인 석가모니 탄신일을 경축하는 의미로 밝힌다.
오늘 비 내리는 산길에서 만난 칠불암의 연등.... 그 연등이 닫혀 있는 내 마음을 열어주고, 어두운 나의 눈을 밝혀 줄 것이라 믿는다.
카메라를 가방에서 꺼내 수건으로 칭칭 감고 사진을 찍는다. 사진 찍는 것도 기록이니 비가 온다고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은가. 정말 숨이 턱에 차 가쁜 숨을 몰아쉬며 칠불암 부처의 세계 수미단으로 오르는 마지막 고행의 계단 백여 개의 돌계단을 오른다.
드디어 칠불의 세계, 불계가 4월의 연초록 신록 속에 모습을 드러낸다. 빗물이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면을 타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다. 일곱 분의 부처님이 샤워를 하고 계신다.
산뜻하게 새로 지어진 암자 쪽마루에 앉아 비를 피하면서 마애석불 칠불을 바라본다.
경주남산에서 유일한 국보급 문화재, 단순한 문화재가 아니라 정말 불계에서 홀연히 나타나신 부처님을 만난 듯 불자도 아니면서 뜨거운 불심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시간은 오후 4시 경, 비는 금방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오든 말든 체념하고 빗물에 젖은 마애불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나는 지금 왜 여기에 와 있는 걸까?’
으스스 추워진다. 비 오는 산 위의 공기가 불안전 하다.
가벼운 잠바를 준비 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그때, 나의 상념을 깨트리듯 암자 방문이 열린다. 그리고 뜻 밖에도 아주 여린 외국인 비구니 스님 한 분이 얼굴 가득히 미소를 담아 말한다.
“비 오시는데 방안으로 들어오세요.“
스님 목소리가 맑다.
“안녕하세요? 스님, 여기가 더 좋아요”
나는 스님의 친절을 사양했다. 축축이 젖은 옷을 입고 방안에 드는 것 보다는 비 내리는 마애불을 바라보는 것이 훨씬 깊은 영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너무도 젊고 여리게 보였다.
암자 구석에 세워있는 우산을 잠간 빌려 쓰고 마애불을 카메라에 담기 시작한다. 후면 큰 바위 면의 삼존불 과 앞면 사각의 바위 면의 사방불은 통일신라 8세기 경에 새겨진 작품이라고 학계에서는 추정하고 있다. 바위 면의 마애불이지만 돋을새김 양각이 워낙 깊고 두꺼워 온전한 석불 같다.
칠불암 정상 위에는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이 있다.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방금 내려오신 듯 보살한분이 유희좌(遊戲坐)로 앉아 속세를 내려다보고 계신다. 칠불암에서 험한 바위를 타고 기다 시피 올라야만 만날 수 있는 마애불.... 그러나 오늘은 그 수미산으로 오르는 것을 체념하고 만다. 더 이상 비를 맞으며 바위산을 오를 힘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니 비가 소강상태로 접어든다. 이때다 싶어 하산하기로 하고 스님을 부른다.
“스님, 스님....”
안면이 있는 주지스님과 오늘 처음인 외국인 스님이 방안에서 나오신다. 두 분 스님에게 인사를 하고 사진 한 장을 부탁하니 흔쾌히 받아 주신다. 주지 스님은 방안에 서서, 외국인 스님은 쪽마루에서 포즈를 취해 주신다. 예쁜 외국인 스님은 체코에서 오신 분이란다. 전에는 헝가리 스님이 계셨었는데....
여자인 비구니 스님들은 남자스님 보다 더 엄격한 계(戒)를 받아 스님이 된다. 남자인 비구는 사미(沙彌)를 거쳐 250계의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스님이 되지만 여자가 스님이 되기 위해선 식차마나(式叉摩那)로 있다가 평생을 출가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되면 348계를 받을 자격이 주어져 구족계를 받아 비로소 정식으로 비구니가 될 수 있다한다. 여기에서 식차마나란 사미니(沙彌尼)에서 비구니가 되기 전 2년 동안 6 법(法)을 지키면서 수행하는 예비 비구니를 말한다.
즉, 사미니로서 구족계(具足戒)를 받고자 하는 여승은 18세가 되면 20세까지 자동적으로 식차마나가 되어 이 기간 동안 4 근본계(根本戒)와 6법을 지켜서 허물이 없게 되면 구족계를 받아 비로소 비구니가 될 수 있다.
4 근본계는
① 음행하지 않고, ② 도둑질하지 않고, ③ 살생하지 않고, ④ 허황된 말을 하지 않는 것이고,
6 법은
① 불순한 마음으로 남자와 몸을 맞대지 말 것, ② 남의 금전을 훔치지 말 것, ③ 축생의 목숨을 함부로 끊지 말 것, ④ 작은 거짓말도 하지 말 것, ⑤ 때 아닌 때에 음식을 먹지 말 것, ⑥ 술을 마시지 말 것 등이다.
2 년 동안 이들 행법을 통해 구족계의 자격 심사를 하게 되고, 아기를 가졌는지의 여부를 시험하게 된다. 이 식차마나의 단계는 남자 승려에게는 없는 특수한 승려 형태로서, 불교가 여성에게 보다 철저한 계율의 준수를 요구한 것에서 기인한 제도이다.
이런 어려운 수행 과정을 거쳐 비구니가 되는 여승들.... 어찌 존경심이 안 생길 수가 있겠는가. 더욱이나 외국인 여성으로서 낯선 이국땅에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피나는 수행정진이 있었겠는가.
하산을 하면서 생각하니 아차, 그 스님 이름(법명)이 무엇인지 물어 보지 못했으니 황망하게 떠나온 것이 후회스럽다. 산을 벗어나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옷은 젖었지만 오랜만에 칠불암을 찾은 기분이 상쾌하다. 다시 3번의 환승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니 캄캄한 밤이다.
>미지로
경주남산 칠불암에 대한 문화재청 자료
국보 제312호 칠불암 마애불상군
가파른 산비탈을 평지로 만들기 위해서 동쪽과 북쪽으로 높이 4m 가량되는 돌축대를 쌓아 불단을 만들고 이 위에 사방불(四方佛)을 모셨으며, 1.74m의 간격을 두고 뒤쪽의 병풍바위에는 삼존불(三尊佛)을 새겼다.
삼존불은 중앙에 여래좌상을 두고 좌우에는 협시보살입상을 배치하였다. 화려한 연꽃위에 앉아 있는 본존불은 미소가 가득 담긴 양감있는 얼굴과 풍만하고 당당한 자세를 통해 자비로운 부처님의 힘을 드러내고 있다. 왼쪽 어깨에만 걸치고 있는 옷은 몸에 그대로 밀착되어 굴곡을 실감나게 표현하고 있다. 손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려 손끝이 땅을 향하게 하고 왼손은 배부분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좌·우 협시보살은 크기가 같으며, 온몸을 부드럽게 휘감고 있는 옷을 입고 있다. 삼존불 모두 당당한 체구이며 조각수법이 뛰어나다. 다른 바위 4면에 새긴 사방불도 화사하게 연꽃이 핀 자리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방향에 따라 손모양을 다르게 하고 있다.
원래 불상이 들어앉을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모셨을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도 이곳 주변에서 당시의 구조물을 짐작케 하는 기와조각들이 발견되고 있다. 조각기법 및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보아 이 칠불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 석불들은 암반(岩盤)에 새긴 삼존불(三尊佛)과 그 앞 모난돌 4면에 각각 불상(佛像)을 새기어 모두 칠불(七佛)이 마련되어 있어 칠불암마애석불(七佛庵磨崖石佛)로 불리어 오고 있다.
삼존불의 가운데 있는 본존불(本尊佛)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손은 항마인(降魔印)을 하고 있어 석굴암(石窟庵)의 본존불과 같은 자세이며 불상의 높이가 2.7m에 이른다. 또한 4면에 새긴 4면불(四面佛)도 모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각기 방향에 따라 손의 모양을 달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깊은 산 속에 대작의 불상을 조성한 것도 놀라운 일이나 조각수법 또한 웅대하다.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인 8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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